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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이전 화에서 ​@​_​t​s​u​i​s​a​k​i​님​께​서​ 이전 화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써주셨어요. ​(​h​t​t​p​:​/​/​p​w​-​s​e​c​r​e​t​.​t​i​s​t​o​r​y​.​c​o​m​/​3​0​)​ 그에 화답하는 의미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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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싹 - 센티넬버스 AU 외전 (2)


 세스는 옐렌의 가이드였다. 다른 센티넬의 가이드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센티넬은 가이드가 필요없다. 그렇다면 세스가 이곳에 발 붙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센터에 가져다놓았던 여벌의 옷과 구두, 가방 등의 의상 일속을 챙겨 홀가분하게 센터를 나섰다.

 -당신이 나빴어요.

 응, 미안해. 그런 말 말고는 딱히 해줄 말도 없었다. 언젠가는 분명 괜찮아지겠지. 그런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드물게도 망설이던 그녀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가이드 세스는 센터를 영영 떠나려던 참이었다.

 "세스! 세스! 세스 J. 발루아! 거기 서!"

 세스는 나름대로 친분이 있는 남자 가이드의 부름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고한 성정으로 인해 황제 폐하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옐렌과 달리 세스는 곧잘 다른 가이드나 센티넬과도 어울렸다. 즉, 처음 보는 사람이 있으면 통성명을 하고 얼굴을 마주치면 인사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세스는 옐렌의 가이드치고는 사교성이 아주 좋다는 평판을 받았다.

 "존슨. 안녕."

 세스는 생긋 사교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내일도 센터에 나와 변함없는 일상을 보내리라는 듯이 흠없는 웃음이었다.

 "오랜만이야. 네 센티넬은 괜찮아?"

 존슨의 센티넬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꼭 이름이 맹인안내견 같은 인상의 남자였는데, 담배를 피워서 이름답지 않다며 놀라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이름이. 설마 래브라도는 아닐 테고. 브라도? 레버? 브래지어는 아니겠지.

 존슨은 있는 힘껏 달려왔는지 헉헉거렸다. 가이드의 육체 능력은 일반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가이드는 센티넬을 달래는 힘이 아니면 일반인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아. 세스는 러닝머신에서 10km 정도를 쉬지 않고 달린 다음에도 끄떡 없던 한 소년에 대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지금 실려왔어."

 "그럼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트리버가 너를 불러달라고 해."

 머릿속에 전구가 켜지는 기분이었다. 리트리버!

 "무슨 일인데?"

 음, 사실, 나 이제 여기에서 일 안 해. 이제 그만 둘 거야.

 이런 말을 하면 그가 납득해줄 것인가.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이런 저런 사정을 마구 털어놔도 되는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세스는 여기에서 나가면 끝이지만 그녀가 지금껏 함께해왔던 그의 센티넬은 앞으로도 계속 센터에 있을 텐데. 말을 잘못 하면 뒷말이 도는 게 아닐까. 이미 충분히 돌고 있는 그에 대한 뒷담에 색채를 더해줄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세스가 그런 연유로 잠시 망설이는 동안, 트리버가 마지막 숨을 끌어올려 소리질렀다.

 "키옌 그 자식이 위험하대!"

 뭐?

 그녀의 상식이 깨졌다.



 굉장한 냄새가 풍겼다. 세스는 새로 산 구두를 신고는 도저히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우미우에서 산 핑크색 뮬은 그녀의 가는 발목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었지만 저 앞에 신고 갔다간 엉망진창이 되어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여기 저기 철근과 부서진 자동차 부품이 널려있었다. 사람 시체도 조금 섞여있었다.

 "저 앞입니다. 미스."

 트리버, 존슨의 센티넬이 존슨의 부축을 받아 차에서 내렸다. 그는 원래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환자였으나 기어이 옐렌을 구해야겠다며 세스를 데리고 이곳까지 운전해왔다. 아니, 위치를 알려주었다. 운전은 존슨이 했지. 세스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폭 넓은 스커트를 쥐곤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가셔야 해요.

