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눈송이 - 세시아롈 십이국기 AU (3)
왕은 채 편전에 도달하기도 전에 정원의 관목을 걷어찼다. 가느다란 나무 줄기가 우수수 흔들렸다. 죄없는 식물에게 분풀이했다는 죄책감도 잠시, 그는 속에서 치미는 분을 담아 다시 한 번 나무를 걷어찼다.
이 세계의 왕은 폭군이 될 자유조차 없다. 정확히는 기린을 사랑하는 왕은 폭군이 될 자유가 없다. 암군이 되어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그 즉시 기린이 실도에 빠진다. 실도는 곧 명확한 병이다. 기린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마치 피를 뒤집어 쓴 듯.
종왕은 잘린 목을 앞에 두고 덜덜 떨던 소녀를 떠올리고는 다시금 치미는 분기를 삼켰다.
대체, 거길, 왜 내려가.
그는 차라리 소우린이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에는 그리 화나지 않았다. 그저 무엇이 소우린을 그렇게까지 몰아갔을까 안쓰러웠고, 옛 세상을 그리워하는가 서글프기도 했다. 금품을 받고 주인을 해할 물건을 들인 시녀는 왕으로서 일벌백계를 위해 마땅히 참해야 했을 뿐이었다.
왕은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는 소우린을 안다고 믿었다.
그가 아는 소우린은 시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차리더라도 혼자 납득하고 꾹 참거나, 혹은 바람과 같이 편전으로 달려와 눈을 치켜뜨고 따지는 사람이었다. 결코 홀로 기수를 타고 하계에 내려가 몸소 시녀를 구출하러 가는 이가 아니었다. 황제의 손녀로 태어나 귀하게 자란 만큼 아랫사람에게는 무심하고 직접 몸을 움직이는 법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믿었건만 그가 틀렸다. 그리고 그 틀림이 소우린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소우린의 목과 손등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크게 벌어진 동공, 끌어안자마자 반항도 하지 못하고 금세 허물어지던 몸.
대체 왜!
왕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나뭇가지만큼이나 가냘픈 어깨를 양손에 쥐고 흔들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는 맹세라도 받아내고팠다. 머리가 어찔할 정도로 화가 났다.
전변도 하지 못하면서! 사령도 부르기 꺼려하면서! 피만 보면 쓰러지는 주제에 어찌 겁도 없이 홀로 기수를 잡아 타고 하계까지 내려갔단 말인가?
왕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편전 앞에 엎드려있는 추우를 보고는 힘없이 웃었다.
지금 당장 저것을 잡아타고 봉산으로 달려가 왕위를 내려놓으면, 당신은 만족할까?
그야말로 젊은이다운 유치한 치기였으나, 그는 한순간 진심으로 그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졌다.
-전하.
꽃잎 같은 웃음을 흘리며 사랑하던 때가 꼭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멀었다.
-사랑합니다.
그 말도 흐릿하기만 했다.
왕은 속절없이 억울해져 뇌까렸다.
나는 당신을 잊지 않았는데. 당신은 왜 내게 이러는 건가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정을 잊지 않는 것은 힘들었다. 애정은 등불 같은 것이라서, 연료가 있어야 계속 밝고 따뜻할 수 있었다. 죽어 다시 태어난 뒤에도, 갓난아이가 약관의 청년이 될 때까지도, 그는 웃음과 입맞춤과 포옹이라는 연료 없이 그 스스로를 태워 연인을 잊지 않았다. 옛 이름이 가물거리고, 읽었던 책의 내용이 가물거리고, 부모와 동생들의 이름조차 아른거릴 때까지, 그는 잊지 못했다.
정작 저 먼 세계의 연인은 살아 그를 잊고 잘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무칠 때에도, 저 혼자 이 낯선 곳에 뚝 떨어져 홀로 그녀를 그리는 것에 서럽고 억울하고, 낮달처럼 마지못해 짓는 환한 웃음 한 번만 보면 소원이 없을 정도로 힘겨울 때에도, 그는 연정만은 신앙인 듯 품은 채 버리지 않았다.
연정의 대가 따위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죽은 다음에도 그녀를 사랑해달라고 요구받은 바 없다. 그러나 그 긴 시간 동안의 연정은 소우린이 큰 새를 타고 날아와 왕의 앞에 엎드린 순간 욕심으로 화했다.
다시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내가 그동안 당신을 사랑했으니.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욕심을 그러안은 채 현군인 척 위장하여 사람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왕은 그가 걷어찬 꽃나무의 가지를 무참하게 꺾어내었다. 가느다란 가지에 잎사귀도 없이 흰 매화가 조롱조롱 매달려있었다. 소우린이 보고 싶었다. 꽃을 받고 웃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무참하게도, 그는 소우린이 아직도 꽃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꽃가지를 바닥에 내던졌다.
