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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여름눈송이 - 가상외전 (2-2)


 “무슨 말씀을.”

천연덕스레 웃어보였지만 사실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거짓말. 나는 다 알아.”

작은 얼굴은 또렷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들킨 걸까. 이반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세 살 때 보내놓고 모두가 깜빡 잊고 있던 이 아이를 키예프에서 다시 불러올릴 것을 주청한 것도 이반, 돌아온 마차에서 내리는 여동생을 살짝 끌어안은 것도 이반이었다. 중요한 가족 모임 등에 초대장을 보내지 않는 유치한 짓도 한 적 없었다. 이번 외출도 그로서는 대단히 무리해서 허락을 얻어내지 않았나.

이반은 사랑하는 어머니에 걸고 맹세컨대 모든 힘을 다해 옐레나 파블로브나를 아끼는 척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낳느라 어머니가 죽을 뻔했다는 이유만으로 오 년도 넘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켰을 리가.

어머니는 이 아이를 낳은 뒤로 몸이 약해졌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았다고 했다. 사흘 활동하면 하루는 누워있어야 했다. 어머니의 잠든 얼굴을 볼 때마다 그는 막내가 미웠다.

“제가 뭔가 섭섭하게 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열여덟 살의 소년은 만면에 아주 다정한 미소를 띠고 구슬리듯이 물었다. 그러나 소녀는 녹록하지 않았다.

“그냥.”

“옐레나. 말씀해주십시오.”

속눈썹에 얹힌 햇빛이 고왔다. 아이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 닮았다. 금발과 녹안, 이목구비, 심지어는 목소리까지도. 다 크지 않았는데도 뚜렷한 혈연의 증거는 방심할 때마다 하나씩 튀어나와서 마음 놓고 싫어할 수도 없었다.

“이반은 나 죽일 거야?”

어린애들이란. 이반은 조금 짜증이 났지만, 지금 화를 냈다간 이 꼬맹이의 머릿속에 ‘이반은 나를 싫어해’라는 문장을 대못으로 박아 새겨 넣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꾹 참았다.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요?”

“원래 황제는 형제를 많이 죽인대.”

그들의 증조모인 안나 여제는 사촌을 폐위하고 황위에 올랐다. 그녀는 세 명의 사촌을 모두 탑 속에 유폐했다. 폐주는 죽었으나 그 여동생들은 여전히 갇힌 채 살아있었다. 조부인 이반 3세는 조카인 콘스탄틴 대공을 밟고 즉위했다. 때문에 그에게는 미하일 대공을 암살했다는 뒷소문이 내내 붙어 다녔다.

“있잖아, 나는 사샤랑 아냐랑 이반이랑 다 좋거든. 오래오래 다 같이 살고 싶어. 그런데 죽으면 같이 못 놀잖아. 그러니까 안 죽이면 안 돼?”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옐레나.”

그보다 이반은 대체 누가 여섯 살짜리 꼬마, 것도 키예프에서 돌아온 지 일 년밖에 안 된 아이에게 그런 말을 속살거렸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죽는 건 무서워. 황제 안 할래. 그냥 이반이 해, 알았지?”

이반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옐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나가 누워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안나의 품으로 파고든 옐레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이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탁자에 등을 편하게 기대고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책을 몇 장 넘겼지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무릎 위에 묵직한 역사서를 올려놓은 채 눈을 감았다. 온기가 물결처럼 손등과 목과 뺨을 간질였다. 그는 깜빡 잠들어버렸다. 몇 가지 터무니없는 꿈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알렉산드르가 손을 흔들었다.

“바니. 일어나. 해가 졌어.”

뭐라고? 그는 눈을 떴다. 파랗던 하늘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반이 제일 잠꾸러기네.”

안나가 까르르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늦었다.

이를 악물고 달렸지만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카만 밤이었다. 안나와 알렉산드르보다 실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에 그는 가장 늦게 도착했다. 그가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둘은 벌써 마구간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반은 옐레나를 방에 데려다주었다. 아이는 계단을 올라오는 사이 금세 지쳐 잠들어 있었다. 이반은 무심결에 이불 위에 놓여있는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이것도 손이라고 손가락 다섯 개는 물론이요 손톱까지 다 달려 있었다.

그래, 이건 그냥 애다. 모자라고 어리석은 존재. 그는 어른이니 이해해 줘야 한다. 선택이 아닌 의무다. 비록 이 아이가 황제가 무슨 애물단지인 양 하고 싶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 취급을 했다 해도, 그건 순수하게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리라.

“알겠습니다.”

옐레나의 계승권은 남매 중 가장 밑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반의 경쟁자가 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약속하지요.”

들을 리가 없을 텐데도 아이는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이반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속삭였다.

“좋은 꿈꾸십시오, 옐레나.”

그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잠들었다. 길고 긴, 조금은 즐거운 봄날이었다.

부실한 마지막 같아서 마음이 쓰이지만 올려봅니다.
올해도 행복한 봄날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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