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쐐기풀 장신구 - (4)
후식을 다 먹었는데도 남편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은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으며 유창한 남쪽 말을 구사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리야는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떠도는 동안 조금 얻어들은 갈리아 어로 따라가기에는 이들이 쓰는 용어가 너무 어려웠다. 언뜻 들리는 밀이나 세금, 목재 같은 단어를 통해 내용을 유추하기에는 마리야의 지식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녀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 하고 식탁에 놓인 술을 홀짝였다.
남편은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일말의 질책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을 잡고 결혼식에 참석했고, 하객의 명부를 기록할 때 마리야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지난 밤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와 몸을 섞었다. 간간이 느껴지는 어색함을 빼면 정말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주었다.
예전의 마리야라면 부정을 저지르고 부끄럽게도 집까지 나간 그녀를 감싸주는 남편에게 감동하여 어쩔 줄을 몰랐을 텐데, 지금 그녀의 마음은 흡사 돌처럼 싸늘했다.
'알려주지 않았어.'
아버지가, 어머니가, 오라버니들이 비참하게 목이 잘렸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롈의 시녀가 비웃듯이 말한 바에 의하면 그 때는 분명 마리야가 가출하기 전이었다. 냉전기기는 했다. 마리야는 그 때 남편에게 질려서 한동안 잠자리를 거부했다. 그런 마리야를 이상하게 생각한 페드루스는 마리야를 비난했고, 서로가 한참이나 독설 어린 말로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켜야 할 정도와 선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 그녀의 부모님의 죽음을 숨겼단 말인가?
임종을 지키기는 커녕 부고조차 알지 못하고 코시카로 떠나려던 생각만 하면 모골이 송연했다. 코시카로 떠났다면 마리야는 필시 옐레나 대공비-아니 이제 여제라고 했던가-의 손에 잡혀 목이 떨어졌겠지. 생각할수록 분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버니들이 죽어갈 동안 마리야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북쪽에 가기만 하면 포근한 가족들의 품에 안겨 단잠을 잘 수 있으리라고,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으리라고 그 믿음 하나만 품고 있지 않았던가.
아롈은 한참 상석인 곳에서 인사를 받고 있었다. 인사를 하려는 사람이 거의 줄을 서 있었다. 옆에 있는 여자가 귓속말을 하자, 아롈이 웃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장신구가 문득 문득 빛을 발했다.
마리야는 벌떡 일어섰다. 앉아있던 남편이 대화를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무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 어지러워요. 조금 걷다 올게요."
남편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말만 하고 다시 대화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따라오겠다고 하면 귀찮아질 뻔했다. 마리야는 홀로 미뉴에트 행렬의 근처로 다가갔다. 대동한 시녀는 없었다. 남편이 말하길 이 연회장에는 오대 조상까지 로렌에서 일한 이만이 하인으로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서 다른 남자가 춤을 신청해주기만을 기다렸다.
정원은 정말로 떠들썩했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고, 으슥한 곳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마리야는 주변을 정신없이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하지만 괜찮은 사람은 없었다.
마리야는 시무룩하게 돌아섰다. 어쩔 수 없지. 얼굴도 머릿결도 이렇게 많이 상했는걸. 그녀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 마리야의 눈에 웬 노인과 이야기 중인 남자가 띄었다. 그 남자였다. 나바르에서 친절하게 그녀를 도와준.
마리야는 그에게 살랑살랑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못 들은 것 같았다. 마리야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안녕하세요?"
그제야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마리야는 애교있는 강아지처럼 웃어보였다.
"안녕하세요, 경. 그 때는 정말 감사했어요."
마리야의 짧은 남쪽 말 실력으로는 이런 인사가 한계였다. 남자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저, 기억 못 하시나요? 전에 저를 도와주셨는데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드리드 공작부인 마리아예요. 그 때는 고마웠어요."
남자와 이야기하던 노인의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물러났다. 남자는 그 때처럼 단정하게 웃었다.
"예. 공작부인. 리무쟁 공작에게 들어 무사히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연약하신 몸으로 제 결혼식에 참석해주신 것에 사의(謝意)를 표합니다."
그 긴 말 중 마리야의 귀에 들어간 말은 '제 결혼식'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태자신가요?"
