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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9. 설익은 혹은 농익은 (9)


 아롈은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그대로 계단으로 향했다. 황후의 방은 대계단을 지나 모퉁이를 두 번 돌아야 있었다. 그러나 미네트는 내려가지 않고 도리어 올라갔다. 벽이 없는 방이 있었다. 황후의 방이었다.

아롈은 들어가자마자 주변을 훑어보았다. 황후는 침실에 누워있었다. 옆에서 시녀 몇이 수발을 들고 있었다. 아롈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 황후가 '들어오라' 따위의 말을 꺼내지 않았으므로, 아롈은 아직 입을 열 수 없었다. 황후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일어나라는 말이 없었다. 보다 못한 아롈의 시녀 하나가 꽤 크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황후의 어깨가 움찔했다. 눈이 가늘게 뜨였다. 하지만 다시 감겼다.

그 순간 아롈은 황후가 무슨 작정을 했는지 감을 잡았다. 아롈은 이를 악물고 눈을 내리깔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롈은 견뎠다. 이 정도는 각오한 바이기도 했고, 실수 따윈 하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한 바이기도 했다. 다리가 저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려 했지만 참았다. 신음 한 마디 흘리지 않았다. 계속 등 뒤로 사람들이 오갔다. 분위기는 살얼음을 걷는 듯 불편했다. 그들은 떠들면서 지나다니다가, 아롈을 발견하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또각또각하는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져갔다. 몇 번 반복하더니, 이내 아무도 근처에 오지 않았다.

아롈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황후는 잘못 생각했다. 아롈은 이유 없는 호의에는 약해도, 적의와 멸시에는 강했다.

아롈의 이름도 외우지 못하던 아버지, 없는 약속을 만들어 만남을 피하던 어머니. 콘스탄틴 대공은 언제나 '저것이 죽어야 내게도 순서가 돌아올 텐데' 하는 눈으로 아롈을 노려보았고, 조부는 심심하면 아롈의 얼굴을 겨냥하여 서류를 집어 던졌다. 비록 힘이 모자라 주로 치맛자락을 맞추긴 했어도, 노리던 과녁이 어디인지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남편이 그 풍부한 목소리로 아렐르, 하고 부르고 꽃을 주고 손을 잡고 입 맞추고 포옹하고 소중히 쓰다듬어주면 어쩐지 서러워 눈물이 났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도 잊어버려 허둥댔다.

이런 건 참을 만했다. 다시는 울고 불지 않는다. 추하게 굴지 않는다. 아롈은 코시카에서 시녀들 앞에서조차 눈물 비친 적 없었다. 흠 하나 보이지 않도록 자신을 담금질하는 데에는 능했다. 아롈은 그렇게 되뇌었다.

고통이 너무 심하다못해 감각이 없었다.

"어머, 내가 깜빡 졸았구나."

거짓말. 빤히 눈 뜨고 있었으면서.

“일어나렴. 미련하게 그리 계속 있어서 나를 매정한 시어미로 만드는 건 또 뭐라니.”

마침내 그 말이 떨어졌다. 황후의 눈은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비틀거리며 넘어지길. 추하게 창피를 당하길. 깃털 부채를 흔들며 ‘어머나, 네 어미는 그런 것도 교육을 안 시켰다던?’하고 비웃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롈은 이미 고통이 너무 심해 덜덜 떨리는 다리를 무시하고 매끄럽게 웃었다.

“제가 요령이 없었나봅니다.”

간혹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서 피를 통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곤 해도 하반신에는 거의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아롈은 해냈다.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우아하게 일어서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뒤에서 무릎 꿇고 있던 시녀들은 달라서 다들 나동그라져 일어나질 못했다. 시녀들이 다가가 그녀들을 일으켰다. 아롈은 이 자리에 일부러 앤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앤은 시키는 일을 잘 수행할 정도로는 영리해도 치졸한 싸움에 잘 대응할 인재는 아니어서 놔두고 왔다. 설마 이렇게 직접적인 방법을 쓸 줄은 몰랐지만.

“앉으렴.”

아롈은 원래 준비된 듯 비어있는 침대 옆자리에 앉았다.

