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롈, 세시안 TS 버전 외전입니다.
아롈과 세시안의 항렬 사람들은 전부 TS
아롈은 파블이라고 해야하고 세시안도 다른 이름일 테지만 편의상 그냥 썼어요ㅠㅠㅠ
(이 외전은 본편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어서 오시오, 남쪽 나라에서 온 황녀.”
아주 잘생긴 남자, 아니 아름다운 남자가 인사를 해왔다. 북국의 새로운 황제는 키가 컸다. 중키인 세시안은 그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젖혀야 할 지경이었다.
머리칼은 옅은 레몬색, 본국의 귀족들과는 달리 목덜미에서 짧게 쳐서 다듬었다. 추위 때문에 발갛게 달아오른 눈과 코는 창백한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눈이 새순 같은 연둣빛이니 좀 따스해보이기도 하련만, 오히려 아주 차가워보인다. 표정이 없어 얼음으로 빚어놓은 것 같다.
이 사람이 앞으로 그녀가 함께 살아가야 할 남편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폐하.”
그녀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앞에서는 한창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세시안은 아침부터 찬 샘물로 몸을 벅벅 씻고 붉고 답답한 옷을 입은 다음 혼인식장에 앉아 있었다. 아주 떠들썩하고, 아주 시끄러웠다.
연회 때문에 밥을 굶은 적은 많아서 크게 배고프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그녀는 일곱 겹의 베일 사이로 남편 될 사람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그는 술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과일만 조금 집어먹고 있었다.
정말이지 상상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코시카 황제인 옐렌 파블로비치는 아버지인 파블 이바노비치 대공을 유폐하고 황위에 올랐다. 새로 황위에 오른 그는 젊고 강력한 괴물이었다. 육촌 남동생 둘을 죽이고, 사생아인 형제들도 죄다 잡아 죽였다고 했다. 황좌에 오를 때까지 온 세상에 피를 흩뿌리고 다녔다.
그 공포로써 나라를 휘어잡았다. 애초에 그는 정통성 있는 후계자였고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었으므로 즉위 초기의 혼란은 길지 않았다.
그에 반해 아들 네 명이 차기 보위를 다투어 시끄러웠던 로렌은 식민지에 터진 전염병과 흉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시안이 이리로 시집오게 된 것이다. 원래라면 어느 대공가를 하나 잡아 시집갔어야 할 것을, 마담 르와이얄인 세시안의 막대한 지참금이 한 대공가로 갔다가는 단박에 균형이 깨질 것을 염려한 부황의 판단이었다.
세시안은 다섯 번이나 약혼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남자가 다른 귀족 여자를 임신시켰으니 파혼해달라고 애걸복걸하질 않나-그 때까지만 해도 다른 남자 잡아서 결혼하면 되지하고 편하게 생각했다-, 군에 들어가 죽어버리질 않나, 자살 소동까지도 일으켰다.
아무리 그래도 다섯 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시집가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황제는 고작 열여덟, 자신은 스물셋.
세시안이 시집오면서 상상한 사람은 이렇게 어리고 아름다운 남자가 아니었다. 몸에 혈육의 피를 묻히고 괴기스럽게 웃는 남자였지. 눈부시게 예쁜 남자라서 옆에 서있기 주눅들 정도였다. 본국에서였다면 저런 남자 근처에도 여자들이 가지 않을 것이다. 비교 당할까봐.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추녀는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혓바닥을 잘 굴리는 광대가 와도 미녀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오히려 저 황제를 여장시켜다가 앉혀놓는 게 미녀 소리를 듣기 쉬울 것이다.
베일을 두고 있는데도 시선을 감지했는지 황제가 옆을 돌아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말투는 아주 차갑다. 신경질까지도 묻어났다. 하지만 분명히 그녀에게 신경 쓰고 있었다. 입술이 절로 호선을 그렸다.
“아닙니다.”
“지금 충분히 쉬어두는 게 좋을 거요.”
“어째서인가요?”
매끈한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남쪽은 어떤지 몰라도 코시카 결혼식은 일주일 밤낮을 먹고 놀지. 신랑은 도망갈 수 있어도 신부는 계속 거기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어야 하오. 내 누님이 그러는데 나중에는 입가에 경련이 인다더군.”
누님이라. 그는 대외적으로 늦둥이 여동생만 하나 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생아 누나일까, 아니면.
“베일로 가려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요, 뭐.”
입술이 움찔거렸다. 황제는 뭔가 말하려고 하는 듯했다. 그 순간 궁정 무관이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렀다.
