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롈이 황제가 되었다면 버전의 가상 세계 외전입니다.
이 외전은 본편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봄이 왔다.
저 남쪽에서 태어난 봄은 살랑살랑 옷자락을 흔들며 대륙을 타고 걸어 올라왔다. 중부를 지나 릴레벨트 해 연안의 나라들을 사뿐사뿐 밟고 올라온 봄은 마침내 코시카 황도에 발을 디뎠다.
봄의 투명한 옷자락이 닿은 곳마다 흰 눈은 녹아내리고 파릇한 잔디가 돋아났다. 들꽃마저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황도 한가운데에 장식품처럼 서있는 황궁에는 봄은커녕 봄의 머리털 한 올 닿지 않은 듯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브게니아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분위기를 느끼고 이마를 찌푸렸다. 성큼성큼 황궁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 다른 시녀들이 간절한 눈길을 보내 왔다. 그녀는 부른 배를 끌어안고 황제의 침실 바로 앞에 섰다. 허락이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
“폐하.”
“무릎은 꿇지 말거라. 무거운 몸으로 웬일이냐?”
아직 미혼이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환하게 빛났다. 손사래를 치고 있는 여인은 예브게니아와 동갑이었으나 그 신분은 비할 데 없이 지고했다. 그녀는 예브게니아의 주인이며, 이 황궁의 주인이며, 황도의 주인이며, 나라의 주인이며, 북부 전체의 주인이자 신의 대리자인 것이다.
옐레나 파블로브나, 코시카의 옐레나 1세 여제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시 미간을 문질렀다.
“폐하께서 더 닦을 것도 없는 황궁을 치우라고 시녀 아이들을 들볶으신다는 소리가 제 저택까지 들리던 걸요.”
“휴일을 줬더니만 쪼르르 달려가서 그런 고자질이나 하였더냐?”
입술 양 끝이 어이없다는 듯이 조금 올라갔다. 눈가에 남은 긴 흉터만 제외하면, 아니 흉터가 있다고 해도 흠 없이 고상한 미모였다.
“작작 하셔야지요. 제가 보기엔 혓바닥으로 바닥을 쓸고 다닌 듯 깔끔한데요.”
“시집가서 애를 가지더니 한층 건방져졌구나. 언젠가 내 경을 치고 말겠다.”
그래봐야 빈말이라는 것을 빤히 아는 예브게니아는 그저 얌전히 웃었다. 죽이려면 즉위한 직후에 목을 쳤으리라. 여제는 그리 모진 사람이 못 되었다.
“폐하. 이미 발견했다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일입니다. 길어야 사흘이지요. 알렉산드르 대공 전하께서 황도에 도달하시면 제가 손수 접시에 담아 대령하겠어요.”
예브게니아의 말은 틀렸다. 아롈은 그로부터 이 주일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어린 조카가 독감에 걸렸다 했다. 어린 시절 병약했던 제 생각은 못 하고, 아롈은 대체 뉘의 피기에 감기 따위에 지느냐며 씨도둑질을 했다고 투덜거렸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갑자기 도망치면 어떡하지, 마음이 바뀌면 어떡하지. 막상 찾았다고 와서 대면했더니 다른 놈을 오라비랍시고 데려왔으면 어떡하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이제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아롈은 옥좌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조금만 지나면 저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알렉신드르와, 꼴보기 싫은 나탈리야와, 얼굴도 모를 조카가 걸어 들어올 것이다. 이제 아롈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
아롈, 옐레나 파블로브나는 직계 가족을 모두 유폐하면서 황위에 올랐다. 아버지와 어린 동생의 목을 치기를 끝끝내 거부했으나, 그들을 ‘안전하게’ 탑에 모시라는 주청까지 거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생아 표트르 파블로비치 유리예프스키와 알렉세이 파블로비치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동안 파블 1세는 정부와 함께 음독하여 자살했다. 갓난 미하일 대공을 먼저 죽인 뒤였다.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대공비, 그리고 그들의 딸인 안나와 아나스타샤 여공은 계승권을 박탈당한 채 황도에서 추방당했다. 옐레나 선황후는 교외의 작은 성에서 죽은 듯이 살고 있었다.
옐레나 1세는 이제 이 황도에서 유일하게 키예나 성을 달고 있는 고독한 승리자였다.
그 승리는 모두 이를 위한 일이었다. 삼 년 동안 황제로서 내달렸다. 리투아니아를 병탄하여 속국의 왕조를 갈아치우고, 릴레벨트 해의 웨데나 사략으로 인해 발발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다른 속국과 공국들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하게 하는 동안 내정에서는 정신없이 한 남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아롈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독기 때문에 시퍼렇게 변한 아버지와, 숨이 막혀 죽은 어린 남동생의 시신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준 버팀목이자, 좋은 황제가 되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을 오라비를 위해서, 옐레나 1세는 이 대륙에 조금 더 빠르고 강력한 평화를 퍼트리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결국은 찾아냈다.
저 키예나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했다. 알렉산드르와 나탈리야. 그리 드물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성을 바꾸었을 테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검은 머리의 알렉산드르, 갈색 머리의 나탈리야라는 처녀는 코시카 안에 수십만 명이 넘었다.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결국 결실을 맺었다.
새벽 작업에 졸린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성의없이 팔랑팔랑 보고서를 넘기다가 조사관이 첨부한 용모파기에 눈이 번쩍 뜨인 것도 그 때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일이다.
“폐하. 알렉산드르와 나탈리야가 들었습니다.”
여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들어오라 해라!”
