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눈송이 - 가상외전 (1-2)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가씨.”
안나 알렉산드로브나는 눈을 찡그렸다. 안나를 안내해준 여자는 백작 부인이라고 했다. 백작 부인이라. 얼마나 어마어마한 신분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 여자가 공주님이라도 모시듯 안나에게 정중하게 굴었다.
안나는 요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껏 조금 예쁘고 조금 똑똑할 뿐인 시골 계집애로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얼굴 한 번 안 비추던 영주님께서 행차하시더니 아버지의 흙 묻은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있는 것도 없는 집을 탈탈 털어서 짐을 싸고는 무시무시하게 번쩍이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아 황도로 왔다. 마을을 둘러싼 숲 한 번 넘어가 본 적 없는 안나는 지금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귀한 집안 아가씨들이 안나를 욕조에 담그고는 씻기고, 머리카락에 좋은 향기나는 기름을 발라 늘어뜨리고, 값비싼 옷을 입혀주었다. 빙글 돌자 무릎까지 늘어지는 값비싼 베일이 붕 떠올랐다. 굉장한 호사였다. 베일을 손으로 일일이 뜨는 건 손이 많이 간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랄 때마다 일일이 손뜨개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천을 잘라 머리에 두르고 다녔다. 그나마 안나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떠준 적이 있어서 베일을 정리하는 방법을 알았다.
혼자서 조금 기다리자, 역시 박박 씻은 동생들이 들어왔다. 연년생인 이반과 옐레나는 안나를 보자마자 울면서 달려들었다. 다리를 뜯어갈 기세로 달라붙는 통에 안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바냐! 예나! 얌전히!”
울음이 뚝 그쳤다. 씩씩대며 아이들을 달래는 동안 안나의 머릿속에선 아버지며 귀족에 대한 생각이 홀랑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기실로 들어오자 순수하게 차림에 대해서만 감탄할 수 있었다.
“와, 아빠, 죽어도 잘 어울린다고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안나는 어머니가 귀족인 것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잉태되었기 때문에 둘이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아버지가 귀족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황후 폐하께서 부르실 만큼 높은 귀족이라고는 바로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쟁기와 맨발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인데.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긁었다.
“예복 입은 지 몇 년이더라. 우리 아냐. 몇 살이지?”
“열두 살이요.”
“그럼 13년이네. 어색할 만하지 않니? 이리 오렴. 우리 어린 독수리들. 아주 예쁘구나!”
아버지는 종종 자식들을 독수리라고 불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이반이 아버지의 왼팔에 매달렸다. 옐레나도 안아달라고 칭얼거렸지만 아버지는 한 팔로 두 명을 들 수는 없다며 난처하게 둘째를 설득했다. 안나는 그 난장판을 뒤로 한 채 어머니를 보고 웃었다.
“엄마. 예뻐요.”
나탈리야는 안나에게 속삭였다.
“내 사랑하는 딸.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말렴. 알았니?”
“무슨 일이요?”
“으음. 그러니까.”
대기실 문이 열렸다. 시선이 저절로 쏠렸다. 아까 안나를 안내해준 백작부인이라는 여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알렉산드르 전하. 귀환하신 것을 경하 드립니다.”
“전하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래, 이런 거 말이란다.”
“음. 카나예바 양. 일어나라. 오랜만이군.”
아버지는 쑥스럽다는 듯이 황소개 같은 코끝을 찡그리더니 명령했다. 안나는 중얼거렸다.
“대공?”
부인은 일어나더니 배에 손을 대고 웃었다. 움직임이 기이하게 느려서 자세히 보니 배가 잔뜩 부풀어 있었다. 치마 탓에 그녀가 임신부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부디 이제 보로노바라고 불러주십시오. 돌로루코바 공녀께서도 이토록 건강하신 것을 뵈오니 기쁩니다. 틀림없이 폐하께서도 흔흔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놀랄 힘도 없었다. 안나는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 섰다. 어머니가 물었다.
“기다리고 계신가요?”
“예.”
“언제 알현하면 될까요?”
“지금입니다.”
안나가 준비할 시간도 없이, 대기실에 달려있는 가장 거대한 문이 열렸다. 부인이 팔을 뻗었다.
“드시지요.”
아버지가 가장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양 팔에는 대롱대롱 동생들이 매달려 있었다. 안나는 부리나케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하마터면 베일이 벗겨질 뻔했다.