“토끼 납시오!”
세시안은 신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다.
식장에서는 정말이지 혼이 빠졌다. 장신구를 던져줘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장신구를 던져주자마자 이렇게나 우르르르 몰려오는 혼란이라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세시안은 붉은 옷을 입은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그 때 누가 손을 잡았다.
붉은 베일이 가리지 않아도 알았다. 황제였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말없이 끌고 인파를 헤쳤다. 그가 계속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부딪칠 것 같으면 바로 몸을 틀었던 것이다.
그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깔려 죽을 뻔 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예, 폐하께서 구해주신 덕분에요.”
황제는 귀가 붉어진 것을 알까? 그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설마 동정일까. 나이 열여덟. 그녀는 자신의 오라비들과 동생들이 얼마나 호색하게 돌아다녔는지도 알고, 심지어 그 중 둘은 결혼도 하기 전에 사생아를 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이 남자는 속이 은은히 비치는 잠옷을 앞에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눈도 제대로 맞추질 못한다.
“밤새 이렇게 앉아만 계실 건가요?”
웃음기 섞인 그녀의 말에 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연둣빛 눈이 부끄러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대는 경험이 있나 보군?”
“폐하, 그리 빈정거리시려면 얼굴은 붉히시면 안 된답니다.”
“그래서 있소?”
“없지는 않았어요.”
나이가 몇인데 지금까지 처녀겠는가. 아이를 가질까봐 극도로 조심하기는 했지만 서로 즐길 만큼은 즐겼다.
“그 남자 사랑하오?”
그 남자? 그녀는 이내 그 남자라는 게 관계를 가졌던 사람을 의미한다는 걸 깨달았다. 난감한 웃음이 흘렀다. 어쩌지. 한 명이 아니었는데.
“사랑한다면요? 도주라도 시켜주실 건가요?”
“그렇소.”
진담일까. 농담일까. 일단 농담 쪽으로 판단한 그녀는 쿡쿡 웃었다.
“제가 정말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그렇게 쫓아내시려는 걸 보니.”
“짐은 사람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 정돈 아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는 내 옆에서 시들고, 내내 그 사람 생각만 하게 될 테지. 내가 입 맞추고 안을 때조차 그대를 만지는 게 그 사람 손이라고 상상할 테고. 내 아이를 낳아도 그 사람의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한탄할 테고. 왜 그 때 도망가지 않았을까, 도망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원망을 하는 사람과 평생을 살기는 싫소.”
대체 이 사람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까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난감함이 가득 차올랐다. 물론 몸을 섞을 때는 호감을 가지고 몸을 섞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감정이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식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세시안이 아는 ‘사랑’이란 그리 절대적이고 사람을 지배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황제는 그런 감정을 품었으면 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그냥 정부라도 들여 예뻐하면 그만일 것을.
“제가 도망가면 폐하는 어쩌시려고요.”
“소박맞았다는 소문이 사그라들 때 쯤 다른 여자와 결혼해야지.”
“그 여자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애걸복걸하면요?”
“……보내줘야지.”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니, 누가 이 사람을 두고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라고 했더란 말인가? 속내가 환히 뵈는 것이 아주 귀여운 남자다. 주인한테 한 번 버림받아 꼬리 내리고 눈치 보는 강아지 같다. 꼴에 자존심은 강해서 목은 빳빳이 세우고 있지만 슬금슬금 곁눈질을 하는 강아지.
누가 이 예쁜 남자를 버리고 간 걸까. 아니, 실연과는 조금 다르다. 자기가 당한 실연은 아닌데.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래서 대답은?”
하지만 그 눈은 진지했다. 그녀는 진한 초록빛 눈에 웃음기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불장난이었어요.”
“그럼.”
“이보세요, 폐하. 저는 다른 남자가 아니라 폐하께 시집온 거예요. 벌써 저렇게 뻑적지근한 결혼식도 치렀고요. 로렌의 마담 르와이얄이 코시카 황제에게 시집간다고 온 세상에 다 알리고 호화찬란하게 데려와 신방에까지 들어와 놓고, 이제 와서 결혼식 물리면 제가 석녀 소리를 듣든, 폐하가 고자 소리를 듣든 둘 중 하나라고요.”
“그럼 앞으로 다른 남자를 보지 않을 자신은 있나.”
아이고, 이 화상아!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르, 읍!”
일단 저지르고 생각하자! 그녀는 진한 입맞춤을 날리며 황제, 남편의 앞섶을 거칠게 풀어헤쳤다.
