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눈송이 - 세시아롈 십이국기 AU (2)
이(二). 세시안
그가 처음 목숨을 잃은 것은 냉정하고 지극히 이기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스물여덟 살의 그는 한없이 곧아서 깨져버릴 것 같은 결벽의 소녀에게 반한 이후로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은 지극히 커져서 이내 그를 잡아먹었다. 그를 구성하는 요소 모두가 애정에 잠식되었다. 그 중에는 이타심도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가 존재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연인의 앞에 날붙이가 드리워졌다. 그 앞을 가로막지 않으면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영영 그를 잃은 채로 삶의 기로에서 끝을 맞고 떠돌 것이었다. 그는 존재하고 싶었다. 존재해야 사랑할 수 있으므로. 사랑이 곧 존재이고 존재가 곧 사랑인 상태에서 그는 스스로를 위해서 날붙이를 몸으로 막았다.
지독히 잔인한 결정임을 알면서도, 아내의 눈물과 숨소리에 안심하며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의 삶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름은 묘비에나 새겨져 가끔 역사가들이 뒤적여볼만한 죽은 글씨에 지나지 않게 될 터였다.
그러나 그를 맞은 것은 그가 평생을 바친 신앙처럼 주님의 곁에서 함께 하는 영생도, 지옥불에서 타오르는 고통도 아닌 자신의 울음소리였다.
소우린은 눈을 떴다. 구역질이 났다. 다시는 고기를 씹지 않으리라고 극구다짐했다. 고기를 씹고 앓아누워봐야 싫은 사람의 얼굴을 봐야 한다면 굳이 아플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차라리 죽도록 싫더라도 짐승의 모습으로 전변하여 황산으로 도망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물론 소우린은 황산도 지긋지긋했다. 울부짖는 저를 끌고 이리로 데려와 사실 나기를 짐승이라 주입시킨 것이 황산의 여선들이기에. 허나 이 곳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가는 팔로 몸을 받치고 일어나는데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침상에 드리운 휘장을 치우고 기척을 내자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와르르 들어와 소우린을 씻겼다. 이 세계의 궁은 옛 세계와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소우린은 아직 갈기라고 부르는 데에 거부감이 있었다-을 빗어올려 손질하는 시중을 받는데, 문득 거울에 비친 시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부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아무 것도 아니옵니다."
"그게 어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의 얼굴이냐?"
자비의 생물이라 하여 논리와 사고조차 죽은 것은 아니었다. 강단과 고집이 꺾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소우린의 매서운 다그침에 시녀는 결국 땅바닥에 엎드려 동무를 살려달라 읍소하였다. 말을 다 들은 소우린은 머리에 보요가 채 꽂히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면 태사의 뜻대로 하오. 다음은."
왕은 편전에서 정무를 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틀어올려 관을 쓰고 유와 포를 걸친 정복 차림으로 소매와 흉배에는 금빛 용을 수놓았다. 남쪽에 있다 하여 이름에도 남이 들어가는 나라의 왕답지 않게 딱딱한 차림이었다. 종왕은 옥좌에 느슨하게 기대어 상소를 펼치다 문득 반쯤 열려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매화나무 가지에 까치가 앉아있었다. 반가운 소식 전한다 알려진 새. 푸르스름한 날개를 바라보는 입가에 미소라도 서릴 만 하거늘, 언뜻 평온해보이는 태도와 달리 주름 한 점 없는 미간에는 웃음 대신 근심이 자리잡았다.
삼공은 저도 모르게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기린이 앓아누운 뒤로, 왕은 아침무렵 서쪽에 지고 있는 낮달처럼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 늙은 신선들을 불안케 했다. 종왕은 겨우 스물셋의 나이에 등극하여 선적에 이름 올린 지 오 년이 지난 젊은 왕이었다. 선왕, 혹은 선선대 왕부터 주남국에 봉사해 온 삼공이 보기에 그야말로 젖비린내 나는 어린 청년. 혈기방장하여 자리에 앉아있는 것조차 버거워할 나이가 아닌가.
그러나 왕에게 풍기는 분위기는 그런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마치 기억조차 지워진 먼 과거의 일을 더듬는 듯한 눈 때문에 태사는 왕을 농으로나마 손자 귀애하듯 할 수 없었다.
"아, 잠시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오."
까치가 포르르 날아갔다. 왕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태부가 허리를 숙였다.
"날이 참으로 좋습니다, 주상."
"그러하오."
"나라에 큰일이 없고 봄볕은 한가로운데, 이런 날 백성들은 꽃구경을 하지요. 주상과 재보께서도 봄날 하루 휴게를 가지며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보시는 것도 자못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태사는 태부를 보며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태부는 젊은 조카의 등을 떠밀듯 마저 권했다.
"주상께서 그리 마음 먹으신다 하오면 이 늙은이들은 물러나 견마지로를 다할까 하나이다."
왕은 난처한 듯 머뭇거렸다. 이내 초록빛 눈이 창밖의 꽃가지를 향하고, 또 아슴푸레하게 기억을 더듬는 듯 하더니, 상소문을 말아 쟁반 위에 올렸다. 태사는 눈을 의심했다. 지금의 왕은 갓 제 나이의 젊은이처럼 보였다.
"꽃이 고파 이러는 것은 아니오."
"여부가 있겠나이까."
