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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8. 열병 (가제) (2)


 “다 했어요?”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그간 하도 당해 숙달된 탓이었다. 세시안이 소리도 없이 들어와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것은 이제 익숙했다. 왜 허락도 안 받고 들어왔느냐고 볼멘소리를 해도 그는 남쪽 남자다운 유들유들함으로 미소 지으며 넘기곤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당연해졌다.

“아뇨, 아직입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허리가 시큰거렸다. 엉덩이도 눌린 듯이 아팠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거르고 아침을 먹자마자 앉아 한 번도 일어서질 않았지. 아롈은 희미하게 웃었다.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방 안이 밝았다. 아직 해가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이 시간이면 방이 어둑하고 글씨가 잘 안 보여야 정상이었다. 어느 새 샹들리에가 켜져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복닥이며 자기 일을 하는데 몰랐단 말인가.

남편은 딱히 으스대거나 생색을 내는 대신 조용히 웃었다.

“그냥요.”

이 대답도 항상 비슷했다. 세시안은 아롈의 손을 잡고 반지의 진주 위에 입술을 댔다. 심장이 당연한 듯이 두근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썹을 찡그렸다.

“어디 아파요?”

“아뇨. 괜찮습니다만.”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었다. 달아오른 이마가 서늘해져서 기분 좋았다. 그는 한참을 대보고 있더니, 정말이지 별 것도 아닌 내용을 세상이 멸망하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라도 된 양 무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열이 있는데요.”

“그렇습니까.”

미열 정도야 항상 있는 일이 아닌가.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의사를 부르는 게 좋겠어요. 식사는 침실로 가져오라고 하지요.”

아롈은 기겁했다.

“월경 중이라 그런 것뿐입니다.”

“월경 중에 열이 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요.”

아롈은 달거리 주기가 제멋대로였다. 초경을 한 지 얼마 안 된데다가-어머니에 의해 유폐 당했을 때 시작했다- 심기가 불편한 일이 있으면 그대로 거르곤 해서, 시작한 지 일 년 가까이 됐는데 이번이 네 번째 월경이었다. 혼행길 내내 피가 비친 것은 한 번 뿐이었다.

시집온 지 한 달 반이 되도록 월경이 없자 몇몇 시녀들은 은근히 임신이 아니냐며 설레발을 쳤지만 며칠 으슬으슬하더니 그대로 피가 터졌다.

“저는 원래 그렇습니다.”

사실 월경 중에 열이 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세시안의 눈빛을 보건대 고뿔 같은 병 이름을 하나라도 꺼냈다간 정말로 손목을 잡고 아롈을 의사에게 데려갈 듯했다.

“그런가요.”

“예.”

남쪽 의사는 멀쩡한 사람 이를 생으로 뽑고, 치료랍시고 손을 베어 피를 줄줄 뽑아대는 돌팔이라는 북쪽의 속설을 충실하게 믿고 있던 아롈은 눈을 딱 감고 우겼다. 월경 중에 열이 나는 여자도 어딘가에 있을는지 누가 아는가.

“알았어요. 며칠 보지요. 그래도 식사는 여기서 할까요?”

아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세시안은 지금까지 거의 매일 밤을 아롈의 침실에서 보냈고, 그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정사를 나누지 않고 한 침대에 든 날도 분명히 끼어 있었다. 피곤하다든가, 아롈이 아프다든가. 그러나 몸이 정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고 갈 건가. 아니면 식사만 하고 간다는 뜻인가?

대답을 잠시 머뭇거리자 바로 재촉하듯이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아파서 오늘 밤은 혼자 쉬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괜찮습니다.”

아차.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왔다. 아롈은 새빨갛게 익어버린 채로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늦었다. 세시안은 웃으며 아롈을 끌어안았다. 품은 포근했다. 아롈은 턱을 어깨에 괴고는 멍하니 생각했다.

이래도 덥지 않고 시원한 걸 보니 열이 있긴 한가보다. 원래 세시안의 몸은 항상 뜨겁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세시안은 아롈을 끌어안은 채로 물었다.

“오늘은 뭘 했어요?”

“어제와 별다를 것은 없습니다만.”

아롈의 일상이야 누굴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거나 아니면 앉아서 연회준비랍시고 서류와 씨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답은 항상 똑같을 것을 세시안은 매일 저녁 아롈을 보면 꼭 이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찾아온 손님이 없어서 혼자 서류를 봤습니다.”

“리즈는 아직도 두문불출인가요?”

“예.”

아롈이 리젤로트를 본 것은 정의관에서 황제가 호출했던 그 날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리젤로트는 모든 행사에 불참하고, 모든 손님을 거절한 채 침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런 면에서는 이블린이 지긋지긋하다. 마담쯤 되면 방에 언제 나와서 누구의 방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언제 다시 나왔는지가 널리 알려지는 것이다.

