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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6)


     

준비해두었을 말들이 전부 쓸모없게 된 황후의 얼굴은 볼만했다. 아롈은 필리프의 주입 탓에, 황후를 만나기도 전부터 황후를 싫어하고 있었다. 어머니인 옐레나 여제가 보르디의 엘리엔으로 불리던 시절, 황후의 뺨을 갈겼다는 건 아롈이 생각해도 원한을 품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만나보니 과연 싫어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잡담을 나누는 내내 분을 삭이고 있었다. 병약한 오거스틴이 피곤하다며 들어가야겠다고 말한 다음에야, 자리를 파했다. 삼삼오오 일어나 각자 흩어지는 와중에, 아롈은 리젤로트를 붙잡았다.

“리젤로트.”

“새언니. 무슨 일이에요?”

아롈은 카메오에 대한 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얼굴에 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아까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일 정도면 마음이 많이 나은 듯하여 다행입니다.”

아롈은 급히 할 말을 머릿속에서 짜냈다.

“대회의가 끝나면, 제 방에 ​찾​아​와​주​시​겠​습​니​까​.​ 같이 차나 마시지요.”

“그럴게요. 그런데, 새언니.”

“예? 하실 말씀이라도?”

“으음……. 사실은요.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려면 처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리젤로트는 한창을 어물거렸다.

“리젤로트. 하실 말씀이 있다면 분명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내, 내일이면 알게 될 거예요. 그럼 저는 피곤해서.”

리젤로트는 갈색 머리칼을 찰랑이며 뒤돌아섰다. 아롈 역시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무거운 대리석으로 된 카메오에는 여전히 황후의 옆얼굴이 양각되어 있었다.

이 카메오가 바뀔 만한 일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남편과 리젤로트가 짜고 그랬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방금의 리젤로트의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혼자서 리젤로트가 부딪치리라는 생각을 하고 카메오를 바꿔치기했을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 아닌가.

대체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아롈은 손목에서 카메오를 풀어내 시녀에게 맡겼다. 리본 때문에 땀 맺혀 있던 손목이 시원해졌다.

“내 카메오 여분이 있느냐?”

“없는 것으로 아옵니다만…….”

여제의 얼굴이 새겨진 그 마노 카메오는 아롈의 혼수품 중 하나였다.

“그래? 일단 다시 묶거라.”

다시 나가봐야 했다.

 

“잠깐 시간 괜찮니?”

말끔하게 차려입고, 가발을 쓰고, 거울의 홀 바깥 분수대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앙투안은 세시안의 등장에 무릎을 꿇으려 했다.

“아니, 괜찮단다.”

세시안은 앙투안처럼 분수대에 걸터앉아 이블린 본관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성격만큼이나 단정한 선의 조끼와 셔츠만을 걸치고 있었다. 칼 같은 선의 재킷은 벗어둔 채였다.

그는 단추로 고정시키는 약식 크라바트 대신 정식으로 긴 레이스 스카프를 목에 칭칭 감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손으로 풀어냈다.

“많이 덥구나. 너도 앉으렴.”

“예, 세르.”

“네가 이블린에 온 건 정말로 오래간만이지. 네가 떠난 게 몇 살이었더라?”

“아홉 살, 아니 열 살이었습니다.”

“그럼 구 년?”

“예.”

“사실 너를 나바르에서 만났을 때는 많이 놀랐단다. 평기사로 있다고는 들었지만 신부를 수행하는 길에 따라갈 줄은 몰랐으니까.”

“미리 연락을,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사는 게 바빠서 네 생각을 못 하고 살았던 것 같구나. 새삼 무신경했구나 생각하게 되는걸.”

“아닙니다. 세르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이유가…….”

“옛날처럼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단다.”

앙투안은 양심을 관통당한 기분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여드름이 톡 터지듯, 그는 손을 저었다.

“저 같은 게 어떻게…….”

“너는 내 동생이잖니.”

-정말 좋은 분입니다.

그랬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상냥하고, 이성적이고, 공정하고, 참을성 강한 분입니다.

