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병 (가제) (7)
도서관을 나섰을 때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손을 꼭 잡고 자비관에 돌아온 둘은 바쁜 시기에 벌인 일탈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했다.
세시안의 시종 셋이 서류륻 쌓아들고 자비관 침실 앞에서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시안은 저 중 요점만 고른다면 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 통탄을 금치 못했다.
하루를 통째로 놀자 일이 밀린 것은 아롈도 마찬가지여서, 시녀들과 하녀들은 시킨 일을 다 했노라고 왔다. 내일 오라고 보냈지만 보고 사항을 확인하고 내일 시켜야 할 일을 짜긴 해야 했다.
세시안은 일이 많다며 정의관으로 가는 대신 아롈의 옆에 남았다. 어떻게 하지요, 같이 밤 새야겠군요. 생글거리며 하는 그 말이 어찌나 달콤한지. 당연하게 ‘같이’라고 한 것이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어서, 둘은 내내 이마를 맞대고 밤을 샜다. 밤새 샹들리에의 촛불을 갈아대며 침대에 머리 한 번 대보지 못했지만 아롈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일 때문이 아니었다. 그토록 일에 집중을 못 해본 적도 별로 없었다.
혹시 고개를 들면 눈을 마주칠까 겁나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도 겁났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한참 집중하는 진지한 얼굴이 보이는 게 좋았다. 거짓말처럼 그가 고개를 들고 웃어줬을 때는 내내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마치 우연인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목을 풀거나 금세 다시 고개를 종이에 박았다.
대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새파랗게 새벽빛이 밝았다. 마지막으로 간 촛불들이 다 타서 가물거리다가 하나씩 꺼질 즈음이었다. 그 때 일을 거의 다 마친 세시안이 이마를 쳤다.
생각해보니 주일이었다.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해야 하는 날이고, 시녀든 하녀든, 시종이든 하인이든 누구에게도 일을 시킬 수 없는 날이기도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당직이 남아있지만)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마주 웃었다. 세시안은 우리 둘 다 바보라는 건 비밀로 하자고 했다. 비밀. 그 말이 언제부터 그렇게 낭만적인 말이었을까. 짜증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손을 잡고 성당에 갔다. 아롈은 잠을 설치는 데에 익숙해서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긴 해도 참을 만 했지만 세시안은 눈 밑이 검게 물들어서는 아주 피곤해했다. 결국 설교 시간에는 나란히 졸았다. 맨 앞자리인 데다가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척해서 들키지는 않았다. 성체는 모시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비관에 돌아와 낮잠을 잤다.
아니, 낮잠을 자는 척하면서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 뒤로 세시안은 해가 졌는데 일이 끝나지 않으면 자기 일거리를 자비관에 들고 오기 시작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가지가 잎사귀를 좋아라 흔들며 게걸스레 뿌리를 뻗었다. 파고든 자리마다 뻐근하게 아팠지만 아무런 방해 없이 자라났다.
리젤로트는 여전히 칩거 중이었다. 황후는 아롈이 아프다며 약속을 취소한 이후 다른 약속을 잡지 않았다. 황후가 조용하니 미네트는 따라 조용했고, 크리스틴은 가끔 와서 도와주겠다며 얼쩡거리는 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일을 하는 방법이 너무 달라서 큰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필리프는 소피를 통해서 여러 가지 잔소리를 전했지만 예전처럼 짜증이 나질 않았다. 들어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들어주고 들어주기 어려운 것은 머릿속에 넣어놓았다.
가장 큰 방해꾼이라고 생각했던 황제는 아롈이 ‘여자의’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두 번 얼굴을 보았는데, 그 때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좋은 시아버지인 것처럼 굴었다. 아롈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두 달은 정말 빠르게 흘렀다. 아롈은 아무런 방해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손님맞이 준비와 연회 준비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남편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대회의가 열리기 일주일 전이었다. 황후가 보자고 한다는 전갈이 왔다. 미리 약속을 잡지도 않고, 일정을 묻지도 않고 당일 온 통보였다.
말도 안 되게 무례한 일이었다. 아롈은 눈 돌아가게 바쁜 일을 집어치우고 일어섰다. 황후와의 독대는 계속 미루기만 했을 뿐 결혼 생활을 계속 한다면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기도 했다. 언제까지나 황후가 아롈을 피해 다닐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롈은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복장 그대로 2층으로 내려갔다. 황후의 방은 대계단을 지나 모퉁이를 두 번 돌아야 있었다.
미네트가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말 대신 문이 열렸다. 마담 르와이얄인 크리스틴이었다.
아롈은 들어가자마자 주변을 훑어보았다. 황후는 이블린에 있는 거의 모든 귀부인들을 끌어다 놓은 듯했다. 사이가 좋지 않기로 유명한 오를레앙 대공비도 있었다. 부르고뉴에서 아직 올라오지 않은 부르고뉴 대공비 오거스틴과 타계한 지 오래 된 나바르 대공비를 제외하면 모든 대공비가 앉아 있었으며, 그들의 며느리에 해당하는 공작부인들, 심지어 ‘무슈’의 부인인 ‘마담’도 있다.