나가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왕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소우린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금빛 갈기를 땋아내려 어깨에 걸치고는 수척한 얼굴로 정신을 잃은 채로 내내 앓았다. 시녀들은 처음에 왕명을 받들어 밤낮 없이 소우린의 곁을 지켰으나, 그 경계는 채 칠주야를 가지 못하고 느슨하게 풀어졌다. 잠들어 깨지 못하는 상전의 가슴 위로 속커먼 입속말이 곧잘 오갔다.
왜 우리 나라의 기린은 이토록 약골이실까?
무어 문제라도 있는 것 아닌가?
태과라서 그러할까?
하지만 저 안국의 기린도 태과라 하는데 이리 골골하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는걸 무어.
왕께서는 과연 천제께서 고르신 왕재라고 하건만 왜 하필 우리 기린은.
입 조심해. 왕께서 태보를 어찌 보시는지 몰라?
왕하고 기린이 어찌 그런 망측한 일을 한다고 그래? 헛소문이겠지.
그리 소근거리는 말을 나누다가, 시녀들은 재빨리 시선을 나누고는 죽은 동무를 생각하며 기린의 침소에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여느 때와 같은 어느날, 시녀들이 주렴을 걷고 사라져 발소리가 멀어지자 소우린이 눈을 떴다.
타고난 왕재.
소우린은 고소를 머금었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삼십 년 가까이 살았으니 당연할 터였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한 나라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감당하던 사람이었다. 삼공 이하 신하들은 왕을 두고 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타고나길 왕인 것 같노라고. 왕이 평범한 농민 집안의 둘째 아들인 것을 믿을 수가 없노라고. 오히려 선왕의 왕자보다도 귀태가 자르르 흐른다며 까르르 웃었다.
기린이 왕을 선택하며 그 이외에는 전부 평민인 이런 세계에서는 그저 농에 불과한 말이었으나 농이 때로 핵심을 찌르는 법.
그렇다면 그 말은 어떨까?
-쉿. 왕께서 태보를 어찌 보시는지 몰라?
그건 그저 죽은 사랑의 시체일 따름이다. 사랑한 사람도 사랑받은 사람도 죽었다. 그러니 사랑도 피를 흘리며 죽었다.
소우린은 사후통을 견디듯 힘겹게 일어나 침의를 벗고 옷을 걸쳤다. 봉산에 가야겠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종 태보."
봉산으로 향하는 길은 힘겨웠다. 전변하여 스스로의 발로 날아간다면 채 칠주야가 걸리지 않겠으나 소우린은 굳이 사령을 불러내어 등에 탔다. 그나마도 혈액으로 부정해진 몸은 때때로 사령을 불러내어 그 힘을 나누어주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결국 봉산까지 보름이 넘게 걸리고 말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사령에서 내리자, 마중나와있던 여선들이 무릎을 꿇고 고두했다.
소우린은 땅을 디디려다가 가냘픈 몸을 휘청했다. 무릎이 픽 꺾였다. 사령이 간신히 그녀를 받쳐주어 넘어지지 않고 무사했으나 병색은 역력했다. 소우린은 부액하려는 여선들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녀들이 질색이었다. 다시는 이 곳, 봉산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곳에 오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현군을 만나러 왔다."
"종 태보께서는 이 늙은이를 찾아 어찌하시려는지?"
채 여선이 달려가 말을 전하기도 전에, 옥구슬을 부순 듯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머리칼을 온갖 비녀와 보요로 장식한 젊은 여자였다. 소우린은 고통에 겨워 눈을 가늘게 떴다. 벽하현군.
그녀는 지선이나 비선이 아닌 천선으로, 여신 서왕모의 수하였다. 천계의 신적에 올라있는 기린에게 공대를 하지 않는 것은 그 탓이었다. 하계에서 만날 수 있는 이 중에서는 가장 이 세계에 관해 잘 알고 있을 인물이기도 했다.
"물어볼 것이 있어 왔다."
다리가 덜덜 떨렸으나 소우린의 말투에는 강한 위엄이 남아있었다. 기린의 위엄은 아니었다. 소우린은 기린으로서 이 세계에 붙들려와 연명했으나, 도무지 왕을 보좌할 뿐인 금빛 짐승이 될 수는 없었다. 지금 소우린을 지탱하는 것은 황녀로서 태어나 스스로를 황녀로 대우한 자의 자존감이었다. 갓 스물도 되어보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짧은 생이었으나, 그 생이 바로 그녀였으므로.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현군은 소우린을 보며 한숨을 쉬고는, 내실로 인도하였다. 소우린은 자리에 앉아 여선이 가져다준 용정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신선인 기린은 아무리 굶어도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허기와 갈증의 고통은 다소 달래졌다.
"혹여."
"그 전에, 들으셔야 할 것이 있네."
"뭐지?"
"주남국으로부터 난새가 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