 -음, 트리버 씨. 트리버 씨가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옐렌은 제가 필요 없을 텐데요? 이 주 넘게 제가 없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잖아요?

 -그 녀석이 괴물 같긴 하지만 진짜 괴물은 아닙니다.

 아끼는 구두인데. 저 길을 헤치고 갔더니 아무렇지도 않으면 정말 속상할 것 같았다.

 -당신이 나빴어요.

 새싹빛 눈에 눈물이 고이는 광경이 뇌리를 스치고, 그녀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잘못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옐렌은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그녀가 필요할 일이 있다면, 가야 한다.

 세스는 아직 옐렌의 가이드였다.



 핑크색 뮬이 도저히 못 쓸 지경이 되고, 햅번 스타일로 차려입은 그녀의 새옷이 사람의 몸보다는 쓰레기통에 어울리게 될 때 쯤, 세스는 그의 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지친 듯 시체 사이에 앉아있었다.

 "설마 저걸 잡은 건가?"

 트리버가 기가 차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거, 여왕 아니야?"

 세스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서러울 정도로 맑은 하늘 아래, 시체의 산에 오롯이 앉아 어깨를 늘어뜨린 소년이 있었다. 흰자위가 온통 붉었다. 창백한 뺨을 아로새기듯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오히려 그 흉악한 핏물이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장신구처럼 보였다. 긴 목선, 약간 튀어나온 목젖이 간신히 소녀가 아닌 소년의 티를 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긴 팔다리조차 조형물 같았다. 

 세스는 그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그 처참함에 조금 서러워졌다. 그래, 승리했구나, 옐렌. 너는 정말로 내가 필요없는 거야. 한 번 살을 저며내듯 찾아온 자각이 해일처럼 그녀를 덮쳤다. 세스는 홀린 듯이 아름다운 소년을 향해 걸었다. 도저히 사람의 태에서 태어났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피와 살로 된 날개를 두른 타천사 같은 소년을 향해서. 

 시체에 걸려 한 쪽 뮬이 벗겨졌지만 다시 신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스타킹을 신은 발가락이 금세 더러운 체액으로 젖어들었다. 세스는 그렇게 그를 사랑하는 소년의 앞에 섰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지만, 그녀가 사랑해주지 않아 고독한 승리자의 앞에 선 그녀는 사랑받는 자 특유의 오만함으로 불렀다.

 "옐렌."



 겨울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정신이 혼탁했다. 옐렌 P. 키옌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언제나 오만할 정도로 단정해서 '황제 폐하'라는 별명까지 붙어있는 그였으나 지금만은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반경 1km 내의 생물과 물체를 통틀어 가장 온전한 상태였다.

 주변은 그야말로 시체의 산과 체액의 바다를 이루었다. 그 모두가 옐렌이 해치운 이계의 괴물들로 형체를 온전하게 유지한 시체는 단 한 구도 없었다. 어딘가 터지고 부러지고 으깨졌다. 그리고 옐렌의 앞에는 그가 올린 전공 중 가장 눈부신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 

 주둥이가 움찔거렸다.

 [들어라. 인간의 군주여.]

 그림 같은 미모에 지친 비웃음이 피어올랐다.

 "난 왕도 황제도 아니야. 멍청한 괴물들의 여왕."

 [그대의 자격에 대해 논하느라 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마라, 인간의 왕.]

 옐렌의 팔 다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으나 여왕의 상태에는 댈 것이 못 되었다. 지쳐있던 옐렌의 앞에 마지막처럼 여왕과 그 기사 개미들이 나타났다. 교과서를 바꾼 소년은 발악하듯 싸웠고 결국 홀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에 비하면 살점을 물어뜯기고 수도 없이 얻어맞은 것은 싼 편이었다. 