마리야는 로렌에서는 황태자 대신 흔히 세르라는 말을 쓴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남자는 진한 초록색 눈동자에 웃음기를 띨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 사람이 아롈의 남편이라는 뜻이었다. 마리야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 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분명 결혼식 내내 앉아 있었건만 그녀가 본 것은 신랑의 뒷모습이 전부였으므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실례했어요.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그 말은 일국의 공작부인쯤 되는 사람이 내뱉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했으나 마리야는 길고 고상하게 말 할 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귀부인의 몸으로 남쪽에서 고초를 겪으신 데에 대하여 지극히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마리야는 머뭇거렸다.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그런 마리야의 곁에 누군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카스티야의 국왕 폐하와 그 분의 후계자이신 아스투리아스 여공 전하(HRH)를 대신하여 다시 한 번 경하드립니다, 돈 시에르보."
남편이었다. 마리야는 입술 안쪽을 꼭 깨물었다.
"고맙습니다. 마드리드 공작이셨지요."
"예, 전하(HIH)."
"공작부인께서 이 로렌의 땅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셨다 들어 위로의 말을 건네던 중이었습니다. 심려가 많으셨으라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남편의 주먹이 잠시 부르르 떨렸다. 남편은 허허 웃으며 뭐라 뭐라 정말 한참을 떠들다가 마리야를 끌고 자리를 피했다. 마리야는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나갔다. 인적이 드문 구석에 다다르자 마리야는 동쪽 말로 소리질렀다.
"놔요! 아파요!"
"제정신이야? 대체 어디에서 누구에게 꼬리를 치는 거야!"
"지금 뭐라고 했어요?"
마리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나한테."
잡혀있는 팔목에서 구더기가 기어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을 남편이랍시고 살을 맞대고 삼 년을 넘게 살았다니.
그녀는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렸다.
"페드루스.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요?"
"쨍알대지 말아.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왜 외국에 나와서까지 얌전히 있질 못 하는 거야!"
"당신은 다른 년이랑 안 잤어요? 그리고 정말 할 말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그걸 끄집어냈나? 그 얘기는 이제 안 하기로 했잖아! 얌전하게 일을 돕지는 못 할 망정 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이곳 저곳 들쑤시고 다니냔 말이얏! 제발, 조용히 좀 살자. 응?"
"정말 할 말 없냐고요!"
마리야는 조리있게 따지는 법을 몰랐다. 마리야의 고상하신 이복자매라면 틀림없이 비뚜름한 비웃음을 띠고 논리적인 말로 비아냥거렸겠지만 안타깝게도 마리야에게는 그럴 만한 언변도, 순발력도 모자랐다. 그에 반해 그의 남편은 기름칠을 한 혀로 국가에 봉사하는 외교관이었다.
"나갔다 왔음 철이 들 때도 됐지 않았나? 아무리 열여섯이라 해도 말이야. 세상 험한 건 좀 느꼈을 거 아냐."
분에 겨워 마리야는 눈물을 글썽였다. 불공평해. 아버지는 어째서 나를 이런 남자에게 시집보내신 걸까. 동쪽으로 시집을 갔을 때 마리야는 열세 살이었다. 조혼 풍습이 있는 코시카 여자치고도 빠른 결혼이었다. 똑같은 아버지에게서 난 똑같은 자매인데. 마리야는 아까 그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남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단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모난 데 없었다. 키가 좀 작은 것은 흠이었지만, 마리야의 남편과 비교하면 홍학이나 다름없이 컸다. 페드루스는 동쪽의 다른 왕족들이 그렇듯 아주 작고 땅딸막한 남자였다. 사실, 외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성품이었다.
사람이라면, 주님의 자식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남편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래. 내 실수야. 말 실수를 했어. 미안해. 이만 들어가지. 모레 출발하려면 지금 짐을 싸야 하니까. 돌아가면, 당신이 갖고 싶다고 했던 그거 그냥 사. 에메랄드 팔찌였던가?"
"내 아버지."
어깨에 얹힌 손이 잠깐 멈칫했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여기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아."
"내 아버지 말이에요. 내 어머니. 내 오라버니들!"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말 하란 말이에요!!"
"누구신진 모르지만 좋은 날에 너무 시끄러우신 것 아닌가요?"
새처럼 재잘대는 목소리였다. 마리야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짙은 갈색 머리를 파란 장미로 장식한 여자였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 남쪽 사람인 듯했다. 마리야는 시끄럽다는 말을 알아듣고 물었다.
"누구시죠?"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웠다.
