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1)
탁자에는 이런저런 꽃들이 하찮은 것처럼 널려있었다. 꽃향기로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북쪽에서는 상상도 못 할 호사였다. 시든 꽃이 흉하다는 이유로 황실 정원에는 상록수만을 키울 수 있도록 되어있어, 꽃은 따로 구석 온실에서 키워서 공급했다. 그나마 온실은 탄을 아주 많이 소모했기 때문에 이반 3세는 온실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연회 등에서 꽃 장식을 사용하는 걸 금지했다. 그래서 황궁에서 방에 꽃을 꽂아둘 수 있는 건 황실 가족 정도였다. 그러나 이 남쪽에서 꽃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꽃무더기를 가져온 여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고운 손가락으로 꽃들을 헤쳤다.
"올케 언니는 무슨 꽃을 좋아해요? 작약? 스토커? 아니면 리시안서스? 라넌큘러스? 튤립? 프리지아? 크로커스?"
아롈은 생전 처음 듣는 꽃 이름 사이에서 허우적거렸다. 방에 꽂혀 있는 꽃의 자태를 즐길 줄은 알아도 그들에게 따로 이름이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로렌은 몰라도 코시카에서는 가문의 문장에 꽃을 사용하는 일이 드물어 이름을 외울 필요도 없었다.
"장미?"
"장미! 장미는 우리 가문의 문장(紋章)이기도 하지만, 문장을 빼고 생각해도 아주 예쁘죠! 저도 장미를 아주 좋아해요. 결혼식에서도 머리에 장미를 꽂았는걸요. 하지만 요즘은 아직 장미가 덜 피어서 꽃꽂이를 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리젤로트는 한 마디만 던져주어도 스무 마디를 되돌려주었다. 차마 장미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꽃 이름이라곤 말하기 어려웠다.
"요즘 계절에는 튤립이 좋아요. 이 연분홍색 튤립을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라요. 새로 나온 개량종이라고 해서, 리젤로트가 시중에 나온 물량을 전부 끌어 모았거든요."
"꼭 이파리가 검을 닮았군요."
"어머,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요. 꽃이 왕관을 닮았다는 생각은 했지만요. 새언니도 튤립이 마음에 들어요?"
꽃이 예쁜 건 사실이었다. 아롈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젤로트는 은으로 된 가위로 줄기를 석둑석둑 자르고 잎을 쳐냈다. 작고 귀여운 손이 기민하게 움직이는 도중에도 그녀는 쉴 새 없이 꽃에 대한 수다를 늘어놓았다.
"튤립은 튤립만 같이 꽂는 게 가장 예쁘다고 생각해요. 다른 걸 이것저것 같이 꽂아놔 봤는데 영 어울리지 않던 걸요. 아, 맞아. 방은 마음에 들어요?"
"예. 좋습니다."
어찌나 열심히 손질하는지, 아롈은 무릎 위에 펼쳐둔 책을 덮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평생 생화는 만져본 적도 없었다.
"다행이에요! 리젤로트가 벽지를 새로 골랐거든요. 미네트가 주장하길, 새언니는 북쪽 사람이니까 만일을 대비해서 조금 더 칙칙한 색을 바르는 게 좋다고 했어요. 하지만 모든 아가씨들은 사랑스럽고 밝은 색으로 꾸민 방에서 잠드는 걸 좋아할 걸요."
이 많은 꽃을 잔뜩 들고 온 리젤로트의 시녀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마담 리젤로트. 마담 미네트께서는 그저 차분한 회색을 추천하셨을 뿐이에요."
"너만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거든. 회색이 칙칙한 색이 아니라는 거야?"
시녀는 면박을 듣고는 입을 다문 채 줄기와 잎을 손질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금세 꽃병에 꽃이 가득 찼고, 탁자 구석에는 쓸모없어진 이파리가 수북이 쌓였다. 리젤로트는 자신이 가져온 꽃병에 작약과 안개꽃을 꽂아 장식하고는, 풀물이 든 손을 물수건으로 닦았다.
