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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8)


 저도 모르게 상체를 내밀었다. 단번에 알았다. 검은 머리가 달빛을 새파랗게 반사했다. 아롈은 이유도 없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는 특유의 느긋한 걸음걸이로 분수대로 다가갔다. 걸터앉았다. 그는 툭툭 발장난을 했다.

혼자였다.

문득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나 먼 거리인데도 알 수 있었다. 초록색 눈이었다. 그의 누이들의 갈색 눈과는 달리, 그는 짙은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갈색은 화분의 흙처럼 동공 둘레에 조금만 있어서, 오늘처럼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쳐야 겨우 볼 수 있었다. 가슴을 옥죄는 다정함으로 빚은 색깔이었다. 바로 지척에서 그가 그런 눈을 하고 웃어 보이면 아롈은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본관으로 달려왔다. 그는 계속 목을 꺾어 올려 아롈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금방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롈은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몸을 내밀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예 건물로 들어가 버린 듯했다.

눈과 달리 아롈의 귀는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과장을 좀 보태면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큰 소리였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롈은 창틀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전하?"

어디서 흘렸는지 머리를 묶은 끈이 풀려, 검은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엉망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항상 차분하게 머금고 있던 웃음은 간 곳 없었다.

"창문 좀 닫을래요?"

"전하, 저는 들어오시라고 허락한 일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사과는, 얼마든, 할 테니, 일단 그 창문 좀 닫고, 이쪽으로, 와서, 이야기 할까요?"

아롈은 순순히 팔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혹시 몰라 잠금쇠까지 잠근 다음, 얌전히 기대있던 창틀에서 몸을 내렸다. 실내화 바닥이 방바닥과 닿으면서 모피의 털들이 발을 감쌌다.

"닫았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술 냄새가 났다.

"뭘 하고 있었지요?"
"별을 보고 있었습니다."

별 다음에는 당신이었지만. 세시안은 아롈을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가느다란 머리칼을 헤치고 들어갔다. 무거웠다. 아롈은 조금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다.

"무겁습니다."

그가 조금 웃었다. 힘없는 웃음소리였다.

"예, 미안합니다."

그는 몸을 바로 세우고는 아롈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정말 미안합니다. 조금, 뭐랄까, 놀랐을 뿐이에요."

대체 왜 놀랐다는 걸까. 아롈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딱히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늘 식사를 같이 못 한 것도 미안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괜찮습니다."

벨망 경이라는 그의 시종이 말을 전했을 때, 갓 세탁해서 말린 빨래처럼 뽀송뽀송하던 기분이 단박에 진흙탕에 처박힌 듯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정말 괜찮았다. 그렇게나 짜증이 났는데 겨우 입맞춤 한 번에 앙금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는 여유를 찾고 다시 다정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저."

평소 말을 할 때 망설이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드물게도 뜸을 들였다.

"예. 듣고 있습니다."

"시간이 늦었는데."

초록빛 눈이 멍하게 두어 번 깜빡였다. 목덜미부터 정수리까지, 흡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냄비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과 입술이 아주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자고 갔으면 좋겠어요?"

말이 나오자마자, 아롈은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지만 금방 잡히고 말았다. 소녀는 새처럼 파닥이며 소리쳤다.

"놔주십시오!"

"싫은데요."

세시안은 다 큰 성인 남자였고, 아롈은 아직 어린 여자였다. 근력의 차이는 명확했다. 아무리 바동거려도 허리를 꼭 끌어안은 팔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게 소용없다는 걸 깨닫자, 아롈은 반쯤 진심으로 급소를 팔꿈치로 찍어버리고 도망치는 걸 고려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피가 어찌나 몰렸는지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소리 내서 웃었다. 이주 동안 그와 한 침대를 쓰면서 그의 쿡쿡거리는 웃음이 귀에 박혔다. 남편은 아롈이 무슨 말만 하면 아롈을 인형처럼 끌어안고 그렇게 웃어댔다.

"오늘은 일이 너무 많아서, 미안해요."

대체 오늘만 몇 번째 미안하다고 하는 걸까.

"미안하실 것 없습니다."

그가 숨을 훅 뿜었다. 아까보다도 훨씬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 아롈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전하, 술 드셨습니까?"

"음. 브랜디 조금? 폐하와 마셨지요."

"술을 드시고 업무를 보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어쩔 수 없지요. 바쁘니까요."

아롈은 그 순간 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입술에 고소가 감돌았다. 부끄러움이며 의아함이며 짜증을 순식간에 검은 물감처럼 덧칠해버린 건 노골적인 질투였다.

이러면 안 돼. 아롈은 속으로 몇 번이고 속삭였다.

"어디 보자, 지금 시간이."

한 손이 풀렸다. 세시안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고는 아롈을 놓아주었다.

"가봐야겠어요."

몇 번이고 아롈의 얼굴에 입 맞춘 다음, 그는 정의관으로 떠나갔다. 아롈은힘없이 침대에 엎드렸다. 책에 대한 것도, 연금에 대한 것도 아무것도 묻지 못 했지만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들키지 않은 것만으로 안도했다. 달아오른 귀를 차가운 시트가 천천히 식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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