히카루와 하치만이 친구가 아닐 무렵~아오이 (13)
<11장. 미카도 히카루는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서 자전거를 잠시 세우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바라본다.
‘언제든지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그렇게 말하며 시키부는 나에게 연락처를 가르쳐줬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연락처를 얻었다. 참고로 다른 사람 쪽에서 내게 가르쳐준 것은 처음이다.
이제 이 폰에는 새로운 인연의 무게가 더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흥, 인연의 무게 무지 가볍구만. 이딴 거에 일희일비하던 불과 1, 2년 정도 전의 내가 너무 바보같이 생각되어서 무심코 피식 웃어버렸다. 그것을 보고 미카도가 말한다.
“시키부의 연락처를 얻어서 기분 좋은가 보네? 좋겠다~. 나도 살아 있을 때 시키부와 짧은 대화는 몇 번 해봤지만 연락처는 얻지 못했어.”
“......대체 어디가 기분 좋아보인다는 거냐?”
내 말에 미카도는 아무 말도 없이 싱글벙글한다. 이 녀석 요즘 의미심장한 웃음만 짓는 경우가 너무 많단 말이지. 만약 라이트노벨이라면 사실 이 녀석이 흑막이 아닐까 생각해버릴 수준이다.
충분히 쉬었다. 이제 가자.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오늘은 바로 집에 안 가네?”
미카도가 내가 가는 방향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앞을 보느라 내 위에 떠 있는 미카도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대답했다.
“용무가 좀 있거든.”
“무슨 용무?”
“당연한 거 아니냐. 선물 준비. 일단 준비가 되어야 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그러고 보니 그러네! 하치만, 고마워!”
“시끄러워. 자전거 타고 있을 때는 좀 조용히 해. 집중이 안 된다고.”
**
극적인 일이 한두 번 있었다고 반드시 사람의 삶이 한 번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어제 나와 시키부(굳이 넣자면 유령인 미카도도 포함한다.)는 나름대로 청춘물 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급격히 바뀌거나 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 둘은 교실에 있을 때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다. 내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시키부가 나와 대화를 나눌 경우에 생길 만한 위험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어주었기 때문이다.
“.......”
그래도 시키부는 등교한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까딱하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것이 변화라면 변화이다. 초반에 살벌하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진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점심시간이 되기 전 나는 화장실에서 몰래 시키부에게 메일을 보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은 다른 용무가 있어서 거기에서 점심 안 먹는다.>
설마 싶지만 혹시라도 시키부가 또 그곳을 찾아올까 봐 메일을 보내둔다. 만약 시키부가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나는 혼자 이상한 소리를 한 놈이 되겠지.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다. 그대로 폰을 집어넣으려는데 답장이 왔다.
<알았어. 그럼 오늘은 딴 데서 점심 먹을게.>
진짜 오늘도 거기 가려고 했건 것인가.......
옆에서 미카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온다.
“다른 용무라는 게 뭐야, 하치만?”
내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런 거 없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뭐어? 왜 시키부한테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시키부가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는 하치만도 분명 부탁한다고 그랬었잖아?!”
이 말에 내가 미카도를 바라보고 설명했다.
“세상에는 마음만은 고맙다거나 마음만 받아둔다는 말이 있다. 내 경우에도 그거지. 사실 시키부가 뭘 도와준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큰 도움도 못 될뿐더러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시키부에게 폐만 끼칠 가능성이 커. 게다가.......”
“게다가?”
“너도 아까 들었을 거 아냐?”
나는 방금 전에 들은 얼핏 들은 이야기를 회상했다.
**
나에게 쉬는 시간은 어색해서 괴로운 시간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외톨이는 설명을 안 해도 알아들을 것이고, 외톨이가 아닌 사람은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테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쉬는 시간에 눈을 말똥말똥 뜬 채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기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1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어디론가 갔다 오기도 여의치 않다. 책을 읽자니 너무 어수선해서 집중이 되지 않는다. 여기 정말 소문 난 명문교 맞나?
