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병 (가제) (5)
세시안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도서관 계단을 올랐다. 약속 시간은 두 시. 지금은 다섯 시. 벨망 경을 보내긴 했으나 ‘조금’ 늦는다고 했지 저녁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쯤에야 오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눈꼬리를 바싹 세우고 고양이처럼 토라진 표정으로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따위의 책망의 말을 내뱉는 신부의 얼굴을 상상하자 갑자기 억울해졌다.
설마 박사들이 가져온 것이 용의 둥지 화석일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크리스틴은 알껍질 사이로 팔을 내밀다가 그대로 굳어진 용란(龍卵)을 보고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버둥거리며 울부짖은 채로 굳어진 몸체는 누가 봐도 끔찍한 모양새이며 숙녀가 볼 만한 물건은 아니긴 했다.
학회장은 이것이야말로 용이 마법 같은 사이한 수법을 얻은 것은 악마의 술수이며 원래의 용은 날개도 없고 용암에 휩쓸려 죽을 수 있는 나약한 주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라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세시안은 골치가 아팠다.
다른 박사도 어느 모험가가 이것을 신대륙에서 발견해서 가져왔다고, 용을 물리친 자들의 자손인 황실에 바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며 은근히 판매 의사를 내비쳤다. 지금 당장 저 북해에 용이 살아 날뛰고 있다는데 이런 돌덩어리에 관심을 보일 시간은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얼마나 굉장한 발견일지에 대해서는 그리 기대하지 않았으나, 이렇게까지 흉측하고 쓸모없는 물건일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학회원들은 내심 실망한 듯 이 발견이 얼마나 생물학적으로 위대한 것인지, 용이 집단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거나, 도마뱀과 근연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등에 대해 열심히 떠들었지만.
크리스틴은 입술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것도 모르고 부들부들 떨었다. 도저히 혼자 돌아가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아내와 놀아줘야 한다는 이유를 대고 흥분한 여동생의 비난에서 도망칠 수도 없어 한참이나 이야기를 들어줘야 했다. 그러고 나니 지금이었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사람은 별로 없었다. 걸음이 빨라졌다. 설마 장소를 못 찾은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정말 무릎을 꿇고 빌어도 할 말이 없었다. 먼저 시간을 내달라고 한 주제에 늦다니.
그러나 소녀는 비밀 장소를 잘 찾아서는 그 안에 앉아 가만히 잠들어있었다. 흰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그늘 바깥으로는 연푸른 비단옷자락이 펼쳐져 이국의 여인들이 손톱이 닳도록 짠 붉은 융단 위로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꼭 원래 이 곳을 알았던 양 평화로웠다.
세시안은 긴장이 풀려 그녀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다리를 펴자 공간이 꽉 찼다.
“으음.”
이런. 역시 바로 깼다. 그녀는 조금만 바스락거려도 금방 잠에서 깼다. 아롈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세시안을 보고 물었다.
“몇 시입니까?”
“다섯 시 좀 넘었어요.”
“늦으셨군요.”
“미안합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딱딱한 목소리에는 투정이 약간 묻어났다. 세시안은 웃으며 손등에 입 맞췄다. 어김없이 손목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밤에는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하면서, 몇 번이나 살을 섞었는데도 가벼운 입맞춤을 하면 이렇게 부끄러워한다.
“늦어서 미안해요.”
유령처럼 창백하던 뺨에는 금세 핏기가 번졌다. 하지만 짐짓 아무렇잖다는 듯 목을 폈다. 이렇게 정돈된 냉정함 아래로 어린 소녀다움이 비칠 때마다 툭툭 건드려서 조금 더 보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훤히 드러나 있는 쇄골에 키스하면 금세 평정을 잃고 목까지 붉어질 텐데. 오늘은 요즘 자주 착용하던 청보석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얼음처럼 차갑던 목소리는 반쯤 누그러져 있었다. 세시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찬이 생각보다 많이 늦어진지라.”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이지만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롈은 더 묻지 않았다. 세시안은 왜 늦어졌느냐 등등의 말이 따라올까 무서워 얼른 들고 온 것을 내밀었다.
연둣빛 눈에 의아함에 깃들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열어보겠어요?”
그리고 세시안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눈부신 웃음을 보았다.
앤은 해양 생물에 대한 저서 몇 권을 빌려 들고는 입구에서 얼쩡거리며 아롈이 나오길 기다렸다. 지나가는 시종들이 앤을 알아보고 인사를 던졌다. 대부분 아주 수줍게 굴었던 오를레앙의 기사들-그들은 먼발치에서 인사를 건네고는 앤이 받아주면 후다닥 도망치곤 했다-과는 달리 그들은 아주 능숙하게 추파를 던졌다.
“라루에트 양. 이토록 아름다우신 숙녀께서 지성까지 갖추신 줄 미처 짐작치 못했던 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가끔 칭찬을 가장한 실언이 섞일 때도 있었으나 대부분 새나 꽃이나 보석에 비유한 말이 주를 이뤘다. 대부분은 대공가의 가신인 백작이나 남작가문의 자식들이었고, 가끔 후작이나 공작의 아들도 섞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던지고 간 이는 필리프의 장자의 시종으로서 자작 가문의 아들이었는데, 아롈의 투덜거림이 생각나서 그만 웃었다. 지극히 신분 높은 주인은 항상 백작(comte)이면 백작이지 자작(vicomte)이라는 이상한 작위는 뭐냐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는 앤이 자신이 마음에 들어 웃는 줄 알았는지 손목을 잡으려했다. 접촉이 부담스러웠던 앤은 움찔했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레 몸을 물려 돌아갔다.
그들에게 이러한 추파는 너무나도 일상이어서 특별히 상처받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냥 운 좋게 하룻밤을 보내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쩔쩔 맸지만 이제는 거절을 해도 아무런 죄책감이 남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던 앤은 세 시간이 지나도 아롈이 내려오지 않자 책을 가져다 놓고 다시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비관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발도 아팠다.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비관에 있는 자신의 방에 빠른 걸음으로 돌아온 앤은 몹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에퉤퉤. 너 잘 왔다. 어떻게 물을 이렇게 맛없게 탈 수가 있니?]
“벨타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