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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6. 쐐기풀 장신구 - (2)


 "언니!"

리젤로트는 치맛자락을 감아쥐고 달렸다. 복도의 타일이 구둣바닥과 부딪치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녀의 시녀들이 허겁지겁 종종걸음을 쳐 따라왔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기다려 주세요, 언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성큼성큼 걷던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으므로, 리젤로트는 거의 그녀와 충돌할 뻔 했다. 아슬아슬하게 발걸음을 멈추자 푸른 장미로 장식한 올림머리가 풀려 땀에 젖은 목덜미로 떨어져내렸다. 리젤로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니,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크리스틴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딱딱했다. 지독히도 낯설었다. 이 사람의 얼굴이 이랬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크리스틴과 그녀 사이에는 오 년의 나이차가 있었다. 크리스틴이 이블린에 있을 적에는 무도회에서 밤새 춤을 출 나이였고, 리젤로트와 미네트는 아직 어려 어른들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리젤로트는 친언니와 대화한 시간이 열여섯 짜리 새언니와 얼굴을 맞댄 시간과 얼마 차이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 말이 없으면 가보려무나."

"잠시만요!"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주인을 따라잡은 시녀들이 후다닥 머리손질을 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리젤로트는 어깨를 들썩였다.

"언니가 화가를 데려가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내가 데려오라고 명령했단다. 안 되니?"

"언니. 물론 언니는 화가를 언제든지 불러들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분이에요. 하지만 오늘만은 그러시면 안 되죠!"

"왜 안 되니?"

"언니!"

그녀는 빽 소리질렀다.

"오늘은 오라버니의 결혼식 날이에요. 밑그림을 그리기로 한 화가를 멋대로 빼가시다니요! 하다못해 저나 이모님께 양해를 구하셨어야죠!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신성한 주님께 맹세컨대 언니는 짐작도 못 하실 걸요!"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급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와 달리 크리스틴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아니, 차분해보였다.

"왜 내가 너나 오를레앙 대공비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거니?"

"그야 저와 이모님이 이 결혼식의 행사를 주관하니까요."

"자비관의 여주인은 가장 신실하신 황후 폐하시지. 언제부터 일개 마담이나 일개 대공비가 세르의 결혼을 주관하게 된 거야?"

리젤로트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 자기와 눈높이가 똑같은 큰언니를 노려보았다. 수도원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조롱을 입밖으로 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남아있었다.

"언니. 지금 그런 세세한 일을 따질 겨를이 없어요. 데려가신 화가를 돌려주세요. 언제 식이 시작할 지 아무도 모른다고요. 만일 언니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동안 식이 시작되어 그림이 남지 않는다면 언니는 분명히 후회하게 되실 거예요."

"마담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지금 마담 르와이얄인 내게 먼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협박을 하는 거니?"

리젤로트는 하, 숨을 내뱉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물론 마담 르와이얄, 황제의 장녀는 차녀 이하의 다른 마담들보다 지위가 높았다. 하지만 이 이블린에서 황실의 피를 이은 남매들이 언제 그런 걸 따졌단 말인가? 부르고뉴 대공비인 작은언니는 물론이요 세르인 세시안조차 리젤로트와 미네트에게 그런 예법을 강요하지 않았다.

"너마저도 내게 이리 무례하구나. 다들 그렇지. 허울 좋은 마담 르와이얄이라 하여 고개를 숙일 생각조차 않더구나. 수도원에서 십 년을 지내 곰팡내가 난다 하여 내가 두 분 가장 신실하신 폐하의 장녀라는 사실이 사라진다더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리젤로트는 날카롭게 비꼬았다.

"언니. 십 년 동안 수도원에서 신앙을 오롯이 갈고 닦으시느라 그 '곰팡내'가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다는 건 굳이 설명해 주실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그 부채만 봐도 모두가 알 수 있거든요! 요즘 이블린에서 그런 동부식 부채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크리스틴은 부채를 꺾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가느다란 살이 무참히 꺾이고, 얇은 비단이 뜯겨나가 안쓰러운 모양새였다. 그녀의 눈은 형형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감히."

리젤로트가 한 번 더 쏘아붙이려는 순간 또각또각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신분 낮은 이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내는 인기척에 익숙한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렸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검은 머리칼에는 푸른 빛이 흘렀고, 그 눈은 동부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호박색이었다. 웬만한 사내보다 키가 커서, 얼굴을 보기 위해 리젤로트가 고개를 꺾어 올려야 할 정도였다. 검은 머리 여자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크리스틴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마담 르와이얄, 그리고 마담께 인사올립니다. 분부하신 대로 화가들이 대성당을 둘러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고 오는 길입니다. 그들은 마담의 명대로 결혼식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화폭에 담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더군요."

