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눈송이 - 세시아롈 십이국기 AU (4)
"주남국으로부터 난새가 왔소이다."
난새란 사람의 목소리를 외워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신기한 새였다. 은을 먹는 그 귀중한 새는 청한궁에서 자라며 옥새를 찍은 서류가 있어야 반출할 수 있었다. 즉 난새란 왕의 전갈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군은 소우린의 얼굴에 떠오르는 동요를 가늠하며 웃어보였다. 깃털부채를 흔드는 손목에 팔찌가 찰랑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전혀."
단호한 대답을 무시하고 말이 이어졌다.
"종왕께서 매우 간곡히 부탁하시더군. 혹여 기린이 갈 만한 곳이 있는지 소문 한 점이라도 들은 바 있다면 연통을 달라고."
"그래서?"
소우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아름다운 얼굴에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대답만 해. 대답만 들으면 내 알아서 할 테니."
현군은 한숨을 머금었다. 그 눈길이 소우린의 심기를 거슬렀다. 태초부터 있었다는 이 여선은 소우린을 어린 소녀인 양 취급하고 있었다.
"물으시오."
허나 지금 아쉬운 것은 소우린이었다.
"기린이 죽으면 왕이 죽지."
"그러하오. 선 태왕의 예로 볼 때 기린의 실도 이후 왕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약 한나절이 걸리오."
"기린이 죽어도 왕이 사는 방법은 없나?"
현군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소우린은 스스로 짐작하고 생각한 바를 덧붙여 물었다.
"아랫것들에게 하문하니 왕이 스스로 자리를 내려놓고 붕어하면 기린은 살아 새 왕을 고를 수 있다고 하더군. 선 봉왕의 예도, 채왕의 예도 있다고 들었다."
"분명, 그러한 예가 있소. 두 명의 왕이나 드물지만 세 명의 왕을 섬기는 기린도 있지."
"그러니 반대로, 기린이 물러나면 왕이 남아 새 기린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물은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소우린은 그저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웠다. 끝난 사랑, 죽은 애정. 언제까지 시신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걸까. 십 년? 백 년? 삼백 년?
왕은 어느 때이고 실수할 수 있는 존재이고, 소우린은 그걸 막을 힘도 의지도 없었다. 사람의 작은 실수가 엇나가 재앙 같은 폭풍이 되어 마음을 할퀼 때, 버틸 자신이 없다. 하여 소우린은 동그란 어깨를 힘없이 떨어뜨린 채 대답을 기다렸다. 더이상 어찌 보일지 신경조차 쓰고 싶지 않았다.
"종왕께서는 명군이시라 들었소. 지금까지 꼬박 오 년, 나라는 점차 제자리를 찾고 있다 하지. 아직 즉위 초기라 부족한 점이 많을 수도 있겠으나 시간을 가지면 점차 나아질 게요."
"내가 지금 기다리는 게 초조해서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나?"
소우린은 웃었다.
"나라가 어찌 되든, 민의가 어떻든, 나는 그런 것따위 하나도 느끼지 못해."
"종 태보. 그대는 분명 기린이오. 그대가 선택한 왕이 옥좌에 올라 나라가 안정되었소. 전변하지 못한다는 것 따위는 사소한 흠결에 불과해. 기린은 왕을 선택하고 보좌하면 그 뿐이오."
"대체 왜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지 모르겠군.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지 않아? 그만 둘 수 있다면 그만 두겠다는 거다."
"쓸데없는 말이 아니라 설득이라 하는 게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설득을 하든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대답을 해."
"그대는 막 이 곳에 왔을 때에도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결국 왕을 찾지 않았는가."
그 순간 소우린은 현군의 뺨을 후려갈겼다.
주남국의 린이라 소우린.
여선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처참하게 말라 갈라진 입술로 기린이 무어냐고 묻자, 여선들은 설명해주었다. 주남국의 왕을 고르고, 그를 보필하는, 주남국 백성의 민의를 대변하는 금빛 짐승이라고.
그녀들은 상냥하게 설명했다.
소우린은 본디 이 곳에서 태어날 운명이었는데, 식이라 불리는 폭풍 때문에 먼 세상에 쓸려가 인간으로 잘못 태어난 것이라고. 그녀는 이 곳에 '돌아온' 거라고, 돌아온 것을 감축드린다고.
새싹처럼 고운 연둣빛 눈이 식탁에 올라온 생선처럼 죽었다. 소우린은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괴로웠다. 그는 죽었는데 살아 숨쉬는 것이 원망스럽고, 그리 원망하면서도 보고 싶어 서러웠다.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자아였다. 하물며 새 세상,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라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요구였다.
그러나 그 귀에 들어온 것은 있었다. 기린은 고기를 먹으면 사기(邪氣)에 취해 수명이 줄어든다는 말. 하여 태과로 태어난 기린은 오래 살지 못한다고 했다. 소우린은 이미 전생에서 꼬박 십팔년을 살았다. 딱히 고기나 생선을 멀리하지도 않았다.
솔깃했다.
