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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2)


     

아직 춤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지쳤다고 발을 빼는 것도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게다가 부부가 함께 사라지는 것도. 아롈보다는 남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롈의 손을 잡아끌다시피 하는 그의 얼굴은 딱딱했고, 걸음도 빨랐다.

“전하. 발걸음이 빠릅니다.”

“아, 미안해요.”

천천히 걸음이 느려졌지만 얼굴은 여전했다.

거울의 홀은 지을 때 휴게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자비관과 정의관의 다른 홀들을 치우고, 휴게실로 꾸며놓았다. 아롈은 배치에 어지간히 골머리를 썩였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평화의 홀이었다. 자비관에 있는 평화의 홀은 ‘홀’이라는 이름이 붙기에는 작았지만 관례에 따라 그런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황실이 사용하겠다고 공지해두었다.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기 때문에 홀은 텅 비어 있었다.

“전하.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

“하실 말씀이 있어서 휴식을 핑계대신 것 아니었습니까.”

자리에 앉아 아롈의 손을 매만지고 있던 세시안은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진주 반지 위에 입술을 댔다.

“아뇨. 정말 쉬고 싶어서요.”

“혹시 저 때문이라면, 열은 많이 내려 괜찮습니다만.”

“그건 참 다행이네요. 하지만 제가 피곤하군요.”

그가 자연스럽게 팔을 당기자 아롈은 품에 안겨들었다. 피곤하지 않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화장 때문에 눈꺼풀이 뻑뻑했다. 눈을 감고 긴장을 풀면 바로 잠들어버릴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긴장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설마하고 생각하지만, 아롈은 아직 정의관에서의 일을 잊지 않았다.

설마 이런 곳에서, 라고 생각하며 이런 저런 요상한 생각에 젖어 있는데 아주 깊은 한숨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후우.”

“심려되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글쎄요.”

아롈은 잠자코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짧지 않은 침묵이 지난 후, 남편이 물었다.

“안 궁금한가요?”

“궁금합니다만.”

“그런데 안 물어보나요?”

“제가 여쭤보아도 되는 거였습니까.”

남편은 짧게 웃었다.

“부디 물어봐주겠어요?”

“왜 지치셨습니까.”

“제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질려서요.”

평소의 상냥함이나, 다정함이 있을 자리를 화와 짜증이 차지한데다가 빈정거림마저 스며있었다. 세시안은 빠르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대체가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 따윈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체면 때문에 남자는 여자에게 진지하게 화를 낼 수 없다고 굳세게 믿는 건지, 제 눈앞에서 사람을 혓바닥으로 자근자근 짓밟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하호호 웃어요.”

적어도 그 말의 주어가 부르고뉴의 조제핀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 수 있었다. 아롈을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 아픔을 느끼기 직전에 안은 팔이 느슨해졌다.

“에모주 공작부인 때문에 화나셨습니까.”

“예. 그 멍청한 여자 때문이에요.”

대답은 단호했다.

“아렐르는 명석하니까, 아까의 말뜻을 이해 못 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웃고 있었어요?”

“그건…….”

아롈은 그의 거친 말에 경악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넘기고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그런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은 많고, 그들을 상대해서 일일이 화를 낼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스스로 말하면서도 우스웠다. 아롈은 분명 그녀에게 화가 났다. 단지 꾹꾹 눌러 참았을 뿐이었다.

“사실 아닌 일에 반응했다가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저러는 거라 도리어 소문이 나면 어쩌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웃어넘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아시는 분께서 왜…….”

“그렇군요……. 저도 그냥 웃었죠.”

세시안은 갑자기 품에 안은 아롈을 놓아주었다. 아롈은 허리를 세우고 눈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롈은 신중하게 그 감정을 읽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롈은 자신의 말이 뭔가를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건 마치 아롈 자신의 알렉산드르나 파피와 같은 무언가였다. 아주 깊숙한 곳에 있는 금기나, 깊은 후회 같은 것.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롈은 그에 대한 애정으로 침묵했다.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나무 진액처럼 흐르던 감정이 호박이 되듯 굳었다.

“아렐르는 아이를 갖고 싶어요?”

“전하. 괜찮으십니까?”
“대답해줄래요?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아이는…….”

아이는 아롈이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지고 안 가지고 싶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아롈은 결혼성사로 남편과 맺어진 이상 그의 아이를 낳을 의무가 있었다.

심지어 남편은 후계자였다. 당연히 아이가 필요하고, 로렌에서는 여성에게 계승권이 주어지지 않으니 그 중에서도 아들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기에는 무언가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정말 이런 걸 몰라서 물어보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이’라.

