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12)
앤은 얌전히 자비관 꼭대기로 올라가 로르쉘의 아가씨인 샤를루아 공작녀 소피의 방에 찾아갔다. 마침 소피는 포의 아가씨인 나바르의 쥬스티느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수를 놓는 중이었다. 두 번 움직일 일이 없어졌다.
새 마담 라 세르에 대해 호의적인 가문 출신의 두 아가씨들은 흔쾌히 이해해주었다. 오히려 병문안을 가야겠다는 호들갑을 말리느라 진이 빠질 정도였다. 앤은 인사를 올리고 물러나 대계단을 통해 이층으로 내려갔다.
이블린의 본관은 정의관과 자비관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두 건물은 각각 다섯 층이었다.
1층은 대무도회에 사용하는 거울의 홀로 연결되어 있었고 다른 공간은 전쟁의 홀, 꽃의 홀 등 여러 홀로 이루어져 접객이나 만찬, 무도회 등에 쓰였으므로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곳은 그 위부터다.
마담 라 세르의 방은 4층, 황후의 방은 3층, 마담 르와이얄의 방은 2층의 중앙에 고정적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대공가의 아가씨들이며 대공비, 기타 지위 높은 여성들의 거처는 그 때 그 때 사정에 따라 변한다. 주로 대공가의 장녀들은 5층에 방을 잡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3층에 살고 있지 않았다. 앤은 대계단을 통해 내려와 2층의 모서리를 두 번 돌아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황후의 방이라기엔 지나치게 초라한 방문 앞에 선 그녀는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려다 그만두길 반복했다.
앤은 스무 살 남짓한 나이치고는 명석했지만 그녀의 할머니가 알려줄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인들의 민감한 기싸움은 직접 겪지 않으면 알기 힘든 영역이었고, 그 상대가 앤보다 까마득히 지위 높은 여인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건 궁에서 나고 자란 여인들도 힘들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앤이 아무리 서툴다 해도 아롈의 명령도 받지 않은 채 황후와의 선약을 깨는 것이 결코 아롈에게 좋을 리 없다는 판단 정도는 내릴 수 있었다.
한참을 서성이던 앤은 결국 마음을 굳혔다. 앤의 주인은 아롈이지 아롈의 남편이 아니었다. 첫날밤에도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내가 아닌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마라.
남편은 거기에서 예외라는 말은 없었다. 다른 아가씨들과의 약속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죄하면 된다. 이제 와서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앤은 천천히 돌아섰다. 석찬 시간도 지난 뒤라 자비관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꽤 잦아들었다. 이 큰 건물의 대계단을 내려올 때도 겨우 두 명을 마주쳤을 뿐이다. 원래 연회가 없는 날 밤에는 조용하다고 리젤로트가 말했다.
결혼식에는 그토록 떠들썩했건만 그 뒤로는 본관에서는 단 한 번의 연회도 없었다. 다른 별관이나 이블린 소도시 쪽의 저택들, 수도의 귀족가문들로부터 매일 같이 무도회며 티파티, 만찬 초대장이 날아왔지만 아롈은 시큰둥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모든 초대장을 서랍에 처박았다.
바깥으로 나갈까 싶었다. 지금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 봐야 어차피 말을 나눌 상대도 없었다. 항상 수다를 떨던 벨타는 결혼식 이후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소금물을 부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벨타와 대화를 나누는 건 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밤새 대화를 나누면서도 질릴 줄을 몰랐다. 벨타는 맞장구를 잘 쳤고, 호들갑도 잘 떨었다. 가끔 피를 먹이고 물을 갈아주는 것만 빼면 그녀가 용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이는 부모님 이후로 처음이었다. 앤은 심지어 벨타를 친구처럼 느꼈다.
벨타의 걱정에 젖어 걷고 있던 앤은 모서리를 돌자마자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숨을 참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타오르는 붉은 머리였다.
앙투안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앤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바로 뒤에 있는 문으로 뛰어들었다. 번개처럼 기억이 났다. 황후의 방 근처에 사는 사람은 마담 미네트 밖에 없다는 것.
창문도 없는 방은 어두웠다. 아마 창고 정도로 쓰이는지 온갖 잡동사니며 낡은 가구들이 대중없이 놓여있었다. 이블린에 이런 방은 많았다. 아마 숨을 죽이고 있었다면 숨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앤은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허겁지겁 문을 나서자마자 의아한 빛을 띠는 새파란 눈과 마주쳤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레르헨펠트 양?”
앤은 들어갈 수 없는 문을 등에 대고 힘없이 웃었다.