 "꼴에 여왕이랍시고 명령하는 거냐."

 여왕은 무시했다.

 [나 아자엘 족의 군주, 존엄하신 황제의 여덟 수하 중 하나는 그대의 승리를 인정한다.]

 "하."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건 눈만 달려있다면 누구든 알 수 있어. 괴물."

 [하지만 오늘의 패배는 우리 전체의 패배가 아니다. 존엄한 황제께서 반드시 내 충성의 값을 치러주시겠지.]

 여왕의 두 개의 눈이 점멸했다.

 [저승의 품에 안겨 네 시체를 기다리겠다. 어린 인간의 왕이여.]

 명료한 저주가 끝났다. 방금 전까지 생명을 담고 있었던 거대한 몸은 무의미한 무기체와 유기체의 구조물로 바뀌었다. 큼직한 눈은 이제 붉고 단단한 보석에 불과했다. 그간 지겹도록 싸워온 종족의 군주를 무찌른 직후임에도, 옐렌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옅은 금발이 햇빛을 반사해 왕관과도 같은 광채를 내뿜었다.

 이겼다.

 그가 이겼다. 

 센터의 모든 사람이 틀렸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센터의 서포터들은 넌지시 옐렌에게 세스를 데려올 것을 권했다. 다른 센티넬들이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가면서도 죽어가는 와중에도 옐렌은 홀로 멀쩡했으나, 그들은 안전을 제일로 여겼다. 인류의 가장 큰 전력인 옐렌 P. 키옌이 전투 불능이 되는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지금껏 옐렌과 10% 이상의 매칭율을 나타낸 가이드는 세스 이외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완강하고도 단호하게 거부하지만 않았더라면, 옐렌 P. 키옌은 지금도 여전히 세스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보라. 가이드는 필요 없다. 개미의 여왕과 여덟 기사를 해치우고도 그는 온전히 살아있었다. 이 전공을 들이댄다면 다시는 센터의 서포터들이 옐렌에게 가이드를 붙일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할 필요도, 그녀를 안고 오감이 피어나는 괴로운 감각에 영혼을 상처입힐 일도 없겠지. 옐렌은 스스로의 능력이 비참할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돌아가야지.

 퍽!

 무겁지도 않은 몸을 염력으로 허공에 띄우려고 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통제에서 벗어난 염력이 멋대로 뿜어져나가 주변을 후려쳤다. 쌓여있던 개미들의 시체 파편이 부스스 허공으로 뿜어졌다. 오싹해졌다. 옐렌은 손을 들어 여왕의 몸을 가리켰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했다.

 펑!

 정교한 조작은 아까부터 무리였다. 그러나 방향 정도는 그가 원한 대로 움직여야 마땅할 터였다. 그러나 옐렌의 염력은 바로 앞에 있는 여왕의 시체가 아닌 뒤에서 터졌다.

 또다. 옐렌의 고요한 세계가 박살나듯 부서졌다.

 '통제할 수 없다'고? 내가? 이 옐렌 파블로비치가?

 뛰어난 미모만큼이나 명석한 머리가 제깍 문장들을 토해냈다. 석 달에 한 번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센티넬 교육 시간에 지겹도록 들은 내용들이었다. 

 -센티넬의 염력은 그 정신 상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따라서 전투 직전의 센티넬은 최상의 정신상태를 유지하도록 유의해야한다.

 -센티넬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약물은 약간의 알코올, 니코틴 등 아세틸콜린 유사 제재 및 부교감신경 항진제다.

 -교감신경 길항제 역시 비슷한 임상증상을 나타내지만 센티넬의 능력 향상에는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가이드의 체액과 접촉은 센티넬의 능력 향상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센티넬이 흥분할 경우 염력의 절대값은 강해지지만 통제가 되지 않으므로, 전투 시 절대 아드레날린 성 제재를 복용하면 안 된다.

