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3)
아롈은 우스꽝스러운 손목 리본을 그대로 묶은 채, 평화의 홀이 아닌 다른 홀에 앉아 있었다. 로렌의 여자 신발은 주로 굽이 아주 높고 가늘었기 때문에, 코시카와는 달리 여자들이 오래 서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숙녀들은 주로 휴게실에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다가, 홀에 나가기를 반복했다.
일 년에 한 번 착용하는 어머니의 얼굴 때문에, 어머니의 가계(家繼)가 화제에 올랐다.
아롈의 외가는 로렌의 여섯 가문인 보르디 대공가였으므로 딱히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고,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탐탁한 기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롈은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얼굴에 웃음을 띠며 어머니가 중부 출신이라는 숙녀 하나가 자신의 외가는 장황하게 어느 가문에서 어느 가문을 통해 페란트까지 이어진다고 자랑을 하는 것을 들으며 남편의 이상행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고민의 주제인 세시안이 바쁘게 아롈의 앞을 스쳐지나간 것은.
무슨 일일까. 아까 아롈과 춤을 몇 곡 춘 남편은 시종의 귓속말을 듣더니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홀을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일까. 아롈 역시 체사레브나에 준하는 대우를 거쳐 체사레브나까지 해 본 사람이지만 연회 중에 사람을 부르는 일은 어지간하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면 그럴까, 생각하다가 썩 좋지 않은 추측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롈이 우연히 보게 된 남편의 서류는 중앙 기사단-로렌은 예스럽게도 근위병이 아닌 다른 군대에도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제1 연대에 대한 증설 요청이었다.
아롈은 어머니가 정확히 어느 군대를 빌려왔는지는 몰랐지만, ‘비밀 임무의 연장’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그들이 바로 ‘그’ 군대임을 알아차렸다.
강제로 팔을 잡혀 억지로 무릎 꿇었던 치욕을 애써 머리 한 쪽 구석에 밀어넣고, 아롈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머니는 정통성이 없다. 미하일이 있지만 그 아이는 어리다. 아직 한 돌도 안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대공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군대는 반발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 피아스트 전은 군대의 눈을 일단 국외로 돌리는 좋은 수겠지. 피아스트 국왕은 멍청했다. 코시카 군대가 옐레나 여제에게 불만을 갖는 것과, 속국의 국왕이 자신들의 황제-어쨌거나-를 모욕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설마 지금까지 피아스트를 밟고 있을까. 어디까지나 속국을 상대로 장기화되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적당히 밟았으면 자비로운 척 빠져야 하는데. 현재 축적해놓은 물자로 전쟁을 감당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겠지만 너무 잔인하게 굴면 주변의 속국들이.
아롈은 피아스트 전쟁이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도 알 수 없는 귀머거리 신세에 치를 떨었다. 지금 상황 같아서는 코시카와 웨데나의 전면전이 터져도 모를 지경이다.
피아스트를 너무 밟았으면 주변 속국들 중 대놓고 반발하는 나라는 없겠지. 그럼 많은 군인들이 본국에 돌아올 테고, 그 다음은 신랄하게 그들끼리 씹는 일만 남았다.
키옌의 피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알았다. 아롈이 근위병을 장악하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통했던 말이 ‘황통을 유리예프스키로 바꾸자는 말이오?’였으니까.
그러니까, 어머니는 아마도 숙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포는 가장 강력한 검, 그리고 가장 미약한 방패니까. 예를 들어 샤마노프 장군이나 카라키예프 대령 같은 자들은 지금 당장 백골이 되어 황도 바닷물에 수장되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다.
검지가 저도 모르게 올라가 미간을 문질렀다. 아롈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이 습관은 시녀들이 이반 파블로비치가 가지고 있다 해서 익힌 것이었다. 아롈은 회랑에서 사실을 확인당하기 전에도 알렉산드르가 자신에게 이반 파블로비치를 겹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의 애정을 받기 위해서 비굴하게 죽은 이반을 따라했다.
한창 바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아롈을 불렀다.
“전하?”
모두의 시선이 아롈을 향하고 있었다. 수백 가지는 아니어도 수십 가지는 되는 녹색 눈들의 앞에서 아롈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기본적인 곳에서 실수를 하다니.
