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14) (1)
“오늘 정의관에 왔을 때.”
나긋한 목소리가 귀에 휘감겼다. 아롈은 벌써 둔감해지기 시작한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살짝 할퀴었다. 어떻게 구슬리든 말해주나 봐라.
“들렀다 가지 그랬어요.”
숨에 술 냄새가 섞여 새어나왔다. 잘못 들었나?
"생각해보니 보름이나 지나도록 정의관 안내를 해주지 않았군요. 언제든 생각나면 집무실에 들러요."
잠시 머리가 멈추었다. 대답하기 싫습니다, 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당연히 정의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울었느냐고 물어볼 줄 알았다. 안내해 줄 테니 놀러오라는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 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바쁘시지 않습니까."
무거운 머리를 부랴부랴 굴려서 꺼낸 변명은 취한 스스로가 듣기에도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필리프가 말한 바에 의하면 두 달 뒤에 일 년에 한 번 있는 대회의가 있다고 했다. 웬만한 로렌의 중대사가 결정되는 중요한 회의로 예산 편성부터 법률 개편, 작위 승계 등 다양한 것들을 논하고 몇몇 사항은 대공과 황실의 표결에 붙인다고 했다. 아롈은 대체 어떻게 그토록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나라가 돌아가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롈의 이해와는 별개로 그런 회의를 준비하려면 어마어마하게 바쁠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뿌듯함도 잠시, 세시안은 빙긋 웃으며 변명을 깨트려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렐르에게 집무실 구경 시켜줄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어요.”
그는 손톱 위에 입술을 대고 손을 놓아주었다. 어찌나 뜨거운지 화들짝 놀라 뿌리칠 뻔했다. 간신히 풀려난 손목을, 아롈은 다시 잡힐세라 아랫배 위에 붙였다.
어지러웠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반사하는 빛과, 붉은 사라판 위로 도드라지는 흰 살결 때문에 저기가 손등이구나, 간신히 짐작할 따름이었다.
취기가 이미 머리끝까지 차있었다.
손등이 딸깍 떨어졌다. 몸이 조금 흔들렸다. 눈앞이 새카만 가운데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 대신 심박이 배경으로 깔려 시간이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모든 감각이 잦아드는 가운데 음색이 풍부한 목소리만이 신탁처럼 울렸다.
“아렐르.”
치사하다.
그런 목소리로 말하고, 그런 눈빛으로 보고, 그런 말을 해버리는 건. 도망갈 길 없이.
“자요?”
아닙니다.
앙투안은 목례를 했다.
“황후 폐하께 볼일이 있으셨습니까.”
“길을 잘못 들어 그만. 돌아가려고 하였사옵니다. 그럼 이만.”
대체 이 단순한 구조의 건물에 길을 잘못 들 일이 무어 있겠느냐마는. 앤은 한시라도 빨리 등진 문으로부터 떨어지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앙투안은 길을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몸으로 길을 막아섰다.
“레르헨펠트 양. 전하께는 말씀 올리셨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아실 터인데요.”
아롈의 목걸이를 돌려주지 않고 몰래 걸고 나갔던 것을 들켰던 이후, 앤은 앙투안-클라리 경에게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한 번만 봐달라고. 조금의 말미만 주면 모든 일을 주인에게 전부 실토하겠노라고.
해야지, 해야지 하는 마음은 커졌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나질 않았다. 낮에는 항상 다른 손님들이나 시녀들이 붙어있었고 밤에는 세르가 찾아왔다. 주인이 잠자리를 하는 도중에 문을 따고 들어가 잘못을 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클라리 경. 듣는 귀가 있는 곳에서 그런 말씀을 하오시면.”
사실 방을 뒤져보면 목걸이가 다시 나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없지 않았다. 분명 화장대 위에 놓고 갔던 목걸이가 어디로 사라졌겠느냐마는 그걸 인정하기는 힘들었다. 뒤로 넘어간 것은 아닐까, 방을 치우는 하녀가 몰래 훔쳐간 것은 아닐까, 다른 곳에 숨겨놓고 급한 마음에 머릿속에서 지운 것은 아닐까. 사실은 옷을 넣어둔 궤짝 어딘가에 고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찾아보면 그만이건만 앤은 차마 그러지 못 했다. 아침에는 아롈의 치장을 돕느라 바빠서, 낮에는 손님들이 드나들어서, 밤에는 피곤해서. 아니, 사실은 핑계였다. 앤은 정말로 방을 뒤졌을 때 목걸이가 없으면 어쩌지 두려웠다. 벨타에게 말도 할 수 없어서 혼자 고민을 감싸 안고 덜덜 떨어야했다.
앙투안이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 했다.
“그럼 잠시 어디에라도 들어가서.”
“안 됩니다!”
그거야말로 안 될 일이었다. 앤은 결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기세에 당황한 앙투안이 몸을 물릴 정도였다.