그렇지. 임신을 하면 열 달 뒤에는 아이가 태어나는 거였지. 아마 외양은 흑발에 녹안이 되려나. 그리고 아마 마법사일지도 모른다.

아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렇다. 아이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롈은 세 살에 각성했다. 아이는 다르리란 법은 없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아이에 대해서 그리 좋은 기억이 없었다. 아롈의 유년기는 그야말로 애정의 갈구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 추운 곳에서, 조금이라도 따뜻한 햇빛을 찾아 몸을 웅크리고 있는다거나, 유모가 찾지 않을 만한 서재에 몸을 숨기고 눈을 비비며 어려운 책을 읽고, 또 읽는다거나. 아니면 어머니가 혹여 자기를 한 번 봐줄까, 한 번은 쓰다듬어줄까 싶어서 복도에 서서 서성이던 기억들.

그리고 아롈이 가장 최근에 본 아이는 미하일이었다. 누나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고, 새근새근 잠들어있던 어린 동생.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오답이었나? 하지만 남편은 평소처럼 생긋 웃고는 아롈의 뺨을 쓰다듬었다.

“슬슬 나갈까요? 가서 춤 춰요.”

“예.”

둘은 거울의 홀로 다시 나가서 미뉴에트를 추었다. 손을 잡고 날렵하게 움직이면서도, 때를 못 찾은 질문이 아롈의 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전하께서는요?

아이를 갖고 싶으신가요?

 

세시안이 신부에게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면서도 바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칼레 대공자이자 아모랭 공작이 다가와 독대를 청했다. 대회의 첫 날에는 황제라든가 대공 부처가 참석치 않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칼레의 장자인 그가 청하는 독대는 칼레 대공의 뜻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럴 일이 없는데. 그는 불안한 심정으로 다시 평화의 홀을 찾아 들어갔다. 이번에는 문을 잠그고 두꺼운 커튼까지 손수 쳤다.

“무슨 일입니까, 아모랭 공작.”

다음날부터라면 몰라도 보통은 대회의 첫날부터 사람을 찾을 일이 없었다.

로렌의 대회의란 이름이 ‘대회의’지 기본적으로 짜고 치는 포커판이나 다름없었다. 물밑 교섭조차 하지 않은 안건을 갑자기 테이블 위에 던지는 바보는 로렌에 존재하지 않았다. 안건은 다수결로 결정된다. 황제의 표가 한 표, 세르에게 한 표, 그리고 여섯 대공에게 각 한 표. 다른 귀족들은 의견을 낼 수만 있을 뿐 안건 결정에는 권한이 없었다.

원래 한 표뿐이던 황실의 표에 세르의 표를 더한 것은 세시안의 조부인 루이 조제프 황제였다. 이 결정으로 인하여, 황실은 어떤 안건에 세 명의 대공을 설득하는 대신 단 두 명의 대공만을 설득해도 괜찮게 되었다. 찬반이 동수를 이루면 황제가 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르. 어떻게 그 사실을 지금까지 숨기셨습니까.”

세시안은 대공들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이 하도 많아 오히려 무덤덤한 얼굴을 해보일 수 있었다. 짚이는 것이 너무 많다보니 뜨끔할 수도 없었다. 온화한 미소를 세워두고 머리는 맹렬하게 돌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용 말씀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뜨끔했다.

“전설 속의 용 말씀이신지?”

“세르. 저는 이미 릴레벨트 해의 해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믿을 만한 사람 두 명을 통해 교차 검증을 끝냈습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을 텐데. 샤를루아 공작인 필리프는 혼행길에 따라갔던 보르디의 사유 기사단을 바로 영지로 내려 보냈다. 오를레앙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긴 했으나 시간을 한두 달만 벌면 충분했다. 그는 정보 교란에 대한 방해 공작이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믿을 만한’ 사람이 두 명이나 있을까. 잠깐, 미셸이 리젤로트에게 말하고, 리젤로트에게서 정보가 샜을까.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었다. 칩거 중이라곤 해도 시녀는 곁에 두고 있을 테니.

세시안은 사랑하는 여동생이 입이 가볍고 주의력이 부족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모레는 이 안건을 올릴 것입니다. 미리 읽어보시라 두고 가겠습니다.”

아모랭 공작이 문 밖에서 시종에게 서류를 받아서 테이블에 올렸다.

‘해안선 방비를 위한 전열함 구축 건에 대하여’

머리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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