"뭘 보고 있어요?"
아롈은 책을 덮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건 없어요. 봐요. 뭔데요?"
표지를 살펴본 리젤로트는 생글생글 웃음을 머금었다.
"아하, 알았다. 이거 오라버니께서 주신 거로군요?"
"무슨 책인지 알고 계십니까?"
책에는 따로 제목이 없었다.
"아뇨. 제목도 안 적혀있는 걸요. 리젤로트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럼 어떻게……."
"제가 맞췄나 봐요! 내 말이 맞죠?"
아롈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다가 곧바로 미간을 문질렀다. 리젤로트의 말대로, 이 책은 남편의 것이었다.
그는 아침에 자비관으로 돌아간 뒤 그의 시종을 시켜 이 책을 아롈에게 보내왔고, 아롈이 오찬을 거르고 책을 읽는 도중 리젤로트가 꽃무더기와 함께 쳐들어왔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 그게 중요한가요? 있잖아요. 오늘은 뭐 할 예정이에요?"
"전하께서 석찬을 함께 하자 하셨습니다."
마담 라 세르인 아롈이 이블린에서 '전하'라고 호, 지칭하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뿐이었다. 리젤로트는 갑자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가까이 붙어 앉았다.
"오라버니께서 오늘도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셨어요?"
"예."
"달콤한 신혼이네요! 벌써 일주일째 오라버니가 자비관에서 주무시는 거지요?"
귀가 절로 달아올랐다. 남쪽 사람들이란!
"그저 석찬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그 이야기죠! 같이 식사를 하고, 그 다음에는 차도 같이 마시고,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꺄아!"
탄성을 내지른 그녀는 아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건 유명한 이야기인데요, 아바마마는 어마마마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결투를 신청하셨대요. 서사시에 나오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장갑을 던지셨다고 해요. 멋있지요? 신혼이니까 그런 용기가 나는 거라고 리젤로트는 생각해요. 그러니까 언니도 오라버니와 사이좋은 부부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아롈은 무어라고 얘기해야 할 지 난감해졌다. 그 때 아롈을 도와주려는 듯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리젤로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녀는 들어오는 이를 보자마자 인상을 썼다.
"사랑하는 내 쌍둥이 동생아. 같은 황후 폐하의 여식으로서 의견을 말하자면, 나라면 어마마마 때문에 약혼자를 잃은 분의 따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낭만적이라는 반응을 기대하지 않을 거야."
슬며시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리젤로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박쥐처럼 엿들은 거야?"
"내 의지가 아니라는 걸 명확히 해두고 싶구나. 네 목소리가 너무 커서 본의 아니게 내 귀에 들어온 거니까."
그녀의 동생이 무안함에 어쩔 줄을 모르고 씩씩대는 사이, 미네트는 아롈을 향해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폈다.
"안녕하세요, 올케 언니. 인사가 늦었어요."
"안녕하세요, 마담 미네트. 앉으세요."
"아뇨, 저는 짙은 꽃향기가 싫어요. 숨을 쉬기만 해도 역하거든요. 용건만 전하고 한시 바삐 돌아가고 싶군요."
잠시나마 그녀의 화법에 통쾌함을 느꼈던 아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일주일 뒤 다과회를 열겠다고 하셨어요. 올케 언니를 위해 여는 것이니 꼭 참석해달라고 하시네요."
결혼식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야 자신을 찾는 시어머니의 저의가 심히 궁금했다. 그녀는 지난 이레 동안 아롈이 나오는 모든 행사를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불참했다.
하지만 거절할 뚜렷한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이 제안을 거부하는 건 곧 황후와 척을 지겠다고 온 궁에 나팔을 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참석하겠습니다."
"예,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어요. 즐거운 꽃꽂이 시간 보내세요."
미네트가 폭풍처럼 휩쓸고 가자마자 리젤로트는 화를 벌컥 냈다.
"아, 어떻게 사람을 저런 식으로 무안 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