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4)
그는 식민지에 터진 전염병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세시안은 그 때 결국 미래를 위해 식민지를 보존하는 방법을 택하고, 식민지로부터 식량을 수입하는 것을 전면 금지했다. 세시안 자신이 즉위했을 때 식민지를 새로 복속시키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칙령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것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세시안의 할아버지이자 선대 황제인 루이 조제프 황제는 포도주에 세금을 물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보르디와 부르고뉴가 반대했으나, 이미 물밑작업에 넘어간 다른 네 명의 대공은 찬성을 표했다. 때문에 보르디와 부르고뉴의 세금은 줄고 중앙에서 걷는 세금의 금액은 늘어났다.
보르디는 부족한 예산을 메우기 위해 농작지의 상당수를 포도밭으로 전환시키는 정책을 장려했다. 결국 식량 자급률이 부족해졌고, 수입 금지령으로 인해 식량을 끌어와야 했던 보르디는 기껏 쌓아온 예산을 단숨에 소모해버렸다.
덕분에 천천히 좁혀지고 있던 다른 대공국과 보르디의 거리는 단숨에 멀어졌다.
"샤를루아 공작.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천오백 루아르를 당장 예산에서 빼내는 건 무리입니다. 세수가 줄어든 건 보르디만이 아니라 본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루아르는 금 1루아르짜리 금화로, 로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의 일종이었다. 로렌의 모든 공문서에서 쓰는 액수는 루아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올해 재정 의회에서 책정한 금액은 약 삼십만 루아르였다.
"꼭 올해 이 정책을 실현시켜 달라 청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여름에 있을 예비비 편성 회의에서 한 번쯤 떠올려주신다면 영광일 겁니다."
그리고 결혼과, 식민지와, 포도주 세 등으로 인해 균형이 깨지는 걸 상기해주면 더 좋을 것이고.
세시안은 골이 아파왔다. 돈을 달라는 곳은 많은데 돈은 항상 부족했다.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졌다간 재정이 정말 위험한 상태까지 치달으리라. 더욱이 이번 결혼식에 리젤로트가 청구한 영수증 액수를 오늘 아침에 본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는 설마 리젤로트가 일천 루아르를 '결혼식'에 소모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참금이 생각 외로 많지 않았더라면 과장을 좀 섞어 파산 선언을 해야 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공작."
필리프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물러났다.
세시안은 예비비 편성 회의를 앞두고 모든 대공이 그의 집무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데 질리고 말았다. 칼레 대공은 이번에 반드시 전열함 두 척을 새로 건조해야 한다고 하질 않나, 나바르 대공은 기사단 정원을 늘리고 지원금을 내려달라고 징징거렸고, 오베르뉴 대공은 코르크에 지방세를 물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어이없는 게 보르디의 필리프의 청이었다.
그는 막무가내로 대공국에 분배되는 예산 중 보르디의 예산만을 늘려달라고 온 것이었다. 세시안은 결혼식에서 부르고뉴 대공이 운을 띄운 건은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도 보르디를 홀대했다간 저 노회한 공작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보르디를 지원해줄 때도 되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다른 대공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 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사촌이자 소중한 친구, 오를레앙의 미셸도 어제 슬쩍 찾아와 오를레앙의 예산이 부족하다 말했던 것이다.
올해 세수가 예상보다 좀 많이 걷혔을 때 사실 그는 부채를 일부 해소할 생각이었다. 아직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경이 쓰일 만한 액수이긴 했다. 부황은 흑사병 때 황실 직할령 일부의 조세권을 이자로 대신 지불하고 재정의 어려움을 해소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았다. 세시안은 메모를 갈기고 차근차근 오늘 봐야 할 서류들을 정리했다. 그 와중에 영수증만 모아 올려놓은 철이 눈에 들어왔다. 리젤로트를 만나면 그녀가 다시 토라지는 한이 있어도 한 마디 잔소리는 하리라 마음먹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차마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머리를 싸쥐었다. 누구든 들어와 예산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면 창문으로 뛰어내릴 용의도 있었다.
한 번 더 노크가 들렸다. 그는 진지하게 창문을 쳐다보았다. 여기는 이 층이니 떨어져도 다리가 부러지진 않으리라. 하지만 역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들어오세요."
그러나 뜻밖에도 시종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온 이는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급히 세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폐하."
"간만에 아들과 저녁이나 한 끼 할까 해서 말이다. 일어나거라."
로렌의 황제가 아들의 집무실을 찾은 건 필시 단순히 '정을 쌓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부황은 딸자식과 아내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유일한 적자인 세시안에게는 엄격했다. 더욱이 세시안이 스무 살이 넘은 이후에는 그의 의견을 차기 황제로서의 의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집무실에 찾아와서 가타부타 하는 일은 없었다.
"그냥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지나가던 길에 갑자기 생각났단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절대 그럴 리 없었다. 부황인 루이 오귀스트가 충동적인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정의관을 드나드는 모든 사내들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충동적으로 변하는 곳은 침실뿐이라고 공공연히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모후인 마르그리트 황후가 그의 큰형인 루이 페르디낭을 가진 채 대관식을 올린 걸 비꼬는 말이었다.
"폐하, 제 아내와 석찬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만 그녀를 불러도 되겠습니까."
"나도 며늘아기와 저녁을 먹고 싶긴 하지만 오늘은 우리 둘이 먹도록 하자꾸나."
필시 정치적인 무슨 일이 있었다. 세시안은 짚이는 일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어느 용건인지 감도 잡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벨망 경. 가서 말을 전해주겠어요?"
세시안의 시종은 허리를 깍듯이 숙이고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세시안은 빙긋 웃었다.
"그래서 어느 식당에 식사를 준비해 놓으라고 이르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