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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7)


 내가 뭘 잘못했을까.

소년은 아이를 끌어안고 멍하니 생각했다. 작았다. 채 식지 않아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다. 정수리에 검은 머리칼이 몇 가닥 붙어 있었다. 얼굴이 꼭 개구리 같아서, 울음도 토하지 못하던 입술에 실없는 웃음이 맺혔다.

말도 안 되게 이른 결혼은 분명 부담스러웠다. 아이가 생긴다고 했을 때에는 정말 어른이 되는 것 같아서 조금 설렜다. 아이의 이마에 입 맞추고, 성호를 긋고, 묻었을 때까지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현실 같지도 않았다.

아이는 다음에 또 낳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일 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주님께서 저를 부르시니, 주님의 자녀로서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부인을 새로 맞아야 해서 들인 약혼녀가 신께 서원하겠다며 수녀원에 들어갔을 때에는 웃으며 보내줄 수 있었다. 미셸에게 농까지 쳤다.

-주님께 진 건 어쩔 수 없잖아.

조금 허전했지만, 금세 괜찮아졌다.

그 다음은 여동생이 둘이나 죽었다. 남동생도 죽었다. 여동생 하나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하나는 결혼해서 부르고뉴로 가고, 어린 둘은 병이 위험하다며 시골에 내려갔다. 남동생과 자주 어울리던 사생아인 남동생도 지방으로 보냈다. 삽시간에 이블린이 비었다. 그 때도 홀로 남아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따라오겠어?

그간 두껍게 쌓인 편지들이 흑갈색 눈을 통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는 정중히 그 손등에 입 맞추었다.

-가시는 길 무탈하시길. 미래의 아스투리아스 여공.

처음에는 편지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구석에 있는 서랍에 두었다. 삼일 뒤에 전부 태웠다.

목매단 시체까지 와서는 목소리가 너무 커져서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눈물을 먹고 가라앉은 공기가 답답했다. 무슨 말을 해도, 돌아오는 것은 사람의 언어가 아닌 흐느끼는 짐승 같은 숨소리 뿐. 그 순간, 그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 지긋지긋해. ‘또 우는 거야?’라고, 발뺌할 수조차 없게 선명하게 생각했다.

그 생각이 시체를 만들었다.

실패는 영혼을 좀먹는다. 그는 뿌리를 벌레에게 내준 느티나무처럼 후회했다. 왜 그 때 조금 더 잘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후회해도 손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지도 않았다.

“전하?”

그는 생각을 흩어버렸다. 살아있는 사람을 끌어안고 할 생각들이 아니었다. 그는 풍성한 금발이 솟아오르는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예?”

부드러운 미소로 얼굴을 덮은 채, 무슨 일이냐는 듯이 웃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소녀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간을 찌푸리다가, 손을 들어 올리려 하기에, 먼저 선수를 쳐서 금빛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연둣빛 눈으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소리가 좋아서, 눈꺼풀에 몇 번 입 맞추었다. 정사 직후의 공기는 나른하게 풀려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라면 물어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아롈은 다리 다친 야생동물처럼 경계가 심했다. 세시안은 사람을 다루고 구슬리는 데에 능했지만 그 경계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롈이 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표면뿐이었다.

달콤한 말, 다정한 행동에 얼굴 붉혀도, 건드릴 수 없는 주제들이 절벽처럼 가로막고 있었고, 이 아름다운 소녀는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완고하게 자기의 이야기는 털어놓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드물게 적극적이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한참을 가늠해보던 그는 조심스레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아렐르.”

“예?”

괜히 이만큼 쌓아놓았던 유대감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까. 또 다시 날을 세우고, 눈을 치켜뜨며 벽을 세우진 않을까. 간신히 이만큼 친해졌는데.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는 과감하게 발을 디뎠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잠시간의 침묵. 긴장한 숨소리. 발갛게 달아오른 그대로 박제되어 곤란해진 얼굴.

그는 차분히 기다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혹시 휙 밀리더라도 실망하지 않도록, 와르르 무너지는 일이 있더라도 짧게 슬퍼한 뒤 다시 쌓을 수 있도록.

“그냥, 조금,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그랬군요.”

이리 와요. 속삭이자, 말랑한 뺨이 가슴에 닿았다. 아롈의 체온은 그보다 낮아서, 품 안이 서늘했다.