리젤로트는 기가 막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시녀들도 입을 손으로 가렸다.

크리스틴은 대단히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알았다."

"더 명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아니, 없단다. 서두르자꾸나. 이러다 식을 놓치겠어."

크리스틴은 몇 걸음 떼다가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주름 하나 없이 뻣뻣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안 가니? 네가 그리 찾아 마지않던 화가가 이미 ​도​착​해​있​다​는​구​나​.​"​

리젤로트는 할 말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얘기해야 할 지 도저히 결정할 수 없었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그런 그녀가 마침내 생각을 정리했을 때는 이미 크리스틴과 검은 머리의 여자가 복도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지금 몇 시야?"

그녀의 시녀인 베아트리스가 회중시계를 꺼냈다.

"오후 세 시 십오 분입니다, 마담."

벌써 늦었다. 리젤로트는 분을 참고 다시 한 번 복도를 내달렸다.

 

생(saint) 아델라 성당은 이블린에 있는 다섯 개의 성당 중 가장 작은 곳으로서, 평범한 주일의 미사에는 개방되지 않는 황실 전용의 성당이었다. 하지만 세르의 결혼식은 도도한 성당의 문턱을 낮추기에 충분할 정도로 중요했다.

앤은 얌전히 손을 모으고 앉아 성스러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하객으로 가득 찼는데도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오래된 양식의 건물이었지만 세월은 이 건물에 남루함이나 추레함을 덧칠하는 데 실패한 듯 보였다.

아롈을 따라 로렌에 온 뒤 호화로움에 감탄하지 않은 적이 드물었지만,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미남왕 필립이 계시를 받아 성검을 내미는 천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러러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었다. 일 년 내내 날씨가 온화한 이블린에서나 가능한 사치였다.

앤은 몰랐지만, 그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로렌을 이루는 일곱 가문, 황실과 여섯 대공가의 상징색이 정확히 같은 면적으로 사용되었다. 발루아의 연청색, 보르디의 녹색, 오를레앙의 황색, 칼레의 흑색, 부르고뉴의 적색, 오베르뉴의 주황색, 나바르의 진청색이 조화를 이룬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로렌의 화합과 영원이 신의 가호 아래 이루어졌음을 상징했다.

성당은 생각보다 훨씬 아담했다. 여섯 대공가과 황실, 그리고 외국의 중요한 귀족들이 앉자 남는 좌석이 전혀 없을 지경이었다. 겨우 백 명 남짓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으므로, 격이 떨어지는 귀족들은 본궁의 정의관으로부터 성당까지 오는 길에 일렬로 늘어서야 겨우 신랑과 신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재수 없게 행렬을 지키고 있는 근위대의 어깨에 가리면 치맛자락도 안 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앤은 침을 삼켰다. 이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 자신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아말리에 왕비가 그녀를 불쌍히 여겨 간간이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앤은 스무살이 넘어서야 자신의 증외조부가 코시카 황제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루에트 양?"

앤은 눈을 깜빡였다. ​L​'​a​l​o​u​e​t​t​e​은​ 갈리아 어로 종달새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신의 성인 레르헨펠트는 빌헬름이 붙여준 것으로서, 종달새의 들판이라는 의미였다. 자신을 부르는 게 맞다는 판단이 서자 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대공비 전하."

보르디 대공비는 바싹 마른 몸을 버드나무처럼 우아하게 세우고 아들의 옆에 앉아있었다.

"아니에요. 일어나지 말아요. 앉아요."

"어찌 그러겠사옵니까."

"부디, 앉아요."

그 말에는 부드러운 위엄이 스며있었다. 앤은 얌전히 다시 앉아 상체만을 뒤로 돌렸다. 대공비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내어 웃었다. 얇은 가죽 너머로 손등의 뼈들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나이가 어떻게 된다 하였지요?"

​"​스​물​하​나​이​옵​니​다​.​"​

"어머나, 어린 아가씨들이란 그 나이 자체로도 꽃봉오리처럼 어여쁜 법이지요. 물론 라루에트 양이 나이 말고는 내세울 점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요."

대공비는 주름이 가득한데도 소녀처럼 활기찼다.

​"​과​찬​이​시​옵​니​다​.​"​

"특히 그 목걸이가 아주 곱군요. 라루에트 양의 검은 머리와 아주 잘 어울려요."

