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무더기와 수수께끼 (가제) (14) (2)
앤은 다른 시녀들과 교대하여 혼자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하녀가 방에 식사를 가져다주겠지만 시녀들이 사용하는 식당은 또 하나의 사교장이었다. 너무 오래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뒷말이 떠돈다.
연회가 없는 날조차 항상 빈틈없이 꾸미고 손님을 접대해야 하는 이블린의 특성상 조식을 들러 온 시녀들의 옷차림만 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예식이나 연회에 어울리는 성장(盛裝)들은 아니었으나 바로 그렇기에 더 어려운 법이다. 과하게 꾸미면 비웃음을 사고 그렇다고 정말 편하게 나오면 경멸받는다. 아무렇게나 다녀도 어여쁜 여인이란 정말 한 줌의 한 줌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필사적으로 자연스러운 미를 연출하는 것이다.
앤은 자리에 앉아 가볍게 빵 한 조각을 먹고 일어섰다. 입맛이 없었다. 허리를 꽉 졸라서일까. 아니면.
"라루에트 양!"
아롈의 결혼식에서 보르디 대공비가 그렇게 부르고, 그녀의 손녀인 소피가 그렇게 따라 부르면서 이블린에서는 반쯤 공식이 되다시피 한 이름이었다. 앤은 다소곳하게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녀는 분명 리젤로트의 시녀였다. 시녀는 환하게 웃었다. 아마 백작 부인이라고 했던 것 같다. 당연히도 그녀와는 친분이 없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참 좋네요. 마담 라 세르께서는 아직 편찮으신가요?"
"쾌차하시어 거동에 불편함은 없으신 듯하옵니다. 전하께 마담 리젤로트께서 부인을 통해 안부를 물으셨다 전해 올리겠습니다."
"예, 그럼 다음에 뵙지요."
부인은 앤을 스쳐지나가며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앤은 엉겁결에 주먹을 꼭 쥐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뾰족했다. 그녀는 제 방에 급히 돌아가 주먹을 폈다.
알밤만한 다이아몬드가 눈부신 빛을 뿜었다.
아롈은 사흘간 굶어 납작해진 배를 꽉 졸라매고 수척해진 얼굴에 분을 잔뜩 바른 다음 방을 나섰다. 사라판 대신 짙은 남빛 옷을 입고 보석으로 장식해서 차림에는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러나 걸음을 당당하게 걸으면서도 속으로는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비관을 나서서 정의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작게 숨을 들이켠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없을 터였다.
정의관으로 두어 발짝 들어가자 대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있던 남자가 걸어왔다.
“아, 왔군요.”
아롈은 남쪽에 있는 내내 ‘먼저 말을 하지 않으면 타인과 대화를 할 일이 없다’는 규칙에 익숙해져 있어서 갑자기 튀어나와 인사를 하는 세시안에게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전하.“
세시안은 물 만난 고기처럼 아롈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어찌나 아무렇지 않은지 하마터면 술자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뻔했다.
벌써 아롈을 보는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의관에는 생각보다 여자가 많았다. 고급 창부들, 연인이나 가족들, 혹은 심부름 온 시녀들. 황제에게 불려갈 때에는 긴장감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남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문. 소문. 지긋지긋한 소문. 그들 중 누군가는 황제에게 달려가고, 또 누군가는 필리프에게 달려가겠지.
사 층에 도착했다. 완전히 대칭형으로 생긴 건물이라 정의관의 집무실이 어디에 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롈의 응접실에 해당하는 곳의 문을 세시안이 열었다.
이블린에서 금박 장식이 없는 방은 또 처음이었다. 나무 냄새와 종이 냄새가 났다. 서류가 잔뜩 쌓여있는 커다란 책상과 책장이 놓여있었고, 다른 쪽에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자리가 있었다. 긴 의자와 낮은 탁자, 간단한 회의를 위한 높은 탁자가 모두 갖춰져 있다.
마음에 들었다. 이 방에는 책상이 있고 서류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리젤로트가 공들여 꾸며놓은 응접실보다는 훨씬 편안한 공간이었다.
“앉아요.”
세시안은 회의용으로 보이는 의자를 빼주었다. 북쪽에는 없는 예의였으나 미셸에게 배워 그럭저럭 아무렇잖게 앉았다. 그는 아롈의 건너편 바로 옆에 앉았다. 움츠러드는 어깨를 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오늘 다른 일정이 있나요?”
“없습니다.”
누가 취소해버리는 바람에.
“그럼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손이 아롈의 뺨을 쓸어내렸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금은 빈틈이 없다. 푹 쉬어서 몸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다. 머리는 맑고, 심혈을 기울여 치장하여 사라판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아롈은 순식간에 부끄러워졌다.
낮의 햇빛을 머금은 눈은 밤과는 완전히 달랐다. 눈가의 잔주름이나 피부의 색깔이나, 작은 점이나, 입술의 모양 등이 환하게 보여 낯설었다. 이렇게 생겼던가.
똑똑똑.