이 외전은 본편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여름눈송이 - 가상외전 (1-1)
봄이 왔다.
저 남쪽에서 태어난 봄은 살랑살랑 옷자락을 흔들며 대륙을 타고 걸어 올라왔다. 중부를 지나 릴레벨트 해 연안의 나라들을 사뿐사뿐 밟고 올라온 봄은 마침내 코시카 황도에 발을 디뎠다.
봄의 투명한 옷자락이 닿은 곳마다 흰 눈은 녹아내리고 파릇한 잔디가 돋아났다. 들꽃마저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황도 한가운데에 장식품처럼 서있는 황궁에는 봄은커녕 봄의 머리털 한 올 닿지 않은 듯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브게니아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분위기를 느끼고 이마를 찌푸렸다. 성큼성큼 황궁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 다른 시녀들이 간절한 눈길을 보내 왔다. 그녀는 부른 배를 끌어안고 황제의 침실 바로 앞에 섰다. 허락이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
“폐하.”
“무릎은 꿇지 말거라. 무거운 몸으로 웬일이냐?”
아직 미혼이라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환하게 빛났다. 손사래를 치고 있는 여인은 예브게니아와 동갑이었으나 그 신분은 비할 데 없이 지고했다. 그녀는 예브게니아의 주인이며, 이 황궁의 주인이며, 황도의 주인이며, 나라의 주인이며, 북부 전체의 주인이자 신의 대리자인 것이다.
옐레나 파블로브나, 코시카의 옐레나 1세 여제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다시 미간을 문질렀다.
“폐하께서 더 닦을 것도 없는 황궁을 치우라고 시녀 아이들을 들볶으신다는 소리가 제 저택까지 들리던 걸요.”
“휴일을 줬더니만 쪼르르 달려가서 그런 고자질이나 하였더냐?”
입술 양 끝이 어이없다는 듯이 조금 올라갔다. 눈가에 남은 긴 흉터만 제외하면, 아니 흉터가 있다고 해도 흠 없이 고상한 미모였다.
“작작 하셔야지요. 제가 보기엔 혓바닥으로 바닥을 쓸고 다닌 듯 깔끔한데요.”
“시집가서 애를 가지더니 한층 건방져졌구나. 언젠가 내 경을 치고 말겠다.”
그래봐야 빈말이라는 것을 빤히 아는 예브게니아는 그저 얌전히 웃었다. 죽이려면 즉위한 직후에 목을 쳤으리라. 여제는 그리 모진 사람이 못 되었다.
“폐하. 이미 발견했다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일입니다. 길어야 사흘이지요. 알렉산드르 대공 전하께서 황도에 도달하시면 제가 손수 접시에 담아 대령하겠어요.”
예브게니아의 말은 틀렸다. 아롈은 그로부터 이 주일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어린 조카가 독감에 걸렸다 했다. 어린 시절 병약했던 제 생각은 못 하고, 아롈은 대체 뉘의 피기에 감기 따위에 지느냐며 씨도둑질을 했다고 투덜거렸다.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갑자기 도망치면 어떡하지, 마음이 바뀌면 어떡하지. 막상 찾았다고 와서 대면했더니 다른 놈을 오라비랍시고 데려왔으면 어떡하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 이제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아롈은 옥좌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조금만 지나면 저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알렉신드르와, 꼴보기 싫은 나탈리야와, 얼굴도 모를 조카가 걸어 들어올 것이다. 이제 아롈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
아롈, 옐레나 파블로브나는 직계 가족을 모두 유폐하면서 황위에 올랐다. 아버지와 어린 동생의 목을 치기를 끝끝내 거부했으나, 그들을 ‘안전하게’ 탑에 모시라는 주청까지 거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생아 표트르 파블로비치 유리예프스키와 알렉세이 파블로비치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동안 파블 1세는 정부와 함께 음독하여 자살했다. 갓난 미하일 대공을 먼저 죽인 뒤였다.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대공비, 그리고 그들의 딸인 안나와 아나스타샤 여공은 계승권을 박탈당한 채 황도에서 추방당했다. 옐레나 선황후는 교외의 작은 성에서 죽은 듯이 살고 있었다.
옐레나 1세는 이제 이 황도에서 유일하게 키예나 성을 달고 있는 고독한 승리자였다.
그 승리는 모두 이를 위한 일이었다. 삼 년 동안 황제로서 내달렸다. 리투아니아를 병탄하여 속국의 왕조를 갈아치우고, 릴레벨트 해의 웨데나 사략으로 인해 발발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다른 속국과 공국들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하게 하는 동안 내정에서는 정신없이 한 남자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아롈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독기 때문에 시퍼렇게 변한 아버지와, 숨이 막혀 죽은 어린 남동생의 시신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준 버팀목이자, 좋은 황제가 되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을 오라비를 위해서, 옐레나 1세는 이 대륙에 조금 더 빠르고 강력한 평화를 퍼트리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결국은 찾아냈다.
저 키예나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했다. 알렉산드르와 나탈리야. 그리 드물지도 않은 이름이었다. 성을 바꾸었을 테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검은 머리의 알렉산드르, 갈색 머리의 나탈리야라는 처녀는 코시카 안에 수십만 명이 넘었다.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결국 결실을 맺었다.
새벽 작업에 졸린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성의없이 팔랑팔랑 보고서를 넘기다가 조사관이 첨부한 용모파기에 눈이 번쩍 뜨인 것도 그 때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일이다.
“폐하. 알렉산드르와 나탈리야가 들었습니다.”
여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들어오라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