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설익은 혹은 농익은 (5)
“마담 라 세르. 황후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연하늘색 옷을 입은 미네트가 찾아와 그렇게 말했을 때, 아롈은 남편과 함께 있었다. 정확히는 남편이 아롈의 이마에 입술을 대던 참이었다. 이 날은 황제 부처가 거울의 홀에 나왔기 때문에 세시안과 아롈에게 쏠리는 시선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남편은 아롈에게서 조금 떨어지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마마마께서?”
“예. 세르. 세르께서는 오실 것 없다고 하셨답니다.”
미네트가 아롈이 든 잔을 눈으로 살짝 훑고 미소 지었다. 그 꼭 닮은 얼굴을 보니 절로 리젤로트가 생각났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 파혼하고 꼼짝없이 칩거해있더니 왜 그렇게 들떠서 복도를 내달리고 있었지? 그리고 세시안의 꾸중 한 마디에 풀 죽어서 돌아갔을까. 리젤로트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손질하다가 그냥 방에서 자는 걸로 결정을 내린 걸까?
“어디 계십니까?”
“평화의 홀이랍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롈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눈으로 앤을 찾았지만, 앤은 마침 다른 남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아롈은 별 수 없이 다른 시녀 둘을 거느리고 평화의 홀로 향했다.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줄을 섰지만 아롈은 로렌의 독특한 관습에 힘입어 무시하고 홀을 가로질렀다. 단 한 번, 황제와 눈이 마주쳤을 때 눈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평화의 홀은 의외로 버글거렸다. 아롈을 발견한 부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짙은 향냄새가 풍겼다. 아롈은 예의에 한 치 어긋남 없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피곤한 몸은 익숙잖은 향내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금방이라도 구역질 할 것 같았다.
“일어나렴.”
“가장 신실하신 황후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아롈은 치맛자락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앉은 이들의 면면은 마담 르와이얄 크리스틴, 부르고뉴 대공비인 마담 오거스틴, 마담 리젤로트 마담 미네트, 전 부르고뉴 대공비, 오를레앙 대공비 루이즈 안, 오베르뉴 대공비, 보르디 대공비 등이었으므로 전하 꼬리표가 달려있지 않은 아롈의 시녀들은 뒤에 시립했다.
리젤로트는 머리카락을 원통형으로 지지고 있었다. 대체 언제 저렇게 손질할 시간이 있었을까. 아까는 풀고 있었는데. 옷도 갈아입은 모양인지 분홍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폐하.”
“그래. 찾으면 안 되는 거니?”
처음부터 삐딱하게 나온다. 아롈은 그 말투가 미네트와 판박이임을 느끼고 한숨을 삼켰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이번이 황후와의 제대로 된 대면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후는 아롈이 나올 만한 곳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냥 바깥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옷은 생각보다 수수했는데, 색이 피부색과 어울리지 않아 얼굴이 거무튀튀해 보였다. 그녀의 딸들이 발루아의 연푸른색을 주로 사용하여 옷을 입은 것처럼, 그녀는 오를레앙의 선명한 노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노란색이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의 조카인 미셸이 노란색 옷을 입었을 때에도 심각하다고 생각했지만 황후도 노란색이 어울리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문병도 거절하시고 와병 중이시라 하여 심려가 컸습니다만, 이토록 쾌차하신 것을 보니 기쁩니다.”
소피는 황후의 병은 발가락에 있다고 빈정거렸지만. 아롈은 조금 더 날카로운 함의를 섞을까 하다가 참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자리에서 아롈의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성서를 읽다보니 갑자기 옛 생각이 나지 무어니. 그래서 불렀단다.”
옛 생각은 무슨. 그리고 남편이고 아내고 왜 이렇게 성서를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이본느나 소피에게 전통적인 방법인지 물어보기라도 해야겠다. 이쯤 되면 아롈이 찾아갔을 때 필리프가 성서를 들먹거리지 않은 것은 당장 가진 성서가 없어서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무슨 구절을 읽으셨습니까.”
“말하면 알겠니?”
“비록 소녀가 정교회에 몸담던 몸이온지라 성교회의 신앙의 깊이를 알기에는 부족함이 많사오나.”
기실 아롈은 툭하면 주님의 은혜니 성령 운운하는 남쪽 사람들에 비하면 신앙심이 부족한 편이었다.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려 애쓰고는 있사옵니다.”
“어머나. 코시카에서도 우리랑 똑같은 성서를 쓴단 말인가요?”
눈치가 부족한 오거스틴이 손뼉을 치며 물었다. 아롈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렇습니다, 오거스틴. 페란토 어 판본은 똑같답니다.”