잠시 누워 빈둥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의외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급히 치장을 다시 하고 내려가면 늦었다 선에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과감히 먹고 무도회는 건너뛰기로 했다. 하지만 서류는 건너뛸 수 없었다.

옆방에서 아롈은 옷을 갈아입고 왔다. 새파랗고 단순한 비단옷을 걸치고, 흰 베일을 썼다. 긴 머리는 어설프게 말아올리고, 눈 쌓인 나뭇가지 모양의 아름다운 관을 썼다. 베일 옆으로 진주가 조롱조롱 늘어졌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다. 그 너머로, 제비꼬리처럼 채 올라가지 않고 흘러내린 머리채 한 가닥이 있다는 사설은 굳이 붙이지 않기로 했다. 지나가듯, 틀어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머리를 올렸으리라는 것 정도는 간파할 수 있었다. 손질에 능숙한 시녀들이 정교하게 땋고 말고 꼬아서 올린 머리모양이 아니었다. 한 갈래로 땋아내려 둘둘 말고, 핀 몇 개로 아슬아슬하게 고정시켜놓았다.

마주 앉은 채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이마가 간질거렸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망설이는 얼굴에 소년처럼 두근거렸다. 그는 의례적으로 웃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수를 셌다. 하나, 둘, 셋.

"전하."

역시.

"무슨 일인가요?"

"더 캐묻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지만, 제가 물어보면 이야기해 줄건가요?"

소녀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조심스레 갈무리해서 올려두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에 올라앉은 진주가 뽀얀 빛을 발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제가 다음에 물어보면 대답해 주겠다고 약속해주겠어요?"

아롈은 잠시 더 망설이다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미네트는 거울의 홀을 휘젓고 다녔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일곱 개의 불빛 아래에도 그녀는 빛나지 않을 만큼 수수하게 차리고 있었다. 리젤로트와 착각하지 않도록, 멍청하게 생글생글한 표정은 지운 뒤였다.

미네트의 손목에는 대리석으로 된 모후의 옆얼굴 대신 코시카 여제의 옆얼굴이 매달려 있었다. 미네트의 손목을 끌어다 입 맞추는 남자 따위가 있을 리 없었으므로, 그 누구도 미네트의 손목에 매달린 것이 대리석이 아니라 마노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창가 출신이기 때문에 좀처럼 이블린에서 그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부황의 공식 정부를 지나, 자비관 일 층을 전부 뒤졌는데도 목표물은 보이지 않았다. 미네트는 어둑어둑한 휴게실을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발이 욱신거렸다. 대체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미네트는 언제나 어머니의 뒤에 서있는 일에 익숙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황제의 딸로서의 삶은 모두 리젤로트의 몫.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지루한 뒤치다꺼리야말로 미네트의 몫이었다.

올케의 시녀를 찾기 위해 이블린을 뒤지는 일이 재미가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찾아서 말을 전해 주어도 아무런 보람도 감사도 인정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이 마노 카메오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걸 뻔히 아는데도 미네트의 구두는 정의관을 밟았다.

오라비인 세시안은 좀처럼 진심으로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부황은 딸자식들에게는 관대하기 이를 데 없어도 아들에게는 대단히 엄격했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성질머리를 보고 있자면 사내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부려먹으면서도 권력은 주지 않았다. 부자라고 해도 권력은 나누어가질 수 없는 것. 그런 살얼음판 같은 자리에 오라비는 이십 년 넘게 앉아있었다. 그는 미네트가 태어나기 전부터 세르였다.

언제나 그런 사람이 돌아섰을 때의 파장은 무서운 법이다. 미네트는 그 유한 성격의 오라비가 진심으로 어머니에게 화를 쏟아 붓는 것을 그리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미네트는 이쯤 뒤졌으면 면피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 이쯤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녀의 책임은 아니지 않은가. 멍청한 리젤로트인 척 하면서 카메오도 바꿔주었다. 모후를 두고 내려와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사람을 찾아 헤맸다. 이 이상 어떻게 하라는 거야?

기척이 났다. 이름이 기억 안 나는 하녀였다. 그녀의 뺨에는 벌건 손자국이 나 있었다. 미네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요?”

“황공하옵니다. 황후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벌벌 떨리는 목소리였다. 눈에는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모후께서 머리채라도 잡으신 건지, 곱게 틀어 올렸을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모후는 꿈을 꾼 후유증으로 며칠 째 잠들지 못해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다. 미네트는 다시 한 번 ‘천박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이제 모른다.

하지만, 분명 다들 나에게 화를 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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