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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8. 열병 (가제) (4)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은 아침부터 한껏 들뜬 채 자비관을 나섰다. 드디어 마담 르와이얄, 황제의 장녀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녀는 침묵 수녀원에 있을 때에도 마담 르와이얄이었다. 그것은 부르고뉴 대공비인 둘째 오거스틴이 마담 르와이얄의 칭호를 가져가지 못 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수녀원에서 지내는 동안 변한 세상을 따라잡는 것만도 바빴다. 친구가 있다면 조금 더 편했겠지만 원래 친하던 숙녀들은 가문이 실각을 해서 낙향하거나, 외국으로 시집을 가거나, 로렌에서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를 낳느라 바빴다.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소녀들은 대부분 천연두가 돌던 시절 채 데뷔조차 하지 않던 어린아이들이었다.

자연히 시녀들의 얼굴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그러나 돌아온 지 두 달 가까이 된 지금 준비는 거의 끝났다.

오라버니이자 세르인 세시안은 이제 공식 만찬 등에 참석하고 싶다는 크리스틴의 부탁을 흔쾌히 승낙했다. 오찬에 같이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크리스틴은 뛸 듯이 기쁜 나머지 채 해가 뜨기 전부터 일어났다.

뭘 잘못 먹었는지 희미해진 흉터 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여드름도 그녀의 기분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수선화 향 오일을 푼 세숫물에 세수를 하고, 수도원에서 만든 글리세린 크림을 잔뜩 얼굴에 발랐다. 번들거리는 크림이 얼굴에 흡수되자 백분을 팡팡 발라 얼굴을 희게 덮고 붉은 연지를 발랐다.

수녀원에서 등께에서 자르는 바람에-긴 머리카락은 허영심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 아직 덜 자라난 머리카락은 풀어 내리는 대신 둥그렇게 말아 올렸다.

복장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연회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복장이어서 석찬도 아닌 오찬으로는 과했다- 세시안의 팔짱을 끼고 태양의 홀로 들어가는 기분은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1층에 있는 태양의 홀은 정의관에 있는 가장 큰 식당 중 하나였다. 무려 백 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태양의 홀은 꽉꽉 들어차있었다.

“세르, 그리고 마담 르와이얄 드십니다!”

세시안의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사내들이 주르륵 일어나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크리스틴은 뽐내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현재 이블린에서 세 번째로 지위 높은 여성이었다.

어린 올케를 동반해야 할 자리에 그녀 혼자 있다는 것은 자부심을 더욱 부추겼다. 크리스틴은 벌써부터 들떠서 환하게 웃었다.

살이 찔 거라는 걱정도 잊고-이블린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수도원 생활을 하는 동안 숙녀들의 평균적인 허리둘레가 한층 가늘어진 것을 보고 경악해야 했다- 신나게 포크와 나이프를 놀렸다. 입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겉을 바삭하게 지진 농후한 거위간이라든가 안에 통통한 보리를 가득 채운 고소한 자고새 같은 입에 단 음식보다 더 좋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귀에 다디단 칭찬이었다.

오찬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점잖은 중년의 신사들이었다. 크리스틴이 요즘 그들이 한다는 연구에 관심을 보이자 아주 쉬운 말로 설명해줄 정도의 지성을 가진 것은 물론이고, 크리스틴을 기분 좋게 띄워줄 만큼의 처세술을 지닌 자들이었다.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자들은 대부분 아주 부유한 부르주아 계층이 아니면 독특한 취미를 가진 귀족들이었으므로 그들 사이에서 은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크리스틴은 순식간에 흐물흐물해졌다. 호호 웃으며 해적들의 발호와 환율 변화로 인한 투자 실패로 인해 기금이 모자라다고 울상을 짓는 학회장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마담 르와이얄로서 크리스틴이 받는 연금은 상당한 액수였다.

후식으로 바닐라를 잔뜩 넣은 까늘레가 나왔다. 다소 딱딱하고 꾸덕한 껍질을 자르자 검은 점이 콕콕 박히고 조밀한 속이 드러났다. 크리스틴이 작은 포크를 들고 달려들기 직전 낮은 목소리가 주의를 환기했다.

“자, 그럼 이제 들어보고 싶소만. 대체 무슨 발견을 했기에 이토록 흥분했는지. 나라의 홍복이 될 만한 발견이오?”

여동생이 신이 나서 떠드는 동안 조용히 웃으며 듣고 있던 세시안이었다. 그는 오찬 내내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만 참여할 뿐 대화에 거의 끼어들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부드럽고 풍부한 음성에는 무게감이 실렸다. 크리스틴은 식기를 내려놓고 시선을 보냈다.

“예, 전하. 그만 보여드리는 걸 잊었습니다.”

그리고 박사가 보여준 물건은 크리스틴으로 하여금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게 했다.

 

아롈은 양산을 접어 앤에게 넘겼다. 도서관은 본관에서 걸어서 십 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재빠른 남자가 편한 신발을 신고 달린다면 삼 분 안에도 주파가 가능하겠으나 아롈은 발에 꼭 끼는 신발을 신고 있어 느긋하게 걸었다.

세시안이 가장 자주 부려 얼굴을 익힌 시종인 벨망 경의 얼굴을 본 아롈은 바싹 긴장했다. 또 약속이 취소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는 아롈에게 무릎을 꿇어 인사를 하고는 쪽지를 전해주고 갔다.