앤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목걸이 줄을 감아쥐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칭찬에 감사드리옵니다. 모두 전하, 마담-라-세르의 은덕이옵니다."

​"​마​담​-​라​-​세​르​께​서​ 라루에트 양을 참 아끼시는 게 보일 정도이니, 흐뭇하군요."

앤이 걸치고 있는 옷은 아롈이 물려준 것이었다. 재단사가 몸에 꼭 맞게 뜯어고쳐준 물빛 옷에는 은실로 붓꽃이 수놓인 스토마커가 달려 있었다. 긴 곱슬머리를 처녀답게 늘어뜨리고, 머리띠를 썼는데, 그 머리띠가 앤이 중부 출신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롈을 만나기 전에는 평생 손끝 한 번 대본 적 없을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아롈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주었다.

앤은 어깨를 움츠렸다. 대공비가 이 목걸이의 출처를 알 리가 없었다. 당당하게만 행동한다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일개 시녀가 무슨 목걸이를 하고 다녔는지 기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하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 지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신의, 그보다 더한 보답이 있을까요."

앤은 당장이라도 이 목걸이를 뜯어내서 제 방 서랍에 쑤셔박고 싶어졌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소녀는."

"쉿. 시작하는군요."

앤은 화들짝 놀라 문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문이 열려 햇살이 쏟아져들어왔다. 희한할 정도로 조용했다. 누가 들어오신다, 식이 시작한다 알리는 말도 없었다. 음악도, 예포도 없었다. 그냥 문이 열리고, 신랑신부가 들어왔다.

앤은 결혼식에 처음 초대받았지만 중부의 결혼식이 이렇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보통 결혼식은 떠나갈 듯 소란스러운 행사가 아니었던가.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고요를 거느리고 아롈이 발걸음을 뗐다. 그 때부터 웅장한 오르간이 울려퍼졌다. 한 발짝 한 발짝을 내딛을 때마다 성스러운 음색이 깃들었다.

아롈은 아무런 장신구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성당 안에서 오직 그녀만이 지니고 있는 옅은 백금발은 머리카락만으로 틀어올려 고정했다. 보송보송한 귓불과 목덜미도 태어나면서 얻은 그대로였다. 입고 있는 흰 가운에도 보석은 한 점도 달려있지 않았다. 흰 색은 일곱 가문에 속하지 않는 색으로서, 황실의 일원과 결혼하는 여인이 결혼식에서 선택할 수 있는 색 중 하나였다.

앤은 저 수수해보이는 옷이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 수십 벌 가격이라는 걸 상기했다. 소매와 치맛단에 각각 달린 일곱 겹의 레이스나, 아롈의 문장을 수놓은 스토마커도 말할 것도 없이 고급이었지만, 가장 비싼 것은 옷감이었다. 평범한 흰 옷으로 보이지만 저 옷감에는 은실로 축복이 담긴 성경 구절이 빽빽하게 수놓여 있었다. 적어도 삼십 년 이상 신앙에 귀의한 수녀들만이 저 옷감에 수를 놓을 자격이 있다고 들었다.

저 옷을 걸쳐본다는 상상만으로도 움츠러든 앤과는 달리 아롈은 무심해보였다. 그저 차분하게 걷고 있었다. 손끝 한 점 떨리는 기색이 없었다. 어젯밤에 구토를 하고 잠들지 못 하던 소녀라고 누가 생각할까. 고귀한 코시카 여대공, 로렌의 태자비는 주변 어디도 둘러보지 않고 똑바로 앞만을 보고 걷고 있었다. 아롈이 앤을 돌아보지도 않고 스쳐지나갈 때까지 앤은 숨도 쉬지 못했다.

신랑과 신부는 천천히 기도대의 앞에 도달했다. 세 명의 여인과 세 명의 남자가 따라 들어와 신랑 신부의 양 옆에 섰다. 앤은 그 여섯 명 중 오를레앙의 미셸과, 샤를루아 공작녀 소피, 포의 아가씨라 불리는 쥬스티느를 알아보았다. 붉은 법복의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세르, 마담-라-세르. 신의 광휘 앞에 경의를 표하십시오."

남녀가 무릎을 꿇었다.  

사실, 혼인 미사의 정확한 형식을 따르지는 아니합니다만 ㅠㅠㅠㅠㅠ
스커트/치맛자락, 스토마커/가슴받이 등등의 용어 선택은 항상 어렵네요. 앤이 저 대신 소녀라는 말을 사용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도 그렇고요. 

오늘의 초고 공개는 여기까지입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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