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병 (가제) (6)
세시안의 선물은 대부분 꽃이나 달콤한 과자였다. 그러나 이런 묵직한 상자에 그런 것이 들어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보석일까? 보석치고는 너무 크기가 크다. 설마 티아라부터 목걸이, 귀걸이까지 다 들어있는 세트인 것은 아니겠지. 아롈은 눈과 보석 색을 맞추는 것이나, 온 몸을 같은 색으로 도배하는 것만큼 보석 세트를 싫어했다.
아롈은 설사 보석 세트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웃으며 좋아하는 척 할 각오를 하고 상자를 열었다.
“이건.”
꽃도, 보석도, 과자도 아닌 근사한 문방구가 들어있었다. 돋을새김으로 장미를 새긴 은촉과 촉을 끼우는 상아 펜대, 펜을 잠시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 크리스탈로 된 잉크웰, 세 가지 색의 잉크, 그리고 질 좋은 종이 뭉치였다. 촉을 닦을 수 있는 기름과 수건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하나가 코시카에서 쓰던 것과 별다를 것이 없었고, 그 말은 아주 고급이라는 뜻이었다.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아무리 고급이라곤 해도 가격은 얼마 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장만해서 물 쓰듯 쓸 수 있었다. 지금도 잉크나 펜은 따로 가져오라 해서 쓰고 있었다. 하지만 별 수 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꽃망울 같은 기쁨이 터졌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들어 하니 저도 기쁘군요.”
아롈은 행복이 넘쳐 눈으로 흐를까 두려워 떨리는 손끝으로 잉크병을 만져보았다. 마개는 코르크가 아니라 유리로 되어 있었고, 병목에는 각각의 색을 표시하는 공단 리본이 묶여 있었다. 매끈하고 차가운 유리를 잡아도 변할 것이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럴 줄 알았음 그 많던 꽃 대신 잉크 공장이라도 하나 사다 선물할 것을 그랬지요.”
그는 쿡쿡 웃었다. 하지만 꽃은 꽃병에 꽂아두는 것 말고는 정말 쓸모가 없었는걸. 매일 머리에 꽃을 달았다간 두어 시간마다 시든 꽃을 갈아 치워야 할 것이다.
아롈은 따라 웃다 말고 엉거주춤 멈췄다.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 그렇듯 다정하고 상냥한 눈이었다.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리고 이렇게 빨리 뛰는 가슴을 들킬까 노심초사하게 된다. 세시안은 아롈의 뺨을 쓸어내리고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걸로 제일 먼저 제게 편지 한 장 써주겠어요?”
“그러겠습니다.”
아롈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르륵 눈이 감겼다. 입술이 맞닿았다. 설탕이 나오는 듯 달았다. 가슴 끄트머리가 저릿했다. 아직도 들려있는 상자를 양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숨이 가빠졌다.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고 혀가 얽혀들었다. 큰 솜이 뺨의 솜털 끝을 쓰다듬었다. 여러 갈래로 땋아서 단단히 틀어 올린 머리카락에 손을 올렸다. 오후의 햇빛에 잘 달아오른 머리카락은 뜨거웠다. 손이 목덜미로 내려갔다. 서늘하기까지 했다. 열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통증 탓일까.
세시안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떨어졌다. 흐트러진 숨결이 젖은 입술에 달라붙었다. 아롈은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는 뺨에 키스했다.
“큰일 날 뻔 했네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그는 아롈의 쇄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다시 입맞춰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세상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뺨이 화끈거렸다.
“여기는 예전에 미셸이랑 놀던 곳이지요. 열몇 살 먹은 애들 둘이 책장을 밀고 당겨서 만든.”
“직접 하셨습니까?”
“시종을 시키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잖아요. 둘만이 같이 놀자고 했는데, 미셸이 리즈에게 실토를 해버리는 바람에 들켰지요.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데 이럴 수가 있냐며 그 때는 펄펄 뛰었습니다.”
미셸. 리젤로트.
책이 든 채로 밀었더니 절대로 안 밀리더라며, 책이 있는 자리를 전부 적어놓고 빼서 이리 저리 민 다음, 다시 책을 꽂았다고, 그런 미련한 짓을 했더라고 했다.
“혼자 있고 싶으셨다면 그저 시종을 내보내셔도 됐을 텐데요.”
“그 때는 공부가 죽기보다 싫은 나이였으니까요. 모든 선생들이 저를 참 많이 혼냈지요. 그냥 도망치고 싶었는데 도망치면 시종들이 저 대신 매를 맞으니까. 도서관에 박혀서 공부한다고 하면 아무도 뭐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잖아요.”
농담인 것 같았다.
“믿기 어렵습니다만.”
“정말이랍니다. 예법 선생은 아무리 친구가 오를레앙 대공자라도 너무 허물없이 지내면 우습게 보인다고 혼내고, 검술 선생은 제가 매사에 의욕이 없어 보인다고 혼내고.”
“제 검술 선생은.”
아롈은 말을 끊었다. 별로 좋은 말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세시안은 따뜻한 눈을 하고 되물었다.
“검술 선생은?”
“항상 그만 두라고 했습니다.”
“이유는요?”
처음에는 여자가 검술을 해서 어디다 쓰느냐고 했다. 군대를 끌고 직접 나가 군인이 될 것도 아닌데 왜 배우느냐고도. 알렉산드르에게는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면서.
-경. 나는 부탁하는 게 아냐.
-전하. 검은 생각보다 무겁고, 제 훈련은 혹독합니다. 여리신 전하께서 견디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전략을 바꾸어 아롈을 설득하려 들었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야.
아롈은 잠시 단어를 떠올리다가, ‘살상을 하지 못 하는 검술’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갈리아 어를 찾지 못 해서 쉬운 말로 바꿔 말했다.
“사람을 못 베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바꾸어 아롈을 가르쳤다. 하지만 그만 두라는 권유는 계속 했다. 아무리 허수아비를 상대로 날아다닌다고 해도 사람만 앞에 두면 얼어붙는 사람에게 진검을 쥐어줄 수는 없다고.
“그래서 그만 뒀나요?”
“예.”
“언제?”
아롈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고 말했다.
“열두 살 때였습니다.”
“저도 기사 작위 따자마자 그만 뒀답니다. 사실 어떻게든 내쫓고 싶어서 허락한 것 같지만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주 놀라운 것이라도 발견한 양 웃은 그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계속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주로 세시안이 이야기를 하고, 아롈이 조금씩 거들었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할 때면 그는 바로 알아보고 부추겼다.
이렇게까지 오래 ‘대화’만 한 적은 처음이었다. 세시안은 굉장히 바빠서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왔다. 같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침대에서 잠드는 데에 쓸 수밖에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는 당연히 남들이 있었고, 차를 마실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롈은 혹여 한 마디라도 놓칠까봐 바싹 긴장해 귀를 기울이고, 아주 많이 웃었고, 홀리듯이 과거를 조금씩 풀어놓았다. 자기 얘기를 하는 동안에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최대한 짧게 끝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짜릿했다.
세시안이 썩어버린 엉터리 포도주 얘기를 할 때는, 차마 이미 들어 안다는 말을 하지 못 하고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귓가에 와 닿는 목소리며 웃음이 좋아서.
숨이 막혔다. 질식할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싹 튼 연정이 신나게 가지를 뻗어 가슴을 눌렀다. 가지가 사락사락 팔을 흔들었다. 더 알려줘. 더 이야기해 줘. 더 웃어줘. 더 물어봐 줘.
칠칠치 못하게.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