“아, 요즘 곤하여 그만. 신경 쓰지 말게.”
“밤에 잠을 잘 못 드시는 거라면 향초를 써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어머, 어머, 뤼네트 양은 아직 결혼을 안 하셔서 뭘 모르시는군요. 향초가 도움이 될 리가 없잖아요?”
“어머나. 디뉴 공작부인. 무슨 말씀이세요?”
“신혼이신 분이 곤하실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꺄르륵, 하는 웃음이 가득 차며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아롈은 자신의 월경 주기나, 밤 생활에 관한 것이 정말 여상스럽게 입에 오르는 이블린의 생리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지금만은 다행으로 여겼다.
실수를 그냥 넘길 수만 있다면 임신, 임신하는 돌림 노래 정도는 웃어넘겨줄 수 있었다.
저 멀리 홀에서 아롈 쪽을 자꾸 바라보며 얼쩡거리는 남성이 눈에 띄었다. 수다를 떨던 부인 중 하나도 그를 발견한 듯했다. 대화의 주제가 순식간에 옮겨갔다.
“어머나. 저 빨간 머리는……. 멘 공작이로군요?”
“그가 연회에 나온 건 처음이죠?”
“열두 살에 멘 지방으로 내려갔다고 들었는데요.”
“참, 폐하께서도 무정하시지. 긴급회의까지 소집해서 계승권을 주실 정도로 아끼실 때는 언제고 저만치 클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시네요.”
“그야 클라리 후작부인이나 낭트의 아가씨가 그렇게 비명에 갔는데. 황후께서도 그 성격에 쥐잡듯 잡으시고……. 어머나. 실수.”
아롈은 옆에 앉아서 음료 시중 등을 들고 있던 앤을 흘끗 바라보았다. 연애를 들킬까봐 그런 걸까. 얼굴이 백짓장이나 다름없었다. 아롈은 턱짓했다.
“다녀오거라.”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가서 놀다 와도 좋단 말이다. 마침 저기 상대도 있구나.”
앤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멘 공작에게 다가갔다. 루이 앙투안은 앤을 보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아롈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딘가 잘못 짚었나? 하지만 손등에 입맞추고 가서 춤을 기다리는 모습은 꽤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아롈의 눈에만 보인 것은 아니었는지 부인들이 둘에 대해서 잠시 입방아를 찧었다. 이 주제 저 주제를 전부 거쳐 드디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기밀이라고 할 것도 없이 별 것 아닌 이야기들 뿐이었으나 정보는 듣는 사람이 활용하기 나름이었다. 본래 알던 사실이 많으면 여러 가지를 추론할 수 있기 마련이었다.
아롈은 코시카의 특급 기밀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정책까지 전부 알고 있는 위치였으므로, 별것 아닌 말로도 꽤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북쪽으로 포도주를 좀 더 많이 수출하게 되어 수입이 좋아졌다는 오베르뉴 출신의 어느 백작부인의 이야기는 아롈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아롈이 쫓겨나기 전까지만 해도 코시카는 지나치게 비싼 남쪽 산 포도주 가격을 좀 흥정하고자 동쪽 및 신대륙 산 포도주의 관세를 낮춰주는 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급 포도주라면 몰라도 값비싼 고급 포도주는 사치품의 대표격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남쪽 산 포도주 수출이 늘었다고 했다. 갑자기 같은 가격에 대한 포도주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을까? 멀쩡한 포도주 가격을 내렸을까? 아니다. 아마 남쪽 포도주 관세를 일정 기간 감해줬거나 아예 면제해줬겠지.
어머니는 다른 이권들을 몇 개나 로렌에 넘겼을까. 얼마나 져주고, 양보해줬을까. 아롈을 지지해주던 사람들은 또 얼마나 죽고 한직으로 떨어졌을까.
몇 명의 이름이 곧바로 떠올랐다. 아마 다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인 미하일을 지지하는 게 옳다고 군부가 흔들릴 시간도 주지 않고, 외국의 군대를 사용해서 일을 해치웠으니 아롈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전부 해치우려면 끝도 없었다.
입맛이 썼다. 이제 그 자리는 아롈의 자리가 아니니. 비난도 영광도 아롈의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