“편치 않으시다 들었는데 들은 것보다는 안색이 좋으십니다. 이리 강건하신 모습을 뵈오니 기쁩니다.”

 

보르디의 필리프는 점잖게 웃었다. 외눈 안경 너머로 초록빛 눈이 반뜩였다. 깡마른 몸에 꼭 맞도록 재단한 코트에는 주름이 가 있지 않았다.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지리멸렬한 논쟁이 서너 시간 이어졌다. 함대 창설은 한두 푼 돈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대공가는 반대했다. 대공가의 표는 여섯 표가 있다. 그리고 황제에게 한 표, 세르에게 한 표. 대공가 세 개의 반대를 얻으면 완전한 승리, 두 개의 반대를 얻으면 절반의 승리.

함대 창설을 굳이 이 시기에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칼레는 똑바로 된 이유를 아직 대지 못했다.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종의 합의가 있는 것일까. 필리프는 몇 마디를 나눠보고는 알고 있는데 숨기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필리프로서도 보고서가 공표되면 피곤해졌다. 되도록이면 그냥 함대를 내주고, 용에 대한 것은 숨겨버리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가결 후 공표해버리면 무얼 하겠는가. 대회의는 이미 끝나버렸을 텐데.

칼레는 찬성, 오베르뉴도 찬성일 것이다.

나바르는 반대. 나바르에는 바다가 없다.

보르디는 무조건 반대였다. 이미 뒷거래를 하지 않았는가. 백만 루아르. 그리고 덤으로 칼레의 세력 축소를 원한다. 아들인 아를랭 공작을 통해서 세르가 전해온 부탁에, 필리프는 흔쾌히 승낙했다.

남은 대공가는 부르고뉴와 오를레앙.

부르고뉴는 마담 오거스틴이 대공비로 시집간 가문이었고, 오를레앙은 황후의 가문이었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반대를 해준다면 세르의 승리. 그의 시선이 절로 그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황후도, 마담 라 세르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본느와 소피와 함께 모임을 가진다고 했다. 황후는 몸이 아프다고 했고. 홀로 앉은 남자의 얼굴은 평온하고 단정했다. 아마 둘 모두에게 손을 썼을 것이다.

대공비와 황후가 그토록 서로를 물고 뜯어도, 오를레앙은 그간 제법 황실의 충성스러운 신하 노릇을 해왔다. 황후가 오를레앙 대공녀이며, 오를레앙 대공자는 세르의 친구이며 마담 리젤로트의 약혼자였다. 둘은 어차피 오랜 친우 사이이며 이런 일로 그 친분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그저 작은 균열이면 된다. 믿을 사람이 못 된다고. 이익에 따라 배반할 수 있다고. 언제까지나 오를레앙이, 가장 맨 앞에서 무릎 꿇지는 않으리라고. 그 순서는 바뀔 수도 있노라고.

그는 이 일을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여왔다. 오를레앙 대공비인 루이즈 안을 통해 황후와 접촉했고, 파혼과 혼사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비록 리젤로트의 혼전 임신은 계산 밖의 사고였지만, 이 일을 빌미로 오를레앙에서 거액의 위자료를 뜯어내기로 합의를 보지 않았던가. 소피는 대공비 자리를 아까워했지만, 세상에 남자가 그 뿐이라던가.

표결의 시간이 왔다. 필리프는 가장 먼저 반대표를 던졌다. 오를레앙 대공의 얼굴이 언뜻 흔들렸다.

나바르는 반대, 칼레는 찬성, 오베르뉴 찬성. 세르는 반대, 황제는 반대.

부르고뉴가 찬성표를 던졌다. 거기까지는 예상 범위내였는지, 세르의 얼굴에는 동요가 없었다. 카스티야 왕비가 부르고뉴의 대공녀 카트린느가 아닌가.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캐스팅 보트는 오를레앙에게 쥐어졌다. 그가 반대표를 던지면 황제가 전권을 행사할 필요없이 일이 부드럽게 끝난다. 그리고 찬성표를 던져도 황제가 전권을 행사해서 판을 엎어버리면 그만이다. 동점일 경우, 세 번에 한해 황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너무 과대평가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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