시의 적절하게 노크가 들렸다. 뺨에서 손이 떨어졌다. 시종이 들어와 따뜻한 차와 달콤한 과자를 놓고 갔다. 아롈은 은제 포크로 파이를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겉에 설탕을 바르고 표면에 잎사귀 모양을 장식한 갈레트(galette)는 아침을 굶은 입에는 황홀할 정도였다. 허겁지겁 먹고 싶은 것을 참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전하. 저 역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용건을 지금 말씀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예. 말해요.”
손바닥에 내려앉은 딱지가 터졌다. 아롈은 가슴을 훑어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 날 밤엔 실례했습니다.”
“글쎄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세시안은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딱히 실례라고 할 만한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무얼 말하는 거지요?”
“제가 그만 취해서.”
그렇게나 주정을 부렸는데. 기억이 안 나는 동안 무슨 말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롈은 취중에 마법을 쓰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지만-마법을 쓴 다음 느껴지는 특유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은 확신할 수 없었다.
“실례되는 말씀을.”
문득 세시안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기억이 안 나는군요?”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곡을 찔렸다. 세시안은 쿡쿡 웃었다.
“술 마셔본 적 별로 없지요?”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숙취 때문에 고생했겠네요. 사실 꾀병 때문에 오지 말라는 줄 알았습니다만 저야말로 실례되는 생각을 했군요.”
이 무슨 창피일까. 목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화를 내려고 했는데 멍청하게 먼저 취해버리고, 것도 모자라 기억도 못 하는 추태를 부리고. 아롈은 허리를 펴고 턱을 당겼다. 한 번 실수를 한 것만으로도 과하다.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같은 일이 없을 겁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세시안의 웃음은 그 색이 바뀌어 있었다. 유쾌함에서 난감함으로.
“다시 말하지만 아렐르는 부적절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만에 하나 적절하지 않은 말이 나왔다고 해도 부부 간에 사석에서 일어난 일. 고개 숙일 이유가 있을까요.”
그는 대화를 한 박자 쉬려는 듯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굳이 마음이 편해지고 싶다면, 앞으로 술을 무리하게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겠어요?”
무지는 아롈을 한없이 저자세로 이끌어갔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부적절한 일이 없었다는 말은 틀렸다. 취하지 않았다며 매달린 일만으로도 충분했다.
“맹세하겠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손톱으로 딱지를 전부 벗겨냈다. 쓰라리다. 대화를 곱씹었다. 그러다가 희한하게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아렐르?”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소개하지 않았던가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렐르가 아니라 아롈이다. 아롈도 근본이 없는 희한한 애칭이었지만-옐레나의 애칭은 보통 레나, 예나, 레니냐 등이다- 그걸 남쪽 식으로 읽은 아렐르는 훨씬 이상했다. 크리스틴이 부를 때에도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묵직한 남자 목소리로 듣는 애칭은 세 배쯤 괴상했다.
“그렇게 부르면 안 되나요?”
술에 취했을 때도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착각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당연히 괜찮습니다만, 아렐르가 아니라 아롈입니다.”
“음. 아렐르. 아렐르. 아렐르.”
몇 번이고 불러보더니 어려운 발음이라며 어깨를 으쓱하고 웃어버렸다. 아롈은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이런 건 닮지 않아도 될 텐데. 미셸을 미셀르라고 발음하지는 않으면서 왜 아롈은 발음을 하지 못 하는가.
하지만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 자체에 두근거리는 사람이 여기에서 제일 우습다.
아롈은 조소를 머금고 차를 홀짝였다. 빈속에 차가 들어가자 속을 긁는 듯했지만 오히려 울렁거림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전하. 이제 용건을 말씀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를 왜 부르셨는지.”
“아, 그럴까요.”
아직까지 발음을 웅얼거려보고 있던 세시안은 자세를 바로 잡았다.
“다다음 달에 대회의가 있는 건 알고 있나요?”
“예. 리젤로트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대회의 동안에는 항상 밤마다 연회가 열리는 것도 말해주던가요?”
“아뇨. 처음 듣습니다.”
“원래는 황후 폐하께서 주관하셔야 하는 일이지만 알다시피 모후께서는 병환이 깊으셔서 거동하시기가 어렵습니다. 리젤로트나 오를레앙 대공비가 지금껏 도와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둘 다 여의치 않을 것 같군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뛰었다. 세시안은 아롈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상처가 다른 사람의 살에 닿아 쓰라렸다.
“아직 이블린이 낯설고 힘들 테지만, 도와주겠어요?”
당장이라도 예, 라고 하고 싶었다. 그냥 꽃 같은 장식물을 벗어나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설렜다. 아롈은 세시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폐하께서는 알고 계시는 일입니까.”
“황후께서 편찮으십니다. 그리고 아렐르는 제 아내로서 그 다음 지위에 있는 사람이지요. 굳이 허락받아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 사람은 모르는 걸까.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아니, 원래 연회를 준비하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정의관의 일은 아니지 않은가. 무슨 문제가 있을까.
“노력하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노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롈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증명해보이겠노라고. 눈이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