“그 아이도 상심이 크겠지요. 어렸을 때부터 결혼은 당연히 미셸과 하는 줄로 알았으니까요.”

뭐라고 첨언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렇습니까, 안 됐군요, 다른 사람이 나타나겠지요. 어떤 말도 그리 적절하지는 않았다. 특히 미셸의 결혼상대로 낙점된 이가 소피인 바에야. 아롈은 소피에게 그 소리를 듣고는 크게 놀랐지만 타 가문의 혼사에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남쪽의 암묵적인 규칙을 존중해서 입을 떼지 않았다. 아마도 이 혼사는 필리프가 오래도록 준비해왔으리라. 아롈이 망칠 수는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인 세시안은 아롈을 놓아주고는 종을 울렸다. 앤을 부르는 종이 아니라 하녀를 부르는 종이었다. 하녀가 달려와 무릎을 꿇고 명령을 받아갔다. 아롈은 발이 아파 의자에 도로 가서 앉았다. 세시안이 자연스레 옆자리에 앉아 손을 잡고 입 맞췄다.

남쪽 남자들은 여자 손만 잡았다 하면 입술을 대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건지, 독특한 남편을 만난 건지, 아니면 아롈의 몸에서 달콤한 향기라도 나는 건지 모르겠다. 세시안은 아롈의 손만 잡았다 하면 손등이든, 반지의 진주 위든, 손가락이나 손바닥이든 입술을 대는 버릇이 있었다.

“내일 누굴 만날 일 있나요?”

“없습니다.”

없다는 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새삼스레 왜 다시 묻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내일 낮은 제게 주겠어요?”

“오찬이라도 함께 하시렵니까?”

“안타깝게도 내일 오찬은 선약이 있어요. 황립 과학발전협회 회원들과 함께 하기로 했지요. 이번에 대단한 발견을 했다고 해서 치하할 겸. 끝나고 보기로 하지요.”

“무슨 발견입니까?”

“그걸 들으러 가는 거라서. 듣고 오면 전해주지요.”

“재미있는 이야기이길 바랍니다.”

“그러게요. 틀림없이 재미는 없을 거예요. 너무 기대하지 말아요. 다들 괴짜들이니까.”

그렇다. 아롈이 북쪽에 있었을 때 돈 달라고 징징대는 수많은 서류를 봐왔지만 과학한다는 사람들의 후원을 원하는 탄원서만큼 황당한 사연을 보내는 집단은 손에 꼽았다. 비슷한 것을 만들어 물속에 있는 자그마한 생명체를 보고 싶으니 돈을 지원해달라는 신청서는 그 중 압권이었다. 아니, 대체 눈에도 안 보이는 생명체-있기나 한가?-를 똑똑히 보고 그림을 그려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 게다가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 데에 다이아몬드가 필요하다고 말해?

세시안은 빈손을 뻗어 아롈의 귓불을 건드렸다.

“그런데 못 보던 귀걸이로군요.”

“새로 맞췄습니다.”

앤이 오늘 찾아온 루비 귀걸이는 생각보다도 훨씬 앙증맞아 아롈을 당황하게 했다. 혹시나 어울리지 않는다 할까봐 두근거렸다. 사자마자 뜯어 귀에 달았다. 노란 옷이니 확 튀리라 생각했다. 매일 매일은 시험이었다.

“역시 미인이라 아무 거나 걸쳐도 잘 어울리는군요. 예뻐요.”

쓸모없다고 여기던 반반한 낯짝에 감사하게 된 건 다 이 사탕발림 탓이었다. 어머니를 닮은 얼굴을 거울에서 볼 때 곱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얼굴로 사람을 잡을 수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한탄했을 뿐이었다. 미모로 따지면 어머니가 헬레네보다 더 우월했는데도 아버지는 헬레네를 사랑했다. 차라리 아롈은 타고난 금발이며 녹안, 이목구비가 죽은 이반 파블로비치를 닮았다는 이유로 알렉산드르의 흥미를 끌 수 있었다는 점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 때는 예쁘다는 말이 이렇게나 달콤하고 자랑스러운 말인 줄은 미처 몰랐다. 잘 어울린다, 어여쁘다 하는 칭찬이 한 마디 한 마디 쌓일 때마다 거울 보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다. 다만 일 초라도 시선을 더 끌고 싶어서. 비록 알량한 외모나마 마음에 든다 말하고 웃어주는 목소리가 두근거려서.

아롈은 심장 소리가 부끄러워 손끝을 움츠렸다. 설마하니 들릴까. 들리면 안 되는데.

그 걱정은 식사가 나와서 마주 앉아 칼질을 하는 도중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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