 앵무새처럼 읊어 외운 문장들. 그 문장들이 프롬프터처럼 뇌를 스쳐지나가고, 마침내 굵게 칠해진 문장 하나가 옐렌의 머리를 지배했다.

 -센티넬은 일정 수준 이상의 염력을 사용하면 폭주한다. 폭주의 역치는 개인차가 큰 편이다.

 "하. 하하하하."

 폭주. 평생 없을 거라고 믿었던 폭주 상태. 언제부터 심박이 이렇게 증가했지? 심장이 두개골 안에 든 듯 심장소리가 미친듯이 울렸다. 반월판과 이첨판이 드럼의 채처럼 경쟁적으로 여닫히며 온몸에 피를 흘려보냈다. 동공이 확장되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런데도 오히려 기분은 한없이 느슨하게 풀려내렸다. 다소 졸리기까지 했다. 그가 아는 어쭙잖은 의학 지식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센티넬에 대한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있었다.

 -폭주란 센티넬의 신경전달 물질의 분비량, 또는 분비물질 종류에 이상이 생기는 현상을 의미한다.

 -센티넬의 폭주는 다음과 같은 종류로 나뉜다. 길항성, 항진성, 혼합성. 

 -폭주를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이드와의 성교, 혹은 성교에 준하는 점막 접촉이다. 그러나 가이드가 없을 경우, 혹은 가이드와의 접촉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험하거나 부상이 심각한 경우에는 약물 치료로 어느 정도 호전을 기대할 수 있다.

 -길항성의 경우 해당 신경물질의 투여로, 항진성의 경우 해당 신경물질의 길항 혹은 흡수 촉진/분해제로 치료한다.

 -혼합성은 중추신경 흥분 물질과 중추신경 억제 물질이 동시에 작용하는 폭주로 전체 센티넬의 1%만이 이에 해당한다.

 능력도 독특하게 강한 그는 폭주조차 희귀한 모양이었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옐렌은 눈부신 금발을 쓸어올렸다. 혈압이 올라 안구의 모세혈관이 터졌는지 온 세상이 붉기만 했다.

 "하하하."

 평생 없을 거라 믿었던 폭주 상태.

 옐렌은 자각한 순간 이 지옥에서 살아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 센터에 폭주한 그를 막을 센티넬이 남아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죽으려면 차라리 이 벌판에서 개미들과 죽는 것이 나았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그의 뇌가 남은 염력을 발한다면 사랑스러운 그녀의 손끝 하나 정도는 다치게 할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옐렌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

 "옐렌?"

 그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턱없이 무거웠다. 눈 앞에 온통 붉기만 한 그녀가 있었다. 이 지옥에서 홀로 숲 같은 환상이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부시게 사랑스러운 환상이 다시 그를 불렀다.

 "옐렌."

 "세스."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 두 어절을 입에 담는 순간, 시체처럼 말라비틀어지던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흥분했다. 강렬한 욕망이 창처럼 솟구쳤다. 

 -약 89%의 센티넬은 폭주 시 자신의 가이드에게 강렬한 성욕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이 욕구는 폭주가 끝난 뒤 사그라든다.

 옐렌은 그것으로 납득했다. 그런 이유여야 했다. 감히 환상을 상대로도 진심을 말하기 힘들었다. 

 "옐렌. 축하해. 굉장한 걸 쓰러트린 모양이네."

 여왕을 죽였으니 일단은 굉장하겠지. 그의 머릿속 한 구석은 그의 전공을 자랑스레 여기고 있었던가.

 "그래도 이게 뭐니. 몸은 조심하면서 싸웠어야지. 피가 나잖아."

 환상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흔들었다. 끊어내야 한다. 그렇게 정했다.

 옐렌 P. 키옌은 가이드가 필요없다. 옐렌 P. 키옌의 가이드는 세스 J. 발루아다. 그러니 옐렌 P. 키옌은 세스 J. 발루아가 필요없다.

 간단한 삼단 논법이다.