마리야는 HRH 공작부인으로 여기에 왔고 HRH는 HIH 바로 다음의 지위였으므로, 세상에 그녀보다 지위 높은 여성은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남쪽의 예법을 따져도 그녀가 실수를 할 확률은 낮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은 마리야보다 지위 높은 사람이 발에 채이는 얼마 안 되는 곳이었다.
"어머."
여자는 유쾌하게 웃었다.
"내가 누군지 묻는 질문은 태어나서 받은 적이 얼마 없는데 말이에요. 안 그래요, 미셸?"
남자는 아는 사람이었다. 그 때 그 잘생긴 남자였다. 그는 여자의 손을 잡고 옆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가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남편이 조용히 동쪽 말로 윽박질렀다.
"조용히 해."
"공작, 공작부인. 이 분은."
"아니, 아니. 미셸. 그러실 필요 없는 걸요. 리젤로트는 이제 기억이 났으니까요. 동쪽의 공작님이셨죠. 카스티야 국왕 폐하의 사촌이시잖아요? 직접 초대장을 작성해서 보내드렸으니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요. 안녕하세요? 나는 마담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라고 해요. 하지만 다들 리젤로트라고 부르죠. 엘리자베트는 너무 따분한 이름이잖아요? 샤를로트는 예쁘지만 흔하고요."
"마드리드 공작 페드루스라 합니다, 전하. 이쪽은 마드리드 공작부인 마리아입니다."
"아하, 따님과 함께 오셨군요?"
페드루스의 나이는 올해 마흔 셋이었고 마리야는 아롈보다 두 달 어려 아직 열여섯이었다.
"제 안사람입니다, 전하. 먼 북쪽 출신인지라 말이 서투르니 너그러운."
여자가 말을 틱 끊었다.
"북쪽! 내 올케도 북쪽 출신이죠. 그녀가 옅은 금발이라 북쪽 사람들은 다 그런 금발인 줄 알았지 뭐예요. 남쪽 사람들은 재미없게 어두컴컴한 색이 많잖아요? 죄다 갈색, 갈색, 갈색! 나는 늘 금발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그 흑발도 아주 멋져요. 사실 난 북쪽에도 흑발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요. 혹시 아는 사람인가요? 가서 인사는 했어요? 아직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소개해줄까요?"
마리야는 이해를 못 해 머뭇거렸다.
"마담. 대단히 송구합니다만 안사람의 건강이 좋지 않아 들어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도나 시에르바, 아니 귀국의 마담 라 세르께는 따로 연통을 넣어 사죄하겠습니다."
"어머어머! 아직 어린 사람이 몸이 좋지 않으면 안 되죠! 어서 들어가보세요. 리무쟁 공작이 전해주기로 공작부인의 고초가 심했다고 들었어요. 아바마마, 우리 로렌의 황제 폐하께서도 깊은 심려를 표하시며 나바르 대공을 문책하겠다 벼르셨답니다. 아무리 몰랐다고는 해도 다른 나라의 공작부인이 그토록 힘든 여정을 겪게 한 것이 말도 안 된다고 하시면서요. 동쪽은, 비록 아스투리아스 여공의 일이 있었다곤 해도 우리의 우방인걸요. 안 그런가요, 공작?"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여자의 말은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공작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더니 다시 마리야를 질질 끌고 갔다. 그 와중에도 마리야는 리무쟁 공작이 처녀의 손등에 조심스레 입맞추는 것을 보고 말았다.
페드루스는 두 번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어진 숙소로 돌아가 문을 쾅 닫았다.
"제정신이야!"
드디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와 마리야는 마주 소리질렀다.
"뭔데요! 대체 뭐냐고요!"
"황제의 딸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네?"
아까 그 여자는 아롈의 시누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마담 르와이얄의 여동생이고. 하지만 깨달음도 잠시, 마리야는 비난의 폭풍에 휩싸여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렸다. 공작은 온갖 거친 말을 마리야에게 퍼부어댔다.
"대체 어디까지 내가 아내를 돈 한 푼 없이 내쫓은 놈팡이라고 퍼트릴 참이야!"
씩씩대던 공작은 온 건물이 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마리야는 혼자 남아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항상 이런 식이지. 내일이면 보석이라도 한 개 갖고 와서 아무렇지 않은 듯 굴 거야. 혼자 웃고. 혼자 말을 하고. 그리고 혼자 종마처럼 올라타 씨를 뿌리겠지.
그리고, 결국 아버지에 대한 일은 사과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