자기가 얼마나 큰 소리를 질렀는지 깨닫자 얼굴이 붉어졌다. 황후의 방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천운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소녀야말로. 실례했사옵니다.”
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저 방에 다시 들어가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짓이다.
“정원에라도 가서 이야기하시겠어요, 경.”
“그러지요.”
앙투안은 손을 내미는 대신 몸을 물려 앤의 두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 자비관을 나선 앤은 본관을 빙 돌아 후원으로 향했다. 이블린의 후원은 길을 잃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로 드넓었다. 꽃과 벽과 수풀과 나무 등을 적절히 섞어놓아 답답하지는 않지만 곳곳에 으슥한 구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적당한 곳에 도착한 앤은 뒤돌아섰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오늘 아침 고하려 했사옵니다.”
설마 그 때 세르가 같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다만 전하께서 편찮으셨기 때문에 심기를 더 불편하시게 할 수 없어서.”
“어디가 안 좋으십니까?”
말이 잘렸다. 앤은 앙투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어렸다. 앤과 나이차가 그리 많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은 경께서 아실 일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만.”
친분도 없는 일개 기사가 대체 왜 마담 라 세르의 일에 관심을 갖는가. 이유는 너무 명백하지 않은가.
앤은 이유 모를 실망감을 감추고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쾌유하시면 말씀드리겠사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아롈은 술병으로 장장 이틀을 앓았다. 알렉산드르가 술을 퍼먹고 들어와 숙취로 고생할 때 부러 소리를 지르던 일이 후회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가 쪼개질 듯했다. 눈도 채 뜨지 못 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낑낑거렸다. 그러다가 요강에 위액을 토하고, 다시 누웠다.
머리에는 열이 오르고 손발은 찼다. 이 더운 날에 손발이 차게 식어서 추웠다. 앤이며 다른 시녀들이 돌아가면서 발치에 있는 탕파(湯婆)에 든 뜨거운 물을 수시로 갈고 손을 주물렀지만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퍼런 담즙을 토해내는 몸보다 더 괴로운 것은 수치심이었다.
진흙처럼 가라앉아있던 기억이 흙탕물처럼 떠올랐다. 술에 취해 놓고 안 취했다고 벅벅 우겨대던 제 목소리가 선명했다. 혀가 꼬여 우스꽝스러운 발음도.
-가서 자는 게 좋겠어요.
-안 취해쓰니다.
-취했어요.
-안 취해쓰니다. 더 마실 수 이써요.
잔도 없이 맨손을 내밀고 술을 따르라고 주정을 부렸던 게 생각나자 그냥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 다음부터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울었던가. 칭얼거린 것도 같은데 뭐라고 칭얼거렸는지는 하나도 생간나지 않는다. 행인지 불행인지 정사(情事)의 흔적은 없었다. 하긴 누가 봐도 정이 떨어질 만큼 추했으리라.
미친 년. 이걸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코시카에서 금주령이라도 내렸을 것을. 술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었다. 작센에서 그리 호되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지.
애당초 앤이 잘못이었다. 술을 다 먹었으면 치워야지 왜 방에 놔두어 그 사달을 낸단 말인가?
아니. 이건 어처구니없는 트집이었다. 아롈은 애꿎은 시녀 대신 자신을 책망했다.
병신. 바보. 멍청이.
더 잘 보이고 더 예쁘게 보이지는 못 할망정 계속 실수만 한다. 시아버지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달달 떨지만 말고 조금 더 똑똑하게 대처했더라면. 당당하게 내가 잘못한 게 무언데 그리 핍박하느냐 허리를 폈더라면. 무슨 죄가 있어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런 대우를 참아냈단 말인가. 목소리 높여 대들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만한 먹잇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보여줬어야 했다.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그 자리에서 배운 것조차 모두 잊어버렸는지. 조부의 냉랭함과 그리 다를 것도 없었는데. 필리프가 알면 또 한바탕 난리를 치겠지. 그는 아롈이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주길 바라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손바닥에 반달 모양의 자국이 패이고 진물이 고였다. 이 정도 아픈 것은 사치였다.
아롈은 방문객도 거절하고 남편도 오지 말라고 전갈을 보낸 채 계속 잠을 청했다. 간만에 혼자 침대를 쓰니 잠은 잘 왔다. 사흘째가 되자 몸이 씻은 듯이 나았다. 오히려 푹 잠을 잔 게 간만이라 가뿐하기까지 했다.
시중을 드는 사람이 많으면 칭병(稱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치 없는 시녀-클레르 드 뤼시용-가 세시안이 보낸 시종에게 다 나으신 것 같다고 대답해버린 탓에 세시안은 전갈을 보냈다. 괜찮다면 정의관으로 와달라고.
아롈은 정의관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빈틈없이 치장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