어찌 됐든,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이어폰+엎드림이다. 이어폰을 끼고 엎드려 자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쉬는 시간에 내가 필연적으로 만나는 어색함을 해소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내가 엎드린다고 무조건 잠이 오는 체질이 아니므로 실제로는 자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어폰을 낀다고 무슨 음악을 듣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쉬는 시간마다 계속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면 내 귀가 머지않아 아작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그냥 겉으로만 음악을 듣는 척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관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내 자랑을 하나 하자면, 나는 귀가 밝다. 예전부터 꽤 떨어진 곳에서 나를 욕하더라도 모조리 알아듣고 울었던 것이 바로 나였다.
이런 요소들을 통해, 나는 쉬는 시간에 교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에 대한 헛소문을 체크할 수 있었다. 대화하는 사람 하나 없었던 내가 나에 대한 소문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다 나의 <쉬는 시간 모드> 때문이다. ......왠지 슬퍼진다. 오늘도 나는 본의 아니게 나에 대해 돌고 있는 소문을 자세히 체크할 수 있었다.
내가 엎드려 있고 미카도가 심심했는지 계속 나에게 말을 걸고 있던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뤄졌을 것이라 추정되는 어떤 대화가 들렸다.
“저기, 호노.”
여자애 목소리다.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아, 반장이로군. 시키부와 접점이 생기기 전에 그나마 나와 학교에서 가장 많이 대화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알려줘야 할 사항만 알려주고 나서 반장은 재빨리 가버려서 그걸 대화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대화로 인정하면 그렇게 된다.
“왜 미치루?”
다른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건 누구 목소리인지 확실하게 알 것 같다. 시키부다. ‘호노’라는 건 시키부의 애칭인 모양이다. 이름인 호노카에서 나왔을 것이다. 반장과 시키부는 상당히 친한 사이인 모양이다.
반장이 시키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노, 혹시 요즘에 히키가야 군이랑 같이 다니고 그래?”
시키부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말에 반장이 다시 대답했다.
“호노랑 히키가야 군이 같이 있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었거든. 그래서.......”
“아니! 그런 적 없어! 절대로!”
시키부가 부정했다. 이것은 내가 미리 부탁해놓은 것이다. 나는 지금 도는 헛소문만으로도 골치를 썩이고 있는데, 거기에 새로운 소문이 추가되면 더 힘들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나와 시키부가 같이 있는 걸 보았다고 한다면 반드시 부정해달라고 부탁해놓았다.
나는 엎드린 자세로 복잡한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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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부는 좋은 녀석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와 엮여서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시키부의 돕겠다는 마음은 고맙게 받아두겠지만, 그 녀석을 끌어들이지는 않을 거다.”
내 말에 미카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쩐지 나, 점점 더 하치만에게 미안해지고 있어.”
이제야, 네가 나한테 얼마나 폐를 끼치고 있는지 느끼는 거냐. 내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사오토메 선배 일을 해결 못해도 나에게서 떨어져줄 거냐?”
“아니, 그건 정말 내 마음대로는 되지 않을 것 같아. 정말 미안!”
“칫, 이 민폐 유령이.”
“너무해!”
종소리가 들린다. 이제 다시 교실로 돌아가볼까.
**
점심시간에 나는 미리 봐둔 또 다른 비밀 장소에 와있었다. 여기도 인적이 없기는 하지만, 주변 경관이 거기보다는 좋지 않기 때문에 점시식사 장소 B로 지정해두었다. 혹시라도 비밀장소 A에 가는 것을 시키부한테 들킨다면 귀찮아질 수 있기 때문에 한 선택이다.
다시 한 번 주변을 확인한다. 아무도 없다. 여기서라면 미카도와 거리낌 없이 작전 회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시키부가 계속 간섭해오는 통에 진전이 거의 없었다. 집에서 회의하면 되지 않느냐고? 집에서는 코마치가 간섭해온다. 요 며칠 코마치는 거의 매일 내 방에 들어와 나의 학교생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내가 미카도에게 말을 걸었다.