 눈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도를 넘어선 심박 때문에 고막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아리아 같은 목소리는 미치도록 또렷하게 들렸다.  

 "내 말 듣고 있어?"

 "가요."

 환상일지언정 달콤한 냄새가 났다. 심장이 저미도록 아파서 말을 하기조차 힘겨웠다. 뜯겨져나간 살점보다 그녀의 갸름한 턱선이 더 그의 상처를 크게 벌렸다.

 "제발, 가요. 환상으로도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

 당장 끌어안고, 입맞추고, 옷을 벗기고, 공개된 장소에서는 암시조차 할 수 없는 아주 야한 일들을 하고 싶었다. 힘으로 내리눌러 가두고 손바닥으로 감싸안아 난폭하게 가지고 싶었다가, 세상에서 가장 괜찮은 남자처럼 부드러워지고 싶었다. 혼자 보고 싶었다가, 온 세상에 내 여자라고 자랑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 혼자만의 생각이라는 진실이 상아로 만든 탑처럼 또렷해서 죽고 싶어졌다.

 "제발, 가요."

 환상은 여전히 서글픈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아, 옐렌은 눈을 감았다. 그렁그렁 맺혀있던 피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흘렀다.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환상일지언정 고양이처럼 사랑스럽게 그를 보고 웃어주었으면. 

 유언처럼 지니고 관에 들어가도 행복할 텐데.

 "있지. 눈 감으면 안 돼. 정신 차려. 내 말 듣고 있어?"

 목에 선뜻하게 차가운 손길이 와닿았다. 옐렌은 번쩍 눈을 떴다. 세상은 여전히 피로 붉었으나 경동맥을 찾아 꼬물꼬물 움직이는 손길만은 또렷했다. 입술과 턱이 경악으로 떨렸다.

 "진짜예요?"

 "환상 취급 당하는 게 기분이 좋지는 않은데."

 옐렌은 이를 악물고 손을 들었다. 한없이 가라앉아가던 정신을 억지로 채근해 그녀의 뺨을 만졌다. 혹여 당장이라도 그가 폭주해 그녀를 다치게 할까 두려웠다. 결국 그는 꽃잎을 스치는 정도의 힘밖에 주지 못했다. 그러나 손끝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은 꽃망울이 터지듯 황홀해서 도저히 착각할 수 없었다. 옐렌은 울었다.

 "당신, 당신이 왜.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다행히 맥박은 잡히는데 엄청나게 빠르네. 눈 감지 말고, 자지 말고, 정신을 잃으면 안 돼. 그거 기본이야. 잊어버리다니 바보구나. 교육 시간에 졸았어?     "가요!"

 버럭 소리질렀다. 그토록 크게 소리질렀는데 물 속에서 비명을 지른 듯 먹먹하게 들렸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그녀의 놀란 얼굴도 차라리 달콤했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니! 지금 옐렌은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 세스가 있었다. 왜? 어째서? 이런 물음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오직 그녀가 지금 숨쉬고, 앞으로도 숨쉬는 것만이 중요해졌다.

 세스는 선 자리에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붙박여 서 있었다.

 "왜 그래. 다짜고짜. 사람 놀라게."

 그는 물거품처럼 애타게 소리질렀다. 

 "가라고!"

 결국 흥분한 순간 그의 심장이 심실세동을 일으켰다.

 뇌에 혈액의 공급이 멈추고, 그의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세스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옐렌을 흔들었다.

 가라니까, 정말이지 그녀는 끝까지 잔인하기만 했다. 아무리 입술을 뻐끔거려도 그녀는 결코 그를 떠나지 않았다.

 "옐렌! 옐렌!"

 옐렌은 눈을 감지 못한 채로 정신을 잃었다.
편하게 써서 문장이나 텐션이 좀 느슨하네요. 즐겁게 보셨다면 기쁘겠어요. 다음편은 언젠가 쓰면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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