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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13)


     

아롈은 도망치듯 앤의 방으로 들어가 잠옷을 벗었다. 끈적이는 어깨에 뜨끈한 공기가 와닿았다.

목 주변에 프릴과 리본이 잔뜩 달린 잠옷을 입은 채로는 아무리 진지하게 화를 내봐야 받아들여질 리가 없지 않은가. 아롈은 의견을 피력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항상 짙은 색의 옷을 입고 평소보다 더 위압적으로 보이는 장신구를 착용하곤 했다.

그러나 마땅한 옷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중인 없이 혼자 스테이로 허리를 죄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결국 스테이와 파니에를 포기하고 아무 옷이나 골라 팔을 꿰어 넣었지만 몸에 꼭 끼는 옷은 땀 때문에 끈적이는 몸을 들여보내기를 격렬하게 거부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치밀었다.

소매 솔기를 터트린 끝에 몸을 집어넣는 데에 성공했지만 스테이가 없이 맨살에 스토마커를 달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아롈은 궤짝 구석에 처박혀있던 루바쉬까와 사라판을 꺼내 몸을 집어넣었다. 서늘한 면으로 된 옷을 걸치자 눈물이 날 정도로 시원하고 편했다. 내친 김에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땋아 내렸다.

앤의 방에는 몸을 전부 비출 수 있는 큰 거울이 없었지만 격식 있다고는 말 못 할 모습일 거라는 사실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본국에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사라판을 입지 않는다.

아롈은 자신의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부산을 떠는 동안 해는 지평선 끝으로 넘어가 있었다. 남편은 탁자에 턱을 괴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까 마시다 만 술과 잔을 놓아두고. 아롈은 바짝 허리를 폈다. 그는 지난 새벽에 나간 모습 그대로 답답한 정장 차림이었다.

“앉겠어요?”

그는 아마도 처음 볼 북쪽의 차림에 별 말을 얹지 않고 술을 따랐다. 호박색 술이 찰랑였다. 아롈은 잔을 받아들었다. 안 그래도 예쁜 빛깔인 액체는 촛불 빛을 품자 환상적으로 달콤해 보였지만, 이미 마셔보아 지독하게 쓰리라는 걸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모금 넘길 때마다 혀가 아팠다. 목부터 뱃속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처럼 화끈하게 타올랐다. 머리가 핑 도는 취기는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불쑥 각설탕이 나타났다. 아롈은 조금 망설이다가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거짓말처럼 사르르 녹아내렸지만 단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시안은 별 말 없이 설탕 종지를 치우고는 아롈의 잔을 다시 채웠다.

아, 남쪽에서는 첨잔이 예절이었지. 손님의 잔이 비어있는 것은 주최자가 손님을 모욕하는 행위로 치부된다 했다. 따라서 시비를 걸고 싶을 때 하인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술을 버리고 나와서 큰 소리로 빈 잔을 들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건배하지도 않고 먼저 마시긴가요?”

아, 취했나보다. 아롈의 입술은 두어 박자 늦게 움찔거렸다. 그러나 세시안은 딱히 대답을 바랐던 건 아니었는지, 자신의 잔을 흔들었다.

“조금 독하군요. 다른 술을 가져오라고 할까요?”

술기운이 이렇게 무거울 수가. 누가 어깨를 잡아 체중을 싣고 짓누르는 것 같았다. 엎드려 바닥이라도 길 것처럼 피곤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겨우 제 때 대답이 나갔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지 않았나요.“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간혹 마십니다."

"그렇군요.“

아롈은 말없이 따라놓은 술을 다시 마셨다. 한 번에 잔의 바닥이 보였다.

남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술을 따랐다.

아롈은 다시 마셨다.

또 술을 따랐다.

다시 한 번 잔에 손이 가려는 순간.

“무례하십니다.”

팔을 뻗어 손목을 잡아채는 바람에 술잔 안의 술이 손가락에 튀었다. 아롈은 눈을 사납게 치떴지만 세시안은 단호했다.

“그만 마셔요.”

“고작 술 석 잔에 취객 취급이십니까.”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깊이 잠겨있어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군다나 혀도 조금 굳었다. 그러나 허세를 부리며 눈을 피하지 않았다.

“급하게 마시는 건 좋지 않아요.”

어머니의 서리 낀 냉정함과는 다른 고요한 심록(深綠). 항상 차분하게 가라앉아 존재감을 숨기는. 평생을, 아롈의 두 배 이상의 시간을 황위 계승자로 살아왔으면서 어떻게 사람을 참아주는 여유가 남아있을까.

조금이라도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면 마주 소리 지를 텐데. 그의 아버지가 아롈에게 준 모욕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출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이 와중에도 잘 보이고 싶다. 다리 벌려 아이를 낳는 씨받이 취급을 당한 지 일주일도, 한 달도, 일 년도 아니고 겨우 여섯 시간 남짓 지났는데. 목줄에 매여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애정을 받길 원한다. 어떻게 이토록 비굴해질 수 있을까.

곰곰이 더듬어보아도 자존심이 적게 다친 건 아니다. 오히려 으스러지고 뭉개져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지경이다. 지금도 그 싸늘한 눈빛과, 덜덜 떨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생한데. 평생을 부정당한 분노는 용암처럼 뜨거웠다. 그 자리에서 아무런 반발도 하지 못하고 정말 하찮은 것처럼 기어 나와서 요강에 구토나 하고 있었던, 무력한 자신에 대한 실망이 꿀렁거리며 손끝까지 약동했다.

그럼에도 아롈은 한편으로 끊임없이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의 잘못은 아니라고. 그런 말을 한 것이 그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이 사람에게 화를 낼 이유는 없다고.

손에 힘이 풀렸다. 이렇게 사람이 미쳐가는구나. 아롈은 손목을 잡힌 채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만 마시지요.”

취기는 빠르게 몸을 잠식했다. 점차 촉각이 둔해진다. 대신 온각은 선명해진다. 손이 뜨겁다. 아랫배가 뜨겁다.

몸이 허공에 붕 떠있는 것 같다. 발가락으로 몇 번이나 바닥을 더듬어보았지만 확실히 아롈의 발은 바닥에 찰싹 붙어있었다. 하지만 날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어디론가 빠져드는 것 같다. 깊은 바다나 진흙탕으로. 하염없이 가라앉아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정말로 나는 건 아닌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날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날고 있나?

아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목은 아직 붙잡힌 그대로였다.

“오늘 정의관에 왔을 때.”

나긋한 목소리가 귀에 휘감겼다. 아롈은 벌써 둔감해지기 시작한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살짝 할퀴었다. 어떻게 구슬리든 말해주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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