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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7)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되지?"

"내일 마담 리젤로트와의 약속이, 사흘 뒤 로르쉘의 아가씨와의 약속이, 닷새 뒤 포의 아가씨와의 약속이, 일주일 뒤에 황후 폐하와의 티타임이 예정되어 있사옵니다."

"그렇구나. 따로 들어온 초대나 방문 요청은 없었느냐?"

"예."

아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절대 클라리 경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기사는. 아롈은 창백한 입술을 조금 달싹였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세상이 너무 조용하지 않으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앤이 보기에 이블린은 너무 시끄럽게 돌아가 눈이 팽팽 도는 곳이었다. 다른 시녀들이 앤을 붙잡고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애쓰는 것만 상대해줘도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귀한 손님들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춰 다과를 준비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또 오후가 갔다. 저녁이 되면 아롈은 몸이 피곤한 탓에 한층 더 예민해져서 그녀의 옷시중을 들고 방에 들어가면 녹초가 되곤 했다. 지난 이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벨타를 좀 데려와라. 물어볼 것이 있다."

 

아롈은 잠을 못 이루고 계속 뒤척였다. 요와 이불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불면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아롈과 함께 한 악우였다. 한참 잠들려 애써보아도 별 진척이 없자, 아롈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코시카에서는 책을 보곤 했다. 하지만 리젤로트가 예쁘게 꾸며놓은 침실에 책장 따윈 없었고, 있는 책이라곤 아까의 그 남우세스러운 서사시뿐이었다.

무료함을 견딜 수 없었다. 오죽하면 필리프가 다시 과제라도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친애하는 사촌은 아롈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답시고 모든 과제를 거두어갔다.

예쁘게 꾸미는 일도, 아가씨들과 수다를 떠는 일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하지만 코시카에 있었을 때는 그런 만남이 바쁜 일과에 활력이 되어주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성장한 차림으로 서류를 눈에 핏발이 서도록 보다가, 나가서 춤을 조금 추고 까르륵 웃다가 다시 들어와 서류를 보았다. 손톱 밑에 잉크가 지워질 날이 없었다.

지금은 그게 일상의 전부였다. 겨우 일주일 만에 아롈은 질려버렸다.

게다가 이렇게나 기이한 답답함. 바위가 가슴을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체사레브나 시절, 아롈은 세상의 모든 사정을 문서로 손에 잡힐 듯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자신의 역량이 모자라 모든 일에 다 신경을 고루 쏟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알고자 한다면 부서 장관을 불러 서류를 올리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처지였다. 아가씨들과 하하 호호 웃으며, 혹시 말을 놓칠 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정보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으려 안간 힘을 쓰는 처지. 심지어 일 년에 받는 돈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아롈은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고 화장대에 가 앉았다. 앤이 소금물을 딱 적당하게 타놓은 유리잔에는 목걸이가 퐁당 담겨 있었다. 희한하게도, 수다쟁이 용은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저 흰 허리띠 모양의 줄이 희미해진 채 가만히 물에 잠겨만 있었다. 맹물을 타보아도 파란 물이 들 뿐 벨타는 나오지 않았다. 겁이 난 앤이 금방 소금을 타자, 물은 다시 보석 속으로 들어갔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롈이 만약 ​체​사​레​브​나​였​다​면​-​물​론​ 이 용을 만날 일이 없었겠지만- 벨타의 존재를 숨길 일이 없었으리라. 다시 용을 불러낸 여대공이라고 추앙받았겠지. 그리고 온갖 문헌을 뒤져 이 용이 왜 갑자기 나오질 않는지 알아낼 수 있었으리라.

그냥 이 참에 저 먼 바다에 갖다 버리고 오라고 시킬까. 아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흉포한 생물이 입을 나불거리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철로 된 금고에 넣고 잠근 다음 쇠사슬로 칭칭 감아 대포에 넣고 쏘아버릴 텐데.

서랍을 뒤져 편지칼을 꺼냈다. 은으로 된 칼은 한 쪽은 뭉툭하고 한 쪽은 날카로웠다. 날을 손가락에 살짝 대자 금속 특유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괜찮지 않을까. 피를 받아서 한꺼번에 끼얹어버리면.

한참을 잔을 노려보았다. 손이 떨렸다.

아롈은 마음을 접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벨타가 갑자기 몸집을 키우기만 해도 이 건물은 무너져 내리리라.

조용히 칼을 집어넣고 유리잔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통. 통. 맑은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귀가 녹아버릴 것처럼 예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앤에게 언제부터 이랬느냐고 묻자, 그녀는 결혼식 다음날부터라고 대답했다.

미간을 문질렀다. 대체 이 안에 용이 살고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다른 마법사를 찾아 훌쩍 떠나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결혼식날 말고 앤은 항상 아롈의 옆에 붙어있었고, 그 때마다 그녀는 손목이나 목에 벨타를 걸고 있었다.

아롈은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작센에서 용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필리프를 최대한 높이 평가해도 그 많은 사람들의 입을 다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선은 '아롈에게 마법사일지도 모르는 의혹이 있다' 정도로 소문을 축소시키는 데까지. 용의 재등장이라는 굉장한 사건을 숨길 수는 없을 터.

자신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지금쯤 온 세상이 뒤집어져야 맞았다. 아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새파랗게 고요한 밤이었다.

목덜미가 땀에 젖었다. 긴 머리칼을 빠르게 땋아 내리고, 침대 옆 협탁에 놔둔 부채를 살랑살랑 부쳤더니 땀이 날아가면서 시원해졌다.

아롈은 가만히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본관에 연회가 없는 날이어서 상대적으로 조용하기만 했다. 본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흰 분수대는 꺼져 있었다. 그 분수대 앞에는 리젤로트가 그토록 자랑하던 튤립들이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저 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건물이 몇 개. 그 위로는 새카만 밤하늘이었다.

아롈은 익숙한 별자리를 찾아보았다. 별은 불면만큼이나 오랜 시간 아롈과 밤을 함께 보낸 벗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하늘의 모양은 지독히도 낯설었다. 초여름이기 때문일까.

가만히 무더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다가, 창문을 닫으려 했다. 그 때 한 사람이 나오는 게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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