쪽지를 펼쳐보니 익숙잖은 글씨체로 약속에 늦을 것 같으니 먼저 가서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장소가 쓰여 있었다. 왜 하필 도서관일까.

도서관 앞에 도착한 아롈은 앤을 제외한 시녀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앤은 도서관을 마음대로 둘러보라고 명한 다음 계단을 올랐다. 도서관은 커다란 다각형의 건물이었는데, 바닥은 융단이 깔려있지 않아 발소리가 그대로 울렸다.

도서관 안에는 사람이 몇 명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은 황실이나 대공가의 허가증을 받아 황실 소장 도서를 열람하러 온 학자들-아마도 집안에 도서관을 갖출 만큼의 재력은 없을-이거나 주인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책을 빌리러 온 시종과 시녀들이었다.

후자는 아롈을 알아보고 무릎을 꿇었으나 전자인 자들은 그저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이는 약식 예법만을 표했다. 이블린 도서관에서 화려하게 꾸미고 직접 돌아다니는 어린 소녀가 누구를 의미하는지조차 생각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슬리기는 했지만 딱히 아는 얼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천한 자들이어서 언성을 높일 정도로 귀찮은 짓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롈은 아랑곳 않고 삼층까지 올라갔다.

삼층은 유독 두꺼운 책들이 많았다. 양피지로 된 고(古) 서적이 모여있기 때문이었다. 제지 기술이 발달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펄프로 된 종이는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었다. 겨우 몇십년 동안 만들어진 책들의 양은 수백 년 동안 양피지며 아마포로 만들어왔던 책들을 단숨에 넘어섰다.

책장을 하나하나 세면서 걸었다.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있는 책장부터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열일곱.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아롈은 두리번거리다가 계단 앞으로 돌아가 수를 다시 세었다. 처음부터 다시 열일곱. 역시 없다.

아롈은 오도카니 서서 고민을 시작했다. 설마 앉을 곳도 없는 이 책장 앞에 서 있으라는 뜻은 아니겠지. 설마. 세시안은 산책을 같이 할 때에도 십 분마다 한 번씩 아롈에게 다리가 아프지는 않은지 묻는 사람이었다.

그럼 설마 책장에 암호라도 있는 걸까. 미셸이라면 몰라도 그런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책 제목의 첫 글자나 마지막 글자를 쭉 이어보아도 규칙 따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줄의 열일곱째 책을 뽑아서 3페이지의 17번째 줄을 읽어보거나, ​‘​도​서​관​(​b​i​b​l​i​o​t​h​è​q​u​e​)​’​을​ 이용해 글자 치환 방식을 적용해보는 등의 온갖 암호 해독 방식을 써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당연한 걸까. 누가 단순한 약속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겠어.

아롈은 책을 도로 꽂아놓고 등을 기댔다. 힘없이 웃음이 나왔다. 글자 치환 순서를 써놓은 해독표 없이 머릿속으로 짜 맞추어 해독하는 것은, 아무리 익숙해진다고 해도 어렵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아롈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벽 쪽에 서 있는 책장이 희한한 모양으로 겹쳐있었다. 그 쪽으로 다가가 보자 위화감은 더 커졌다. 다른 책장들은 죄다 일정한 각도인데, 유독 그 두 개만 ㅅ자 모양을 이뤘다. 짚이는 곳이 있었다.

-것도 어른들에게 들킬까봐 비밀장소에 잘 숨겨두었습니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는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작은 틈이 있었다. 치맛자락을 추슬러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작은 공간이 나왔다.

아롈은 조금 웃었다.

어른 두 명이 앉으면 딱 맞을 듯 작았지만 아이들은 서너 명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장을 사이에 둔 벽에는 마침 창이 나 있어서 어둡지 않았다. 창밖 멀리 본관이 보였다. 바닥에는 이교도들의 양탄자와 방석들이 놓여 있었다. 아주 많이 낡았지만 최근에 손질한 것처럼 보였다.

방석을 하나 깔고 등에 벽을 댄 채 앉았다. 책장의 각도가 아주 교묘해서 바깥에서는 안이,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이 비밀장소는 누가 만들었을까.

무릎을 끌어안은 아롈은 즐겁게 이 꽉 들어찬 공간을 구경했다. 잡동사니들이 가득했다. 손때 묻은 헝겊인형, 조금 떨어져 바싹 말라붙은 과자부스러기. 둥글게 뭉쳐놓은 종이를 펴보자 미셸이 자주 읊던 시가 몇 편 나왔다.

이곳은 마치 회랑 같은 곳이었다.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지금도 소피야 황후의 초상화 밑에는 알렉산드르가 가출할 때 아롈에게 입히곤 했던 옷과 짐이 남아있었을 터였다.

아롈은 눈높이 근처에서 검은 가죽으로 표지를 만든 전집을 발견했다. 한 권 꺼내어 펼쳐보았다. 양피지로 된 구식 책이었다. 페란토와 갈리아가 나란히 적혀 있는 서사시집.

그랬구나.

수수께끼가 하나 풀렸다. 눈을 감았다. 오후 볕이 뒤통수로 따끈하게 내리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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