“미카도, 다시 한 번 상황을 정리해보자. 너는 여섯 개의 선물을 준비했고, 내가 그것을 사오토메 선배에게 전달해주기를 바란다, 맞지?”
“맞아. 그 선물을 통해 아오이 누나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정말 사오토메 선배 좋아하는 거 맞지?”
“너무해, 하치만! 날 대체 뭘로 보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의 재림. 남자의 적.”
“하치만, 사실 나 싫어하는 거야!? 아니지!?”
나는 이 녀석에게 또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너는 네가 왜 남자들에게 미움 받았는지 아냐?”
“질투 때문 아니야?”
“물론 그 말도 정답이야. 하지만 그 말만 들으면 왠지 너를 미워하는 남자들이 잘못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쪽에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생각돼. 너는 모든 여성들에게는 제각각의 매력이 있다고 했었지?”
“맞아. 모든 여성은 각자 꽃과도 같은 저마다의 매력이 있어. 나는 그것을 마주할 때마다 황홀함을 느끼지.”
그렇게 말하는 미카도를 보며 내가 말을 이었다.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게 너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마 다른 남자들도 모든 여자의 매력은 아니더라도 한두 명의 매력을 알 수 있었을 거고 거기에 흠뻑 빠지기도 했겠지. 그런데 자신들이 매료된 여자들이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 여자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닌 너를 말이야. 이렇게 생각해보면 네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드러나는 거다.”
“크윽, 반박할 수가 없어. 갑자기 내가 정말 나쁜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들어.......”
“그렇게 나쁜 남자인 너니까 그 사오토메 선배를 좋아한다는 것도 사실은 그렇게 진지하지 않은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으윽, 내가 나쁜 남자였다는 것은 인정할게. 그래도 아오이 누나에 대한 내 마음은 더없이 진지했어. 나는 아오이 누나와 함께라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 그래서 나는 그 선물들을 준비한 거야.”
그 대답을 듣고 나는 미카도가 처음에 사오토메 선배에 대한 일을 부탁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너 말이지, 그렇게 아오이 누나, 아오이 누나 거리는데, 사실 너와 연인 관계인 여자들은 엄청 많았잖아. 그 때문에 사오토메 선배가 적어도 겉으로는 네 이름만 나와도 치를 떨게 됐지. 사오토메 선배가 그 정도로 소중했다면, 네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면 그녀를 위해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를 청산할 생각은 없었냐?”
내 말에 미카도는 잠시 입을 다물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느릿느릿하지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네가 몇 번 말했듯이 나는 거짓된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지내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 아무리 아오이 누나가 소중해도, 아오이 누나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편지를 아오이 누나에게 보내기 전에 생각한 거야. 아오이 누나라면 나의 유일한 사람이 되어주지 않을까 하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다른 여성들의 사랑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이상할 정도로 행복한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편지를 썼어. 선물을 전하면서 고백할 생각이었어. 이제는 아오이 누나만 바라보겠다고 말이야.”
하지만 이 녀석은 죽었고 그 결심은 전해지지 못했다는 건가. 엇갈렸군. 아주 가까운 곳인데 너무 멀리 돌아서 가다가 결국 도착하지 못한 것인가.
“이제 바람 안 피울게요!”
갑자기 미카도가 소리친다.
“아오이 누나만 바라볼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미카도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도와주세요, 하치만 대보살님!”
어이, 나는 이미 널 돕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런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 어차피 이제 와서 발을 뺄 생각 따위는 없어.
“시끄러워. 한 번 해볼 테니까 소리지르지 좀 마.”
이렇게 말해두자.
“좋았어. 그럼 남은 며칠 동안 사오토메 선배에게 네 선물을 전해볼까!”
어울리지도 않게 의욕에 찬 말투를 가장하며 말하는 나를 보더니 미카도가 두 손을 모아 부탁했다.
“하치만, 네가 꼭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