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병 (가제) (3)
용 두 마리는 산처럼 거대하다.
파란 용이 꼬리를 흔든다. 새하얀 용이 이빨을 드러내고 날개를 펼친다. 긴 꼬리를 휙 휘두르자 자비관이 쾅 무너져 내린다. 사람들이 짓이겨져 핏물이 배어나온다. 흰 용이 그 위로 고개를 내밀고 한 명 한 명 주워서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다. 파란 용은 삼킨다. 아롈은 소리 질렀다.
그만하라고. 제발 그만하라고.
하지만 목이 쉬도록 울부짖은 보람도 없이 정의관도 박살났다. 그리고 정의관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안 돼!!!’
거대한 절망 앞에선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그런 소녀 앞으로 파란 용이 불쑥 머리를 내밀고 웃었다. 구슬처럼 투명한 목소리로 깔깔깔 비웃었다.
[내가 그냥 사라진 줄 알았어? 바보 아니야?]
“윽.”
아롈은 자연스레 잠에서 깨어났다. 시체처럼 바짝 긴장한 어깨가 아픈 것이며 이마에 땀이 맺혀있는 것은 이제 몸에 밴 감각이었다. 원체 악몽을 자주 꾸지만 요즘은 매일 용들에 관한 꿈이었다. 계속 해서, 계속 해서 조금씩 바뀌지만 항상 끝은 비슷했다. 파괴, 죽음, 비난.
손가락으로 목을 더듬어 걸려있는 줄을 확인했다. 동그란 보석이 손에 잡혔다. 그제야 안심한 아롈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창문만 보아도 일어날 시간이 안 되었다. 세시안은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그는 아직 깊이 잠들어있었다. 숨결이 관자놀이에 달라붙었다. 몸을 꼭 끌어안은 팔도 단단하고 따뜻했다. 아롈은 어미 고양이에게 안긴 아기 고양이처럼 안심해서 다시 잠들었다.
“어마마마.”
미네트는 탁자에 엎드려 잠들어있는 황후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손에 카드를 꼭 쥔 채로 잠들어 있었다. 검의 3. 심장을 찌른 세 개의 검이었다.
“어마마마. 일어나세요.”
황후는 눈을 찌푸리고 몸을 일으켰다. 미네트는 아마도 저릴 팔을 정성스레 주물렀다.
“들어가서 주무셔야지요.”
“다른 부인(마담)들은 다 어디로 갔니?”
“벌써 다들 돌아갔답니다. 해가 떴어요.”
“인사도 하고 가지 않다니!”
“모두 난처해했어요. 어마마마께서 잠드셔서 도통 깨어나지 않으시던 걸요. 피곤하시면 일찍 끝내시지 그러셨어요.”
“몇 판이나 졌단다. 다들 통 예의가 없어. 한 판 정도는 져주는 게 예의 아니니?”
“그럼요. 다음에 오면 다른 걸로 혼을 내주세요.”
미네트는 탁자에 널려있는 루아르 금화를 도로 가죽 주머니에 쓸어 담고 카드를 모아 갑에 넣었다.
“다음엔 주사위 놀이를 할 거란다. 전부 박살내고 보석들을 다시 찾아올 테야.”
“그러세요. 그러시면 되지요. 자, 일어서세요.”
황후는 미네트의 팔을 짚고 일어섰다. 작은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황후는 크게 절뚝거리며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침대에 앉았다. 어린 아이처럼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미네트는 미리 데워둔 물을 부은 대야를 가져다 놓고 어머니의 신발을 벗겼다. 꼭 끼는 굽 높은 신발을 벗기자 발이 훤히 드러났다. 퉁퉁 부은 왼발은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오른발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완전히 하나의 살덩어리 같은 발에는 보랏빛 멍이 여기저기 들었고 끄트머리에는 네 줄기의 상처가 나 있었다. 아주 오랜 상처인 듯 보였다.
까만 피와 누런 고름이 섞여 악취를 풍겼다. 미네트는 더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천천히 그 발을 닦았다. 그 동안에도 황후는 정신없이 떠들었다.
“너는 내가 카드놀이로 소일하는 게 못마땅해서 죽겠지? 미간에 벌써 주름이 졌구나. 그래도 내가 심심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일단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자식들이라고 있는 것들이 생전에 찾아올 생각을 않잖니. 한 명도 곁에 붙어있는 것이 없으니 원. 몇 명을 낳았는데 다들 헛키웠어.”
미네트는 고개를 숙이고 서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발을 닦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진물을 꼼꼼하게 닦아낸 미네트는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걷어내고 얇은 천으로 발을 싸맸다.
“무료하시다면 꿈을 꾸시면 되잖아요.”
“꿈에서 뭘 본단 말이냐. 엘리엔 그 년이 얼마나 잘 사는지 구경할까? 여제의 옷을 두르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면 내 속이 참 잘도 편하겠구나! 하!”
여기에서 말하는 엘리엔이란 미네트의 올케 언니이자 황후의 며느리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보르디 대공녀이자 얼마 전 코시카 여제로 즉위한 옐레나 1세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네트는 알고 있었다. 황후가 종종 옐레나 여제의 삶을 엿보고 즐거워했다는 것을. 그 대가로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자면서도 꿈에 들어가 저주의 말을 퍼붓고 나왔다는 것을. 마르그리트 황후는 그런 말들을 자랑스레 미네트에게 떠들곤 했다.
어리고 예쁘다고 그렇게 젠 체를 하더니 결국 팔자를 보라며. 자신은 황후요 그 계집애는 대공비, 혹여 아들에게라도 황위가 바로 넘어갔다간 평생 황후는 못 될 거라고 숨이 넘어가게 웃곤 했다.
“아니면 네 오라비 신방이라도 엿보리? 내 아들이 그 년의 딸년이랑 알콩달콩 지내는 걸 내 눈으로 보느니 눈을 찌르고 말지.”
“사이가 좋은지는 어찌 짐작하시고요.”
사실 사이는 좋았다. 세시안이 뻔질나게 자비관을 드나든다는 것은 이젠 얘깃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
황후는 입술을 삐죽였다.
“뻔하지. 난데없이 뺨 맞았던 이 어미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먼 곳에서 시집온 어린 계집애만 불쌍하다고 싸고돌 것 아니냐. 하여튼 사내들이란 젊든 늙든 예쁘고 어린 여자가 불쌍한 척을 하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미네트는 대답 없이 발을 다 싸매고 매듭을 지었다. 황후는 다리를 침대 위로 올리고 몸을 누였다. 미네트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생각만 하면 가서 머리털을 다 뽑아놓고 싶은데 내가 아들의 면을 봐서 참는 거란다.”
“네, 그럼요. 이만 편히 주무세요.”
“거스를 만나러 갈 거란다.”
아까까지 꿈을 싫다고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는 언제고, 황후는 온화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꿈을 꾸러 가는 것이다. 미네트는 이불을 토닥이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세상은 정말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