아주 큰 방이었다. 들어오는 사람의 기를 죽이도록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섬세하게 배려해놓았다. 흰 벽을 빙 둘러 천사의 조각상이 서 있었고, 바닥은 대리석이었다. 문의 건너편 벽에는 서른세 개의 계단이 이어져 있었는데, 그 계단까지 붉은 융단이 깔려있었다. 천장에는 독수리 그림이 있었다. 살아있는 듯 생생한 독수리는 천장의 빗면을 따라 천창(天窓)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천창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이 정확하게 계단 위에 있는 옥좌를 비추었다. 그리고 그 옥좌에서 막 일어선 듯 있는 여인이 있었다.
아주 아름다운 여자였다. 왕관과 왕홀과 비단으로 휘감아 치장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미인이었다. 짙은 청록색 옷 위로 분홍빛을 띤 흰 피부가 돋보였다. 머리카락은 흔히 웨데나 금발이라고 불리는 레몬색이었다. 햇살에 빛나는 금발이 후광처럼 보여 일견 신성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표정은 아주 딱딱했다. 실수라도 하면 하품하듯이 단칼에 사형 선고를 내릴 듯했다. 실제로 이반은 금세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안나는 무릎을 꿇어야 하나 망설였지만 그러나 아버지가 무릎을 꿇지 않았기 때문에-아버지는 그냥 무조건 자기만 따라하면 된다고 했다- 그냥 서 있었다.
“아롈?”
“알렉산드르 대공 전하. 옐레나 1세 폐하십니다. 인사 올리십시오.”
여자가 손을 내저으며 바늘 끝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니, 제냐. 나가라.”
보로노바 백작부인이 나가고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여제 폐하시라는 분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천천히 셋을 셀 시간이 흘렀다. 안나는 침을 삼켰다.
“네가 첫째냐.”
“예. 예. 예? 예, 그렇습니다.”
폐하라고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나 덧붙이기 직전 여제는 말을 끊었다.
“이름이?”
“저는 안나 알렉산드로브나 파블로브스키입니다. 이 아이들이 제 동생들인 옐레나와 이반입니다.”
“이반. 안나. 옐레나라.”
서릿발처럼 고상하던 미모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색 옅은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게 이 거리에서도 보였다. 무언가 대답을 잘못한 걸까?
어머니가 무릎을 꿇었다.
“아롈 여대공 전하. 아니, 여제 폐하. 뒤늦게나마 사죄드립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안나는 덩달아 무릎을 꿇고 옆에 서 있는 옐레나의 뒤통수를 붙잡아 강제로 꿇렸다. 동생은 버둥거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직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제 폐하라는 여인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얼음 위를 지치는 듯한 걸음걸이로 여제는 안나의 아버지, 알렉산드르의 앞에 섰다.
안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여제는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젊었다. 아니, 어렸다. 스물도 안 되어 보인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여제가 손을 높이 들었다. 안나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각오했던 파열음은 들리지 않았다. 반지를 세 개도 더 낀 손이 천천히 알렉산드르의 어깨를 매만졌다.
“여제라고?”
“그래. 내 손위형제가 여자한테 빠져서 책임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는 바람에 황실 계보에서 이름이 날아갔으니까 내가 첫째였다고. 당연한 일이지.”
이슬 어린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말했지. 나보다 잘 어울릴 거라고. 기억해? 옐레나 1세라. 멋지잖아. 적어도 알렉산드르 2세보다는 나은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사샤는 얼간이야!”
여제가 내지른 소리는 넓은 알현실 안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버지의 오른쪽 옷소매를 쥐었다. 안에 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천은 힘없이 손 안에서 구겨졌다.
“어떻게 살아왔기에 팔을 흘리고 다녀!”
“미안해.”
“얼굴은 또 이게 뭐야. 여기에 흉이 졌잖아! 애는 다 굶겨서 빼빼 말랐고.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속눈썹이 눈물을 더는 감당하지 못 했다. 뺨 위로 구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망쳤으면 힘들게나 살지 말든가. 보석이라도 훔쳐가지 그랬어.”
“그럼 사흘 만에 폐하 앞에 끌려왔을 텐데.”
“내가 말하는 게 바로 그거야! 영혼이 깨지도록 꾸중 들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사지는 멀쩡했겠지!”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더니 소리 내어 울었다. 얼음으로 빚은 것처럼 완벽해보이던 여인은 이제 없었다. 다 큰 처녀가 이반이나 옐레나처럼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안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더 빨랐다.
알렉산드르는 남은 한쪽 팔을 여동생의 머리 위에 얹었다. 안나는 얼음이 녹아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엉킨 머릿속을 정리해나갔다. 손위형제. 여제. 대공 전하. 안나의 아버지는 저 여자의 오빠였다. 그 말은 안나와 옐레나와 이반에게 고모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지위 높고 부유한 고모가.
아직 복잡한 건 많았지만, 안나는 그것만을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