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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이반과 안나가 살아있었다는 가정하에 진행되는 외전입니다.
(이 외전은 여름눈송이 본편과는 일말의 상관도 없습니다)

여름눈송이 - 가상외전 (2-1)


 유난히도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하녀가 커튼을 걷자 반짝이며 춤추는 햇살이 들어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조금 짜증스레 햇살과 꼭 닮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것도 잠시, 코시카의 이반 파블로비치는 섬세한 얼굴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간밤에 잠을 설쳐서 조금 졸렸지만 오늘은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어린 막내에게 생일 선물로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본 것이 화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대단히 가벼운 질문이었다. 여섯 살짜리 어린 아이가 가지고 싶은 게 얼마나 있을까. 기껏해야 보석, 아니면 예쁜 옷, 장난감 이런 것들을 떠올렸다. 설마 가족 모두 다 같이 ‘소풍’을 가고 싶다고 했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굉장한 소원이었다. 평범한 가족이라면 몰라도 그들은 코시카의 황제와 체사레비치와 체사레브나와 그 자식들이었다. 조부와 부모를 빼고 아이들끼리만 간다손 쳐도 이반부터 막내까지의 황위 계승 서열은 지극히 높다. 그들이 모두 어딘가로 나가 잘못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리라. 이반만 해도 태어나서 키예프에 다녀온 걸 제외하곤 황도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황궁 밖으로 나간 적도 열 손가락에 꼽았다.

그러나 이반은 거절할 수 없었다. 하릴없이 조부를 설득했고, 황실 소유의 사냥 숲에 근위병을 배치하는 조건으로 하루의 외출을 허락받았다.

아버지는 정부와 함께 근교로 여행을 떠났고, 어머니는 가벼운 감기라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르와 안나는 의중을 떠볼 것도 없이 좋아 날뛰었다. 그리고 그 외출은 바로 오늘이었다.

독수리를 수놓은 헐렁한 튜닉과 바지를 걸치고, 부드러운 벨벳을 안에 덧댄 소가죽 부츠를 꿰어 신는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시종과 시녀들이 다녀갔다. 그는 데운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고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현관에는 근위병 일개 소대와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아기 독수리 세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동생들을 살펴본 결과 오늘 그들이 사고를 치지 않도록 말리는 것만도 대단히 힘들리라고 생각했다.

“이반! 늦었어!”

가장 큰 독수리, 알렉산드르가 손을 흔들었다. 이반은 모른 척하고 소대장이 내미는 보고서를 훑었다. 배치 상황에 딱히 흠잡을 곳은 없어 보였다. 아니, 다소 강박적이기까지 했다. 당직인 근위병은 물론이고 교대에 들어간 이들의 80%를 소집해서 숲 전체에 호위를 세웠다. 위험한 동물들은 전부 치웠다.

그는 흡족하게 보고서를 돌려주고는 동생들에게 다가갔다. 그 중 가장 어린 소녀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 그는 빙긋 웃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옐레나.”

 

숲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동안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주로 대화를 주도하는 건 수다스러운 알렉산드르와 명랑한 안나였다.

“안드레이가 그 때 한참이나 내 눈치를 보다가 그러는 거야.”

“뭐라고?”

“안나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디 주제넘다 생각하지 마시고, 잠시 잠깐이나마 생각해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정말 못생기셨습니다?”

“사샤!”

알렉산드르는 낄낄 웃으며 박차를 가했다. 안나도 따라 달려 나갔다.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가만 안 둬!”

북부의 아이들답게 그들은 승마에 능숙했다. 특히 안나는 정말 잘 탔다. 그녀는 말을 하도 타서 허벅지가 굵어졌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승마 수업을 쉬지 않았다. 결국 안나에게 추월당하고 길을 가로막힌 사샤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곤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틀린 말 했나?”

“사샤. 아냐는 예뻐.”

작지만 또렷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말을 타지 못하는 오늘의 주인공을 앞에 태우고 있던 이반은 미간을 좁혔다. 목소리의 느낌이 화난 어머니와 지나치게 흡사했다.

“아롈. 농담이야.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네.”

안나가 손을 모아 소리쳤다.

“사샤야말로 못생겨서 자격지심 갖는 거야!”

“아냐!”

황가의 남매는 다시 격하게 말을 몰았다. 깨끗하게 길을 정돈해 두어 갑자기 등장한 나무뿌리에 말발굽이 채이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반도 조금 속도를 냈다.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동그란 정수리가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는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고삐를 쥐었다.

“세상에! 이반! 아롈! 빨리 와!”

드디어 발견했나보다.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하게 우거진 나뭇가지들이 점점 드문드문해지며 해가 비쳐 들어오더니, 곧 시야가 확 트였다.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시내가 나타났다. 숲을 가로질러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주변에 앉을 수 있을 법한 넓은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에 물이 부딪칠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나면서 빛나는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다.