“그럼 읽어보지 않겠니?”
미네트가 직접 일어나려 했지만 아롈은 손짓해서 시녀들을 시켰다. 아롈의 시녀가 성서를 받아다가 아롈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아롈은 성서의 표시 부분을 펼쳤다. 에제키엘, 아니 에스겔 서였다. 아롈은 예언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판본으로든 딱 한 번 읽고 치웠다.
이 부분은. 아롈은 눈으로 먼저 훑고 고개를 들어 황후를 보았다. 황후의 갈색 눈이 심술궂게 빛났다. 저 눈은 틀림없이 ‘알고 있는’ 눈이었다.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샜을까.
가장 쉬운 용의자는 황제겠지만, 아롈은 황제와 황후가 최근 동침했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앤일까. 아니, 앤이 황후와 연줄을 대는 낌새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황제의 시종일까. 그 쪽이면 아롈의 손이 아예 닿지 않는 자이니만큼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속담을 말하는 자마다 네게 대하여…….”
“잠깐. 왜 페란토로 먼저 읽지 않는 거니?”
“ecce omnis qui dicit vulgo proverbium in te adsumet illud dicens sicut mater ita et filia eius filia matris tuae es tu quae proiecit virum suum et filios suos et soror sororum tuarum tu quae proiecerunt viros suos et filios.”
발음은 틀린 곳이 없을 터였다. 페란토야말로 이 대륙에서 공식적으로 외교에 가장 널리 사용하는 언어였고, 외교 문서는 페란토 한 부, 각 나라의 언어 한 부씩 해서 세 부를 작성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당연하게도 군주는 페란토를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것을 모국어나 다름없이 할 수 있어야 했다.
바로 읽고 해석할 수 있었으므로 마침표가 없는데도 흐름에 말리지 않고 문장을 정확한 부분에서 끊을 수 있었다. 아롈은 표시해둔 부분 조금 전까지 읽고는 웃지도 않고 물었다. 뽐낼 것도 없이 여상한 일이었다.
“다음도 읽을까요?”
그 다음부터는 다음절과 이어지는 문장이었다. 황후의 기대를 충족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목소리며 눈빛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한 번 당하지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
오거스틴이 박수를 쳤다.
“올케는 참 페란토 어가 능숙하군요. 저는 너무 어려워서 그만 어렸을 때 포기했답니다. 호호호호.”
“과찬이십니다. 어깨 너머로 익힌 실력입니다.”
그럴 리가. 발음이 제대로 굴러가질 않아 혀를 칼로 찍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몇 번이었는데. 발음 연습을 하다가 혀를 대차게 깨물어서 울상 지었던 적은 또 얼마고.
황후는 입술을 깨물고는 부채를 흔들었다.
“뜻도 말해보렴.”
“옛 말을 말하기를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너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로다.”
쉬운 단어로만 이루어진 말이었기 때문에 단어를 찾으려 고심할 것도 없었다. 속담이 무엇인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기지를 발휘해서 옛 말로 바꾸어 말했다.
황후의 눈이 무시무시한 빛을 발했다.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이 그러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갑자기 네 어머니가 생각나는구나.”
심각할 정도로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한 공격이었다. 최소한 황제가 고른 구절은 따질 수도 없고, 따진다 해도 발을 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간 긴장한 게 아까울 지경이었다. 기껏 기세등등하게 여러 사람들을 부르고 준비해서 벌인 일이 이 정도인가.
“외양이 제법 닮았다는 소리를 듣곤 하니, 제 얼굴을 보고 여제 폐하를 떠올리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는지요.”
“아렐르는 어머니와 많이 닮았나보지요?”
크리스틴이 빙긋 웃었다. 미네트일 줄 알았건만 저 쪽도 한 패인가. 아롈은 ‘크리스틴을 좀 도와달라’는 남편의 부탁을 떠올렸다. 그간 자기 일만으로도 바빠 크리스틴을 방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혼자서도 잘 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말도 거의 더듬지 않았다.
“마담 라 세르께서는 코시카 여제 폐하와 빼닮으셨지요. 이 늙은이는 처음에 뵙고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답니다.”
보르디 대공비이자 아롈의 외숙모인 나바르의 마리 필리피느가 거들었다.
“어머, 그것 궁금하군요. 얼마나 닮으셨는지.”
미네트가 웃었다. 황후가 칠면조처럼 소매를 떨치고 부채를 내저었다.
“안 그래도 우리 로렌에는 좋은 관례가 있잖니. 그리운 얼굴을 한 번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