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열병 (가제) (9)
세시안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다. 아롈이 기다리면서도 기다리지 않다가, 마침내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옆자리에 누운 그는 아롈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하루는 뭘 했어요?”
뱉어놓고서도 아차 하는 눈빛이었다. 아롈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만큼이나 일상이 된 물음이었다.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며칠 똑같은 대답을 들은 그는 생긋 웃으며 세상에 아무런 일도 없는 날이 다 있느냐고 되물었다. 아롈은 쩔쩔 매며 답을 짜내야 했다. 아침을 먹고, 손님을 만나고, 점심을 먹고, 일을 하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뭘 먹었냐고 물어보고, 누구를 만났느냐고 물어보았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 진지한 눈을 앞에 두고, 아롈은 더듬더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 중 맛있었던 게 있었는지, 맛없었던 게 있었는지, 손님이랑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아직도 일상 회화에서 쓰이는 고유명사는 조금 약했다. 예를 들어 무화과가 갈리아어로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중간중간 페란토를 조금 섞었다.
스스로 들어도 답답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남편은 짜증내지 않았다. 손을 잡고 끝까지 들은 다음 자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얼굴을 맞대면 어김없이 나오는 그 질문. 오늘은 뭘 했어요?
재미있는 농담을 들으면 이 이야기를 해야지, 식사를 하다가도 오늘 고기가 유난히 맛있었노라고 해야지, 기억해두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먹은 이야기의 반의반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그냥, 별 일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어머니가 네 시간 동안 무릎을 꿇려놓았고, 무릎 꿇고 앉아있는 동안 언젠가는 갚아 주리라 칼을 갈았다고는 얘기하기 싫다.
수모를 좀 겪었다고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는 건 생각만 해도 한심하다.
“그렇군요.”
그는 아롈의 뺨이 당장이라도 뭉개질 것처럼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측은함, 미안함, 죄책감. 그런 것들이 모두 깃들어있었다. 당연하게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이다.
-말하고 싶어지면 말해주겠어요?
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미워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조금이라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안아주는 사려 깊음이 얄미워서, 아롈은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손이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대회의의 첫 날이 밝았다. 앤은 신경이 곤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아롈을 대신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롈은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똑같은 것을 확인했다. 꽃이 시들지는 않았는지, 손님 명단에 맞게 좌석이 준비되어 있는지, 손님들의 자리에 손수 쓴 카드가 제대로 배치되어 있는지, 이름의 철자가 틀리지는 않았는지.
성장을 마친 아롈은 훈장의 어깨띠와 별을 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옐레나 여제의 옆모습이 그려진 카메오 리본을 손목에 묶었다.
거울에 비추어보니 옷과 손목의 리본은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대회의의 관례라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남자는 아버지의 얼굴을, 여자는 어머니의 얼굴을 패용하는 촌스러운 관례라니.
정신없이 나가서, 오찬을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대공가의 일원들이며 외교 사절들에게 손님 대접을 했다. 그리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만찬에는 아무런 흠이 없었다.
물론 신경전은 있었지만, 무난하게 받아 넘겼다. 필리프가 평가라도 하듯 보는 앞에서 아롈은 웃으며 전 부르고뉴 대공비의 공격을 전부 받아쳤다. 발음이 조금 새서 그렇지 어휘도 완벽했다. 며칠 전부터 예상되는 공격들과 그에 대해 반응할 말들을 전부 종이에 쓰고 외운 덕이었다.
아롈은 겉으로는 활짝 웃으며 칼질을 했지만,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너무 긴장이 되어 토할 것 같았다. 입 안이 깔깔했다.
식사가 진행되고, 안부 인사를 나누는 일이 마무리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롈은 그간 궁금했던 것에 대한 의문을 많이 풀 수 있었다. 본래 알던 사실이 그만큼이나 많으면, 여러 가지를 추론할 수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북쪽으로 포도주를 좀 더 많이 수출하게 되어, 코르크의 소비량이 늘었다는 오베르뉴 대공비의 이야기는 아롈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아롈이 쫓겨나기 전까지만 해도 코시카는 지나치게 비싼 남쪽 산 포도주 가격을 좀 흥정하고자 동쪽 및 신대륙 산 포도주의 관세를 낮춰주는 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남쪽 산 포도주 수출을 늘렸다고 했다. 갑자기 같은 가격에 대한 포도주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을까? 멀쩡한 포도주 가격을 내렸을까? 아니다. 아마 남쪽 포도주 관세를 일정 기간 감해줬거나 아예 면제해줬겠지.
어머니는 다른 이권들을 몇 개나 로렌에 넘겼을까. 얼마나 져주고, 양보해줬을까. 아롈을 지지해주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죽고 한직으로 떨어졌을까. 아마 다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롈은 여자지만 정통후계자였고, 어머니는 아들인 미하일의 지지 세력이 생길 틈도 주지 않고 일을 해치웠다. 그것도 외국의 군대를 사용했다. 전부 해치우려면 끝도 없다. 하지만 전쟁.
대(對) 피아스트 전이 장기화되는 것이 장기적으로 그리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적당히 밟았으면 빠질 줄도 알아야 하는데. 현재 축적되어 있는 물자로는 전쟁을 감당하는 데에 무리가 없겠지만 너무 잔인하게 굴면 주변의 속국들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제 그 자리는 아롈의 자리가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