가장 먼저 안나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녀는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물에 걸어 들어갔다.

"물이 맑아. 이것 봐. 모래알도 셀 수 있겠어!"

"아냐! 물에 들어가면 어떡해!"

알렉산드르 역시 말을 세우고 뛰어내렸는데, 안나는 알렉산드르가 가까이 왔을 때 양손으로 물을 모아 그에게 끼얹었다.

"야!"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시내에 들어가 서로에게 물을 끼얹었다. 조용하던 숲은 간 곳 없고 금세 웃음소리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이반은 그 장면을 잠시 넋을 빼고 보다가 등자에 발을 얹고 조심스레 몸을 내렸다.

"자, 옐레나."

아직 말 위에 있는 동생에게 손을 내밀자 아이는 순순히 안겨왔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땅에 발을 붙인 옐레나는 어지러운 듯이 조금 비틀거렸다. 어린 아이들은 몸에 비해 머리가 커서 중심을 잡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수세에 몰린 안나가 소리쳤다.

“아롈! 빨리 나 좀 도와줘!”

“응!”

옐레나는 아장아장 달려가다가 혼자서 철퍼덕 넘어졌지만 금세 씩씩하게 일어나 냇가로 달려가 물싸움에 합류했다. 이반은 한두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잘 보이지도 않는 싸움으로 인해 튀어 오르는 물방울과 햇살들을 관조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붉고 따뜻한 반짝임. 오늘 하루는 쉬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받아라!”

물벼락이 쏟아졌다. 이반은 기침을 토해내며 눈을 깜빡였다. 머리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마를 타고 내려와 긴 속눈썹에 맺혔다. 알렉산드르의 곰 같은 손은 그야말로 굉장한 양의 물을 한꺼번에 끼얹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손으로 물을 훔쳐냈다.

“굉장한 공격이군요, 사샤.”

“그래, 페란토 어를 그만큼 배웠으면 폐하께 안 혼났을 걸.”

이반은 저벅저벅 물을 튀기며 물로 들어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소심하게 물을 떠올려 사샤에게 뿌렸다. 그걸 신호로 발발한 이차 전쟁은 황가의 네 남매가 숨이 멎기 직전까지 웃고 나서야 끝났다.

 

물을 조금 따라 거슬러 올라가자 이반이 미리 가져다 놓으라고 명령한 천막과 테이블, 그리고 의자가 있었다. 그는 결코 땅바닥에 앉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알렉산드르는 회랑이라도 열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투덜거렸지만 이반은 열쇠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말로 일축했다.

천막에 들어가 시종도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어디까지나 정식 예복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었다- 알렉산드르가 구석에 놓여있던 음식 바구니를 들고 왔다. 여자들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알렉산드르는 불을 지피고, 주머니칼로 호밀빵을 숭덩숭덩 썰어 개인 접시에 올려놓았다.

그의 동작은 이런 데에 익숙해보였다. 이반은 알렉산드르가 안나의 약혼자인 안드레이와 작당하여 간혹 황궁 바깥을 드나든다는 의심을 방금 확인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빵을 다 썰고 치즈도 썰었다. 송어 찜과 새끼돼지 통구이와 훈제한 닭고기를 늘어놓자 적당히 소박한 점심 식사가 되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다른 사라판으로 갈아입고 나온 숙녀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은제 포크와 칼이 바삐 오갔다. 네 명이 먹기엔 많은 음식이었지만 그들은 합심해서 남김없이 적을 무찔렀다. 그 결과 안나와 알렉산드르는 부른 배를 움켜쥐고 호흡 곤란을 호소하다가 사이좋게 판판한 돌 위에 누워 잠들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알렉산드르가 말을 타고 숲 밖으로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고, 크게 싸움이 난 것도 아니고, 어떤 미친놈이 총을 가지고 난입해 그들을 쏘아 죽이지도 않았다.

이반은 책이라도 볼까 하며 품속에서 안경을 꺼냈다. 안경집 덕에 안경알은 깨끗했다. 세상이 말끔하게 돌아왔다. 요즘 눈이 점점 나빠져 안경이 없으면 사람의 얼굴 표정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반은 바로 맞은편에서 오도카니 턱을 괴고 그를 쳐다보고 있는 막내와 눈이 마주쳤다.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았다. 심지어 밝은 금발과 연녹색 홍채까지도.

이반은 딱히 동생들에게 경쟁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꼈다. 알렉산드르와 안나가 건방지게 굴어도 용인하는 관용이야말로 우애에 대한 증명이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친절한 형이요, 오라비였다. 그 감정이 혈통에서 나오는 만큼, 그는 공평하게 이 막내에게도 애정을 나누어주어야 마땅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있잖아, 이반은 왜 내가 싫어?”

그러나 그는 이 소녀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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