아롈과 세시안의 항렬 사람들은 전부 TS
아롈은 파블이라고 해야하고 세시안도 다른 이름일 테지만 편의상 그냥 썼어요ㅠㅠㅠ
(이 외전은 본편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여름 눈송이 가상외전 3
“어서 오시오, 남쪽 나라에서 온 황녀.”
아주 잘생긴 남자, 아니 아름다운 남자가 인사를 해왔다. 북국의 새로운 황제는 키가 컸다. 중키인 세시안은 그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젖혀야 할 지경이었다.
머리칼은 옅은 레몬색, 본국의 귀족들과는 달리 목덜미에서 짧게 쳐서 다듬었다. 추위 때문에 발갛게 달아오른 눈과 코는 창백한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눈이 새순 같은 연둣빛이니 좀 따스해보이기도 하련만, 오히려 아주 차가워보인다. 표정이 없어 얼음으로 빚어놓은 것 같다.
이 사람이 앞으로 그녀가 함께 살아가야 할 남편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폐하.”
그녀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앞에서는 한창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세시안은 아침부터 찬 샘물로 몸을 벅벅 씻고 붉고 답답한 옷을 입은 다음 혼인식장에 앉아 있었다. 아주 떠들썩하고, 아주 시끄러웠다.
연회 때문에 밥을 굶은 적은 많아서 크게 배고프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그녀는 일곱 겹의 베일 사이로 남편 될 사람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그는 술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과일만 조금 집어먹고 있었다.
정말이지 상상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코시카 황제인 옐렌 파블로비치는 아버지인 파블 이바노비치 대공을 유폐하고 황위에 올랐다. 새로 황위에 오른 그는 젊고 강력한 괴물이었다. 육촌 남동생 둘을 죽이고, 사생아인 형제들도 죄다 잡아 죽였다고 했다. 황좌에 오를 때까지 온 세상에 피를 흩뿌리고 다녔다.
그 공포로써 나라를 휘어잡았다. 애초에 그는 정통성 있는 후계자였고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었으므로 즉위 초기의 혼란은 길지 않았다.
그에 반해 아들 네 명이 차기 보위를 다투어 시끄러웠던 로렌은 식민지에 터진 전염병과 흉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시안이 이리로 시집오게 된 것이다. 원래라면 어느 대공가를 하나 잡아 시집갔어야 할 것을, 마담 르와이얄인 세시안의 막대한 지참금이 한 대공가로 갔다가는 단박에 균형이 깨질 것을 염려한 부황의 판단이었다.
세시안은 다섯 번이나 약혼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남자가 다른 귀족 여자를 임신시켰으니 파혼해달라고 애걸복걸하질 않나-그 때까지만 해도 다른 남자 잡아서 결혼하면 되지하고 편하게 생각했다-, 군에 들어가 죽어버리질 않나, 자살 소동까지도 일으켰다.
아무리 그래도 다섯 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시집가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황제는 고작 열여덟, 자신은 스물셋.
세시안이 시집오면서 상상한 사람은 이렇게 어리고 아름다운 남자가 아니었다. 몸에 혈육의 피를 묻히고 괴기스럽게 웃는 남자였지. 눈부시게 예쁜 남자라서 옆에 서있기 주눅들 정도였다. 본국에서였다면 저런 남자 근처에도 여자들이 가지 않을 것이다. 비교 당할까봐.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추녀는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혓바닥을 잘 굴리는 광대가 와도 미녀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오히려 저 황제를 여장시켜다가 앉혀놓는 게 미녀 소리를 듣기 쉬울 것이다.
베일을 두고 있는데도 시선을 감지했는지 황제가 옆을 돌아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말투는 아주 차갑다. 신경질까지도 묻어났다. 하지만 분명히 그녀에게 신경 쓰고 있었다. 입술이 절로 호선을 그렸다.
“아닙니다.”
“지금 충분히 쉬어두는 게 좋을 거요.”
“어째서인가요?”
매끈한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남쪽은 어떤지 몰라도 코시카 결혼식은 일주일 밤낮을 먹고 놀지. 신랑은 도망갈 수 있어도 신부는 계속 거기 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어야 하오. 내 누님이 그러는데 나중에는 입가에 경련이 인다더군.”
누님이라. 그는 대외적으로 늦둥이 여동생만 하나 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생아 누나일까, 아니면.
“베일로 가려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요, 뭐.”
입술이 움찔거렸다. 황제는 뭔가 말하려고 하는 듯했다. 그 순간 궁정 무관이 배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렀다.
“토끼 납시오!”
세시안은 신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다.