"안 그래도 태보(台輔)가 앓아누워 근심이 컸소만 짐이 한 번 살피고 와야겠소. 급한 일은 대강 다 마쳤으니 명일 마저 듣도록 합시다."
속사포처럼 할 말을 마친 왕이 정원을 성큼성큼 걸어나간 뒤 태사는 태부의 옆구리를 찔렀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요?"
태부는 태사의 주름진 얼굴 앞에 해사한 미소를 띠며 조롱했다.
"대체 그 나이는 먹어 어디에 쓴답니까? 눈은 두어 어디에 쓰시고요?"
그 말에 오히려 태보(太保)가 버럭 소리쳤다.
"태부, 저 늙은이 눈치 없는 것에 왜 나이 탓을 하십니까!"
차라리 정신이라도 잃었으면. 소우린은 진심으로 그리 바랐다.
인의와 자비의 현신이라는 기린의 몸은 피와 시체에 극히 취약하다. 그저 고기를 먹는 것만으로도 몇날 며칠 앓아누울 정도로 쓸모없는 몸뚱아리는 잘린 사람의 목을 앞에 두자 그야말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육신이라는 그릇에 담긴 기린의 힘, 사람의 모습으로 전변하거나 사령을 복속시키게 하거나 식을 일으키는 그 신비한 힘이 요동치며 육신을 때렸다. 소우린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바스라질 듯한 몸을 스스로 그러안고는 시체 앞에 주저앉았다. 천한 것들 앞에 무릎꿇으면 아니 된다는 황녀로서의 자각은 고통 앞에서 무의미했다.
소우린은 비로소 깨달았다. 식은땀이 비오듯 흐른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주변에서 뭐라고 고함지르는 소리가 저 멀리 웅웅거렸다. 사형 집행을 업으로 하는 망나니는 귀하신 몸인 제 나라의 재보가 친히 왕림하여 집행 장면을 목격해버렸다는 사실에 정신을 반쯤 놓고 횡설수설했다. 집행을 지켜보고 있던 하급 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우린은 그저 공포에 질린 그 눈을 응시했다. 시체에는 억울함 한 점 없었다. 기린인 소우린이 상전으로서 시킨 일을 했을 따름인데도.
그녀가 소우린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시녀는 아니었다. 기실 소우린은 달려오는 동안 그녀의 얼굴조차 명확하게 떠올리지 못했다.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바로 그리하여 시중에 나가 육포를 사오라 심부름을 시킨 것이었다. 부정한 일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그 대가로는 산호로 꽃을 조각한 비녀 하나면 충분할 줄 알았다. 설마 목숨으로 그 죄를 치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죄목은 측근 시녀로서 재보의 보체(寶體)에 해를 가한 것.
형은 즉결로서 참수.
납득할 만한 죄목과 형벌이었다. 소우린은 왕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저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안일함에 통탄했다. 비록 하급이라고는 하나 선적에 올라 있던 시녀는 소우린이 목을 치는 모습을 목격한 그 순간부터 반 각 가까이 입을 끔뻑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폐부가 없었으므로 그 이야기는 그저 혀와 입술의 의미없는 움직임일 따름이었으나, 소우린은 그 중 몇 마디를 알아들었다.
태보. 왜. 저는. 무섭.
"아."
대체 무엇을 두고 그리 맹목적으로 믿었을까. 그저 자리에 앉아 우아한 장식물로 있는 것이 그리 중하였을까. 어차피 기린은 세상에서 가장 발이 빠른 짐승. 몰래 청한궁을 빠져 나가 하계로 내려와 머리카락을 천으로 싸매 감추고 육포를 직접 구하는 일 따위는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그저 황녀로서 자라고 기린으로 떠받들어진 소우린은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따름이었다.
고작 철없는 자해였을 뿐인데 그것이 생명을 앗았다.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었다.
"나는."
소우린은 손으로 입을 막고 떨었다. 슬프지 않았으므로 눈물은 나지 않았다. 뽀얀 보름날 달처럼 흰 손에는 붉은 피가 점점이 튀어있었다.
"나는."
말이 되다 만 숨이 힘겹게 토해져나왔다.
고개를 숙인 기린의 눈에 가죽신이 들어왔다. 몹시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신을 법한 질 좋은 혜(鞋)였다.
"……."
이 세계에서 단 한 명만이 알고 있는 이름이 불렸다. 소우린은 그 이름에 반응해서 고개를 들었다.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소우린은 홀린듯이 그를 불렀다.
"전하."
그는 소우린이 반항할 틈도 없이 그녀를 안아올려 추우에 태우고 다리를 등자에 동여매었다. 몹시 우스꽝스러운 꼴이었으나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우린은 추우의 목에 뺨을 기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왕은 조심스레 수건으로 소우린의 손등에 튄 피를 닦더니 훌쩍 뒤에 올라탔다.
고삐를 당기자 추우는 금세 하늘로 뛰쳐올랐다. 처형장이 있는 하계를 떠나 운해 위의 청한궁에 다다를 때까지 왕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소우린 역시 고집스레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왕은 소우린의 다리를 풀어주고는 안아올렸다.
몸이 흔들려 멀미가 났다.
"세상에, 태보!"
휘장을 걷고 푹신한 침상에 몸이 닿았다. 소우린은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짐이 다시 명령하기 전에는 처소 밖에 못 나가시게 하라."
그리고 끝이었다. 왕은 소우린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한 번 뺨을 쓸어내리지도 않고 등 돌려 편전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