“안녕하세요. 클라리 경.”
방은 어두웠다.
하녀를 부를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담 라 세르의 침실 천장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세 개나 달려있었지만 그 모든 촛대에 불을 붙이려면 세 명이 달라붙어도 족히 십오 분은 소요된다. 그리 부산을 떨 생각은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시녀를 돌려보낸 죄로, 세시안은 손수 침대 옆의 탁자에서 촛대를 가져다가 커다란 티타임용 테이블에 놓고 불을 옮겨 붙인 다음 술을 가져왔다. 보르디 산(産)임을 의미하는 지팡이 문양이 찍힌 코르크로 봉한 브랜디는 침대 옆에 촛대와 함께 얌전히 놓여 있었다. 차와 함께 타 마시는 용도의 설탕을 같이 놓자 꽤 그럴 듯했다.
대작 상대가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곁방으로 들어가 버렸으므로, 세시안은 술을 홀짝이는 대신 턱을 괴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식을 치른 이후 내내 자비관에서 밤을 보낸 덕에 풍경은 눈에 익었다. 오히려 정의관의 침실이 가물거릴 지경이다. 꽃병에 한가득 꽂힌 튤립 정도가 어제와 달라진 점일까. 아마 리젤로트가 들렀다 갔으리라. 크리스틴은 꽃에 관심이 없었고 미네트는 꽃을 싫어했다.
그는 문득 신부가 꽃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닿았다. 기실 그가 아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 방만 봐도 무지(無知)는 고스란히 드러났다.
값비싼 아마포로 천개를 두른 침대며 화사한 상아색의 비단 벽지 등은 모두 리젤로트의 취향이다. 주인의 흔적이라곤 전혀 묻어 있지 않다. 수백 년 동안 역대의 마담 라 세르가 살아온 방은 아직 새 주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외적인 것도 그리 많이 알고 있지는 않다. 북쪽의 황녀이며-세시안은 대다수의 로렌의 귀족들이 그러하듯 코시카의 작위 체제에 무관심했다-, 전 보르디 대공의 외손녀이며 현 보르디 대공의 생질(甥姪)이다. 코시카의 후계자였지만 어머니에 의해 밀려났다.
나이는 열여섯 살. 아주 어리고 아주 예쁘다. 머리카락은 옅은 레몬색이고, 홍채는 녹색 눈이 강가의 조약돌처럼 널려있는 남쪽에서도 보기 어려운 연둣빛. 잡히는 사람마다 모두 헐뜯는 데에 치중하는 이블린에서도 그녀의 외모에 입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침묵이야말로 최고의 찬사였다.
그러나 그 미모는 그녀의 무뚝뚝한 성격과 더불어 세시안으로 하여금 진한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신(新) 여제와 물밑 교섭을 한 것은 부황이었지만 세시안 또한 동의했다. 상비군 이천 명은 크다. 그런 병력을 움직이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로렌은 타국의 계승권자인 여인을 후계자의 부인으로 믿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배웠다. 지상의 모든 나라가 붉은 장미 법을 따라 남성의 계승권만을 인정하는 게 아니라는 처참한 사실도 함께. 상속녀와 결혼하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라는 생각에 젖어 살아온 남부인들은 상속녀가 남편에게 작위를 주지 않고 직접 작위를 계승하러 떠나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부에게는 불행히도, 부황은 두 번 실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계승권을 포기시키길 요구했다. 때문에 그 예쁜 소녀는 자신이 탄생과 함께 얻은 당연한 권리를 빼앗겼다.
세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술이 당겼다.
사실 신부를 울린 사람이 부황이라는 걸 안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후라면 조금 추측하기 까다로울 수도 있었겠지만.
정의관의 일에 감히 여자가 참견하지 말라는 것, 빨리 애를 낳으라는 것, 황후에게 공손하게 굴라는 것. 그 정도겠지.
세시안으로서는 그런 아버지에 대항하여 신부의 편을 들어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신부가 새파랗게 날이 선 목소리로 그에게 화를 냈을 때, 자신이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어딘가 그녀의 민감한 부분을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설명하고 사과를 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간 또다시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을 것임도 알았다.
활달한 남쪽의 숙녀들은 남자에게 이것저것 요구를 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고귀한 남성은 고귀한 여성을 마땅히 받들어 모시고 섬겨야-service- 마땅하므로.
분명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녀는 아주 정당한 요구를 할 때가 아니라면 조금 생각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할 말을 다 못 하면 병이 나는 성격인 여동생들에게 익숙해진 그로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늦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아야했다. 신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앉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