식장에서는 정말이지 혼이 빠졌다. 장신구를 던져줘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장신구를 던져주자마자 이렇게나 우르르르 몰려오는 혼란이라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세시안은 붉은 옷을 입은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그 때 누가 손을 잡았다.
붉은 베일이 가리지 않아도 알았다. 황제였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말없이 끌고 인파를 헤쳤다. 그가 계속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부딪칠 것 같으면 바로 몸을 틀었던 것이다.
그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깔려 죽을 뻔 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예, 폐하께서 구해주신 덕분에요.”
황제는 귀가 붉어진 것을 알까? 그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설마 동정일까. 나이 열여덟. 그녀는 자신의 오라비들과 동생들이 얼마나 호색하게 돌아다녔는지도 알고, 심지어 그 중 둘은 결혼도 하기 전에 사생아를 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이 남자는 속이 은은히 비치는 잠옷을 앞에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눈도 제대로 맞추질 못한다.
“밤새 이렇게 앉아만 계실 건가요?”
웃음기 섞인 그녀의 말에 그는 홱 고개를 돌렸다. 연둣빛 눈이 부끄러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대는 경험이 있나 보군?”
“폐하, 그리 빈정거리시려면 얼굴은 붉히시면 안 된답니다.”
“그래서 있소?”
“없지는 않았어요.”
나이가 몇인데 지금까지 처녀겠는가. 아이를 가질까봐 극도로 조심하기는 했지만 서로 즐길 만큼은 즐겼다.
“그 남자 사랑하오?”
그 남자? 그녀는 이내 그 남자라는 게 관계를 가졌던 사람을 의미한다는 걸 깨달았다. 난감한 웃음이 흘렀다. 어쩌지. 한 명이 아니었는데.
“사랑한다면요? 도주라도 시켜주실 건가요?”
“그렇소.”
진담일까. 농담일까. 일단 농담 쪽으로 판단한 그녀는 쿡쿡 웃었다.
“제가 정말 마음에 안 드시나 보군요. 그렇게 쫓아내시려는 걸 보니.”
“짐은 사람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 정돈 아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대는 내 옆에서 시들고, 내내 그 사람 생각만 하게 될 테지. 내가 입 맞추고 안을 때조차 그대를 만지는 게 그 사람 손이라고 상상할 테고. 내 아이를 낳아도 그 사람의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한탄할 테고. 왜 그 때 도망가지 않았을까, 도망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원망을 하는 사람과 평생을 살기는 싫소.”
대체 이 사람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까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난감함이 가득 차올랐다. 물론 몸을 섞을 때는 호감을 가지고 몸을 섞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감정이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식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세시안이 아는 ‘사랑’이란 그리 절대적이고 사람을 지배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황제는 그런 감정을 품었으면 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그냥 정부라도 들여 예뻐하면 그만일 것을.
“제가 도망가면 폐하는 어쩌시려고요.”
“소박맞았다는 소문이 사그라들 때 쯤 다른 여자와 결혼해야지.”
“그 여자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애걸복걸하면요?”
“……보내줘야지.”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니, 누가 이 사람을 두고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라고 했더란 말인가? 속내가 환히 뵈는 것이 아주 귀여운 남자다. 주인한테 한 번 버림받아 꼬리 내리고 눈치 보는 강아지 같다. 꼴에 자존심은 강해서 목은 빳빳이 세우고 있지만 슬금슬금 곁눈질을 하는 강아지.
누가 이 예쁜 남자를 버리고 간 걸까. 아니, 실연과는 조금 다르다. 자기가 당한 실연은 아닌데.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래서 대답은?”
하지만 그 눈은 진지했다. 그녀는 진한 초록빛 눈에 웃음기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불장난이었어요.”
“그럼.”
“이보세요, 폐하. 저는 다른 남자가 아니라 폐하께 시집온 거예요. 벌써 저렇게 뻑적지근한 결혼식도 치렀고요. 로렌의 마담 르와이얄이 코시카 황제에게 시집간다고 온 세상에 다 알리고 호화찬란하게 데려와 신방에까지 들어와 놓고, 이제 와서 결혼식 물리면 제가 석녀 소리를 듣든, 폐하가 고자 소리를 듣든 둘 중 하나라고요.”
“그럼 앞으로 다른 남자를 보지 않을 자신은 있나.”
아이고, 이 화상아!
“앞으로의 일은 아무도 모르, 읍!”
일단 저지르고 생각하자! 그녀는 진한 입맞춤을 날리며 황제, 남편의 앞섶을 거칠게 풀어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