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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9)


 주변에는 온통 초상화 뿐이었다.

금발. 녹안. 섬세한 콧날과 살짝 치켜올라간 눈.

이반 파블로비치. 아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반 대공 전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여대공 전하를 황도로 돌려보내라는 전갈이 왔답니다.

-정말 많이 닮았네.

처음엔 단순히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초상화를 본 순간 의심했고, 알렉산드르가 통곡할 때 확신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이반은 죽은 사람이고, 아롈은 살아 숨쉬는 사람이니까. 소녀는 아장아장 알렉산드르의 초상화를 찾아 내달렸다. 그러나 초상화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가지 마! 사샤!

알렉산드르가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 그가 뒤돌아보았다.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아롈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화사한 회랑의 환상은 구름처럼 흩어졌다.

"자는 사람을 깨웠군요. 미안해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주 오랫동안 푹 잠든 것처럼 몸이 저렸다. 하지만 창밖은 아직 어둡기만 했다. 겨우 해가 뜬 듯했다. 촛대에서 나오는 따뜻한 주황색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뭐라고 말을 해보려 했지만 목이 바싹 말라 있었다. 세시안은 아롈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마에 맺혀 있던 식은땀이 쓸려나갔다.

"더 자요."

그는 어느새 옷을 다 차려입고 있었다. 다만 머리끈은 찾지 못 했는지 검은 머리는 그대로 어꺠 위에 흐트러진 그대로였다. 남자들은 편하겠다 싶었다. 아롈은 평생 옷을 혼자 입어본 적이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자 역광 때문에 어둠이 드리운 얼굴이 보였다.

아롈은 저절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외면했다. 침을 모아 삼키자 한결 목 상태가 나아졌다.

"제가 얼마나 잔 겁니까?"

"지금이 다섯 시니까, 세 시간 정도일까요."

몸을 일으키려 힘을 주자 다리 사이가 둔통을 호소했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처음에만 아프다는 알렉산드라의 경험담은 순 거짓부렁이었다. 남편과 몸을 몇 번이고 섞었지만 그 때마다 생살을 찢는 듯했다.

"이르게 준비하셨습니다."

"정의관에 가서 밤새 서류를 본 척 하려 해요. 이건 비밀입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쿡쿡 웃었다. 이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도 좋아하고, 비밀이라는 말도 좋아하고, 혼자 웃는 것도 좋아했다.

"비밀을 발설하면 어찌 되는 겁니까?"

빙그레 휘어지는 눈웃음에 어쩔 줄 모르고 시트를 그러쥐었다. 다행히 남편은 눈치를 못 채고 시트를 조금 더 올려주었다.

"온 이블린이 세르가 아내에게 잡혀산다고 난리겠지요. 만찬이 끝나고 서류를 보다가 도망가서 아내의 방에 ​기​어​들​어​갔​다​고​요​.​"​

"제 탓입니까?"

손가락이 둥그런 뺨을 살짝 찔렀다. 지난 밤 품에 알몸으로 안겨 야릇한 정사를 나눴으면서도 그 단순한 행동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렇게 어여쁘시니까요."

예쁘다, 아름답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그런 입에 발린 칭찬을 살면서 수만 번은 들었을 텐데 별 것도 아닌 예쁘다는 말이 왜 이렇게 특별하게 들리는지. 정말 반반한 낯짝만으로 마음의 방향이 정해지면 얼마나 편리할까.

"부디 비밀로 해주겠어요?"

사람의 마음은 잡아둘 수 없는 것. 그 말이 어마어마하게 무서워졌다. 아롈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곁방의 문이 열렸다.

"전하, ​기​침​하​셨​사​옵​니​까​?​“​

"이런.“

“어머나?”

앤은 침의 차림이었다. 남편이 자고 가는 날에는 간단하게라도 단장을 하고 들어와 시중을 들었으니, 아마 없으리라 굳게 믿고 문을 열었던 것일 테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일찍 깨우라고 말을 남겼던 것이 비로소 기억났다.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그대로 무릎을 꿇어 옷깃 사이로 가슴골이 환히 보였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은 시녀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죄는 무슨. 나가거라."

"송구하옵니다."

앤은 풍만한 가슴을 손으로 가린 채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문이 바로 닫혔다. 아롈은 가만히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들​켜​버​리​셨​군​요​.​“​

“어쩔 수 없지요.”

세시안은 매일 아침 그랬듯 이마와 뺨과 콧날과 입술에 차례차례 입 맞춰 주었다. 새싹이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다녀올게요.”

 

***

오를레앙 대공비가 정의관 꼭대기에 올라가 외아들의 뺨을 터트려놓았다는 이야기는 해가 채 중천에 오르기도 전에 퍼져나갔다. 리무쟁 공작이 황제에게 찾아가 파혼할 생각이 없다고 읍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리젤로트는 시녀인 베아트리스를 통해 오늘의 약속을 취소한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 소문 덕에, 아롈은 이제 막 찾아낸 자기감정을 곱씹을 시간을 강탈당한 채 허겁지겁 준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리젤로트의 거처까지 행차하는 짧은 시간 동안 만난 모든 사람들은 리무쟁 공작과 마담 리젤로트의 일에 대해 대놓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찌나 목소리가 컸는지 잘못 들었으리라 생각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건물이 소문의 홍수에 둥실거리며 떠내려갈 듯했다. 북쪽에서, 황궁은 어디까지나 황실 가족만을 위해 존재했다. 그래서 아롈에게 소문이란 어디까지나 귓속말을 통해 은밀히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르가 그토록 시끄럽게 연애 사건을 일으키고, 아버지가 정부를 대놓고 끼고 돌았어도 아롈의 앞에서 대놓고 그들의 이름을 올리는 멍청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남쪽은 달랐다. 이블린 궁 본관에는 황제와 황후와 그 자식들만이 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여섯 대공과 대공비, 대공의 아들딸, 그들의 시녀들과 시종들이 살고 있었다. 당연히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온 이블린이 난리’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았다.