정말이지 그에게 좋은 사람 말고 다른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앙투안은 지금도 그리 성숙하지는 않지만 어린 나이에는 정말이지 천둥벌거숭이로서 날뛰는 소년이었다. 그런데도 성장하고 나서 하나하나 기억들을 떠올리다가 새삼 깨달았다. 아, 이복형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구나, 하고.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복 형수인 옐레나, 아니 엘리엔에게 한 말은 전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거꾸로 쥔 칼날이 되어 앙투안을 난도질했다.

“어머니가 다르다곤 해도, 넌 내 동생이고 아바마마의 아들이다. 잊지 말아라.”

분명 앙투안의 연정은 특정한 형태를 지닌 것조차 아니었다. 애초에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의 마음은 먼발치에서 닿을 수 없는 여인을 사모하는 궁정식 연애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앞에서 품은 그 작은 망상과, 두근거림이 죄스러워서 앙투안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워졌다.

“그래. 그 말을 하려고 왔단다.”

세시안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시 스카프를 매고 벗어두었던 옷을 걸쳤다.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

 

아롈은 녹초가 되어 자비관 4층에 올랐다. 대회의 내내 피곤했지만 황후 탓에 한결 피곤했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지 않았더라면 난간을 붙잡고 기어서 올라갈 뻔했다. 화장을 한 채 잠들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지만 간신히 화장도 지우고 옷도 갈아입었다.

침대에 앉아 엉망이 된 발을 손수 주무르며 끙끙거리고 있는데, 침실 문이 벌컥 열리고, 세시안이 들어왔다.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아렐르……?”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는 걸음이 불안했다.

“전하?”

아롈은 실내화에 발을 밀어 넣고 달려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남편을 간신히 받쳤다. 세시안은 양팔을 벌려 아롈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턱을 아롈의 어깨에 괴고 체중을 실었다.

“이러면 무거워요?”

“네. 무겁습니다.”

“많이?”
“네. 많이 무겁습니다. 전하. 취하셨습니까?”

“으음. 제 때 발을 못 빼는 바람에 꽤 마시긴 했지만요. 티가 나나요?”

“예. 얼마나 드셨습니까?”

“글쎄요. 술을 세면서 마셔본 적이 없어서요…….”

세시안은 아롈을 놓아주고는 뒤로 물러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코트와 조끼를 벗고, 스카프를 풀어 의자 등받이에 대충 걸쳤다. 점점 복장이 헐렁해지자 아롈은 낯부끄러워 뒤로 돌아섰지만, 그는 여전히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포도주로 시작했다가 로제도 마시고 백포도주도 마시고, 브랜디에 위스키에……. 아아, 아를랭 공작에게 잘못 걸렸어요. 부탁 하나 하러 갔더니, 신혼인데 술 한 잔 안 받느냐고 먹이는데 버틸 재간이 있어야지요.”

“아를랭 공작이라면……. 필리프의 큰아들 말씀이십니까?”

“네. 샤를루아 공자요. 아렐르도 봤던가요?”

“제게는 당질이 되니 알고 있긴 합니다만……. 얌전한 인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절대 아니에요.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술부대(sac,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을 일컫는 속어)라니까요. 아렐르와 이름이 비슷하다고 주량까지 똑같은 게 아니에요.”

“비슷하지 않습니다.”

세시안은 아롈의 단호한 부정은 무시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어느 새 남편은 뒤에서 아롈을 끌어안고는 머리카락으로 덮인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짜르르 소름이 끼쳤다.

“아렐르가 그 때 눈에 안 띄어서 다행이에요. 아렐르 몫까지 제가 다 마셨어요. 대공가 공작이란 공작은 다 쓸어와서 한 바퀴 돌았는데, 나중에는 배가 불러서 못 마실 지경이었어요. 그 판에 끼었으면 아렐르는 한 달쯤은 기절해 있었을걸요.”

“전하. 저는 그 정도로 술에 약하진 않습니다.”

“많이 약해요. 그러니까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술 마시지 말아요.”

“와인이나 브랜디 한두 잔 정도는…….”

“와인이면 몰라도 브랜드는 꿈도 꾸지 말아요. 약속했잖아요?”

“예…….”

세시안이 아롈을 뒤에서 안은 채 놔주지 않았으므로 둘은 어기적어기적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침대에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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