예의를 차려 무릎을 꿇었다. 아직 황후가 ‘들어오라’ 등의 말을 꺼내지 않았으므로 아롈은 아직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녀들은 아롈보다 지위가 높은 황후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 예를 차리는 대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일어나라는 말이 없었다.
그 순간 아롈은 황후가 무슨 작정을 했는지 감이 잡혔다. 이만큼 사이 나쁜-황후와 사이좋은 사람은 없다시피했다- 사람들을 죄다 모을 정도라면 결코 쉬운 괴롭힘은 아닐 테지. 아롈은 이를 악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독한 것.’
황후의 응접실에 앉아 있는 모든 여인들이 다 그렇게 생각했다. 두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녀는 표정 한 번 변하지 않았다. 가끔 속눈썹이 바르르 떨릴 뿐, 그림처럼 아름다운 얼굴은 싸늘한 그대로였다.
그 자리에 앉은 여인들 대부분은 시집간 지 삼십 년이 넘은 보르디 대공녀 엘리엔의 이름은 잘 알아도 얼굴은 몰랐다. 그러나 오를레앙 대공비 루이즈 안을 비롯하여 몇몇 연륜 있는 부인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바로 옛날의 일을 기억해냈다.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 아무리 수치스러운 일이라도 흐릿하게 지워지기 마련. 수치와 치욕은 오래 남아 이를 닳을 정도로 갈았고, 이내 증오로 변해서 심장 어느 구석에 박혀 선명했지만 얼굴은 지운 듯이 잊었다.
그러나 아롈이 황실의 숲에서 마치에서 내리는 순간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언제 잊었냐는 듯 그대로 날아와 본래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왜 하필 너니.
왜 하필 네가 내 며느리로 들어온 거니.
죽은 루이즈 마리도 정말 며느리감으로는 형편없는 아이였지만 이 아이에 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신붓감이었다. 그 애 다음이 그 계집애의 딸일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잘 가르칠 것을. 채신없이 넘어져 탁자에 머리 박고 죽을 것은 무어람.
두 시간 째 앉아있으니 다리가 죽도록 아플 텐데 매끈한 미간에는 주름 한 자락 가 있지 않았다. 기도라도 하는 듯 평온하다.
황후는 공작 깃털을 뽑아 만든 부채로 부채질을 했다. 뿌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롈은 견뎠다. 이 정도는 각오한 바이기도 했고, 실수 따윈 하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한 바이기도 했다. 다리가 저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려 했지만 참았다. 신음 한 마디 흘리지 않았다.
귀부인들의 분위기는 대뜸 불편해졌다. 황후가 아롈을 무시하기 위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대부분 눈빛만을 교환할 뿐이었지만 방향성만은 명확했다.
외국인 출신인 어린 소녀를, 나이 든 어른인 황후가 핍박하는 것이 불안한 것이다. 아니면 황후보단 아롈이 더 오래 살 테고, 아롈은 차기의 황후가 되어 그들의 머리 위에 군림할 터라는 계산이 깔려 있을 수도 있고.
샤를루아 공작부인이며 보르디 대공비의 표정에는 반쯤 살기가 돌았다. 외숙모에게 화낼 것 없다 말해주고 싶었다.
황후는 잘못 생각했다. 아롈은 이유 없는 호의에는 약해도 적의와 멸시에는 강했다.
아버지는 아롈의 이름도 못 외웠고-어머니의 이름과 같았음에도-, 어머니는 서리처럼 차가워 만나더라도 다정하게 이름 한 번 불러주는 법이 없었다. 종숙부인 콘스탄틴 대공은 언제나 ‘저것이 죽어야 내게도 순서가 돌아올 텐데’ 하는 눈으로 아롈을 노려보았다. 손녀를 사랑하는 건 보통 할아버지라지만 아롈의 조부야말로 여기에 익숙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심심하면 아롈의 얼굴을 겨냥해서 서류를 집어 던졌다. 비록 힘이 모자라 주로 치맛자락을 맞추긴 했어도 원 과녁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남편이 그 풍부한 목소리로 아렐르, 하고 부르고 꽃을 주고 손을 잡고 입 맞추고 포옹하고 소중히 쓰다듬어주면 어쩐지 서러워 눈물이 났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도 잊어버려 허둥댔다.
하지만 이런 건 괜찮다. 마침내 익숙한 전장에 돌아온 듯했다. 많이 녹슬었지만 흠 하나 보이지 않도록 자신을 다듬고 또 두드리는 일에는 능하다.
“어머, 내가 깜빡 졸았구나.”
거짓말. 빤히 눈 뜨고 있었으면서.
“일어나렴. 미련하게 그리 계속 있어서 나를 매정한 시어미로 만드는 건 또 뭐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