앤이 아롈 대신 문을 똑똑 두드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꺼져요!”

아롈은 한숨을 삼켰다.

“리젤로트. 코시카의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얼마나 울었는지 충격적인 몰골을 하고 있는 리젤로트가 직접 문을 열었다. 그녀는 코를 훌쩍였다.

“새언니. 지금은 별로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가엾게도 목소리는 처참하게 쉬어있었다. 단번에 말문이 막혔다. 아롈은 약혼자와의 파혼 위기에 처해 있는 여자를 달래본 일이 없었다. 결국 기운 차리시라는 상투적인 말만을 남기고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아롈은 자비관 문을 나서 정의관 앞에 섰다. 근위병들이 경례를 올렸다. 정의관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황급히 인사를 올리고 지나갔다. 하지만 누굴 찾아가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필리프? 미셸? 남편? 황제? 오를레앙 대공?

그리고 찾아가면 그 다음에는?

-외람되오나 전하께서는 아직 황위계승자라는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 하신 것 같습니다.

가문 간의 혼사가 붙고 떨어지는 건 흔한 일. 대체 아롈이 뭐라고 왈가왈부하는가. 리젤로트는 아롈의 딸도 아니고 시녀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체사레브나 시절 혼사를 주관할 수 있었던 건 황후가 없었기 때문인데, 이블린에는 시어머니가 눈을 형형하게 뜨고 살아 있었다.

하지만 미셸은 당연히 리젤로트와 결혼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파혼할 이유가 없잖은가. 배에서 약혼녀가 보고 싶다고 우울해하는 모습을 기억한다. 리젤로트가 세계 최고의 미녀라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늘어놓던 것도. 그 행복에 찬 얼굴이.

멍청한 짓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 소문에 의하면, 파혼을 결정한 건 황후였다. 여기에서 끼어들면 시어머니의 결정에 정면으로 반하게 된다.

입을 꾹 다물고 얼마나 서 있었을까. 정의관에서 헐레벌떡 한 남자가 뛰어나와서 아롈에게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인가.”

“마담 라 세르. 인사 올립니다. 가장 신실하신 폐하께서 전하를 찾으십니다.”

 

“대체 어쩌다가 뺨이 그 모양이 된 거야?”

세시안은 친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잘생긴 얼굴이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부어 터져있었다. 그는 대번에 바쁜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를 납득했다. 저 몰골로 방 밖에 나가는 순간 무슨 소문이 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다 듣고 왔으면서 뭘 그래?”

“이모님도 너무하시는군.”

“너는 알고 있었어? 내 파혼 얘기.”

“어제 폐하께서 오셔서 말씀해주시던데. 네가 거부했다고.”

“난 파혼 안 해.”

“알아.”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세시안은 답답한 목장식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너무 늦게 결혼해서 미안하다.”

“뭘 그런 거 가지고 사과를 해?”

카스티야의 카타리나까지는 세시안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범주였다. 하지만 그 다음은 달랐다. 세시안이 조금만 신경 써 주었더라면.

어떻게든 잘 적응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답답하게 느꼈다. 왜 조금 더 노력해주지 않을까. 다들 나쁜 사람이 아닌데, 다소 까다로운 부분이 없진 않지만 상냥하게 대하고 친해지려고 애쓰면 마음을 열어줄 텐데. 매일 울기만 하고 만나고 싶지 않다고만 되뇌는 걸까. 실제로 부딪쳐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을 텐데.

그가 그렇게 그녀를 방치하고, 오히려 다그쳤기 때문에 루이즈 마리는 자신에게 독이나 다름없는 견과류를 꼭꼭 씹어 넘기는 것으로 삶을 끊어버렸다.

하지만 미셸에게도 그건 말할 수 없었다. 세시안 홀로 알아야 하는 죄였다. 그래서 그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크리스를 다시 데려온 걸 미안하다고 할 순 없잖아.”

여동생이 수녀원에서 외로움에 목을 맸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세시안은 다시 한 번 진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이상 크리스틴은 세시안이 책임져야 할 범위에 속해 있었다. 때문에 세시안은 크리스틴이 연회에서 다소 철없어 보이는 언행을 일삼았어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혹여라도 싫은 소리를 듣고 다시 목을 맬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오죽하면 어제도 착각 때문에 단숨에 사 층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그건 그래. 그런데 로르쉘의 아가씨를 계속 거절한 건 네가 미안해해야 하는 일이 맞아.”

“내가 거절 안 했어. 어마마마께서 하셨지. 나는 그녀가 세 번 차였다고 소문 퍼질 때까지 내게 혼담이 들어온 줄도 몰랐다고.”

“이모님께서는 보르디를 싫어하시니까. 아롈은 어때? 순순히 당하고 있을 성격은 절대 아니지만.”

“아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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