그날부터 소우린은 고기를 찾아 헤매었다. 봉산 안에는 기린을 지키기 위해 고기가 없었다. 사령을 잡으러 나가겠다고 해서, 옷을 입고 여괴를 타고 나가 복속시켰다. 사령의 복속은 놀라울 정도로 쉬웠다. 그저 눈을 노려보며 의지를 가지고, 복속하라고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요마는 쉽게 소우린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소우린은 그 요마를 부려 산짐승을 사냥했다. 갈색 털이 부드러운 토끼가 파르르 떨며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소우린은 속으로 미안하다 되뇌었다. 완전히 손질하고 요리하여 식탁에 올라온 고기를 먹는 것과 산토끼를 죽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하며 손수 토끼의 배를 가르고, 작은 살점 하나를 간신히 도려내어 불에 올려놓고 구웠다. 기실 굽는다기보다는 태우는 것에 가까운 행위였다. 검게 탄 고기를 입에 넣고 씹었다. 위에서 신물이 역류했다. 소우린은 간신히 구토하지 않고 고기를 삼켰다. 요동치는 배를 붙들고 울었다.
고통은 즉발적이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쓰고 있을 때만해도 잘 먹었던 육류였건만. 몸에서 열이 오르고 힘이 빠졌다. 금세 어지러워졌다. 소우린은 봉산으로 돌아와 죽은 듯이 잠들었다.
그러기를 꼬박 이 년 반이었다.
봉산에 찾아오는 승산자들을 만났다. 중일까지 무사하라, 혹은 말일까지 무사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엎드려 향을 피우는 이들을 흘끗 바라보고는 말 한 마디 없이 뒤돌아 사라졌다. 그저 머릿속에는 지쳐 끝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왕?
누구 좋으라고 그런 걸 찾아 엎드린단 말인가. 소우린이 평생 무릎 꿇어본 이는 평생을 통틀어 조부, 부모, 시부모 다섯 명 뿐이었다. 타고나길 고귀한 이들도 아닌, 천한 것에게 무릎 꿇는 것도 모자라 고개를 숙여 이마를 발에 대고 충성을 맹세하라니.
더군다나 그것을 맹세하고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왕을 옆에서 보필하며 명군이 되도록 돕고 조언하며 최대 수백 년을 살아가라니.
대체, 누구 좋으라고?
주남국의 백성? 소우린은 그런 이들을 모른다. 소우린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저 먼 세상에 있다. 남편을 잃고 울부짖는 소우린을 끌고 와 왕을 찾으라며 봉산에 내던진 자들이다. 소우린은 그 모두가 싫었고, 아주 약간의 좋은 일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소우린은 스스로가 기린이라는 것을 부정하며 주기적으로 고기를 씹고, 승산객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꼬박 십팔 년 동안 고기를 먹었으니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믿었다. 왕이 없는 기린의 수명은 삼십 년이라고 한다. 채소만 먹고 사기에 침범당하지 않은 기린의 수명이 삼십 년. 그러니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아무리 길어도 십 년이다.
십 년만 참으면, 끝내고, 곁으로 갈 수 있다.
그 날도 소우린은 승산객을 뿌리치고 사냥을 하러 황해를 돌아다녔다. 기린은 갈기를 풀어내려야 한다지만 전변하지 않는 소우린은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남편이 있는 여자였으므로, 긴 금빛의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내려 둥글게 틀어올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이 세계에 끌려올 때 끼고 있던 결혼반지와 약혼반지가 반짝였다. 살이 너무나 내린 탓에 반지는 남아서 뱅글뱅글 돌아갔지만, 소우린은 고집스레 반지를 끼고 다녔다.
그 때였다. 마치 뒤통수를 잡아 채서 끌어당기는 것 같은 이끌림이 느껴졌다. 소우린은 쫓던 사슴의 실룩거리는 엉덩이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그 이끌림에 저항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를 부르는 것은 거의 계시에 가까웠다.
소우린은 그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를 끌어안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싫었다. 이런 것에 움직이는 것은 그녀가 이제 짐승이 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싫어.
가냘픈 목소리로 신음하다가, 입술을 피가 날 때까지 깨물다가, 머리를 휘저었다. 소우린은 눈물이 떨어질 때까지 저항하다가 결국은 거조의 모습을 한 새를 불러 등에 탔다. 홀린 듯 그녀를 부르는 반짝임을 따라 날았다. 이틀이 걸리고 칠주야가 지나도 그 이끌림만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이끌림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졌다. 소우린은 저항을 포기하고는 흐름에 몸을 던지듯 날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그녀로 하여금 '왕'될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게 만들었다. 소우린은 사령에서 훌쩍 뛰어내리자마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감추듯 고개를 숙였다. 머리채를 묶은 비단끈이 풀려 긴 머리채가 흘러내렸다.
이 세계에 금빛 머리채를 가진 이는 기린 뿐이다. 그런 그녀를 보고 주변이 술렁였다. 뱃속이 꼬이는 듯 아파왔다. 대체 왜. 나는 왜.
그러나 본능적 이끌림은 거의 고통에 가까웠으므로, 소우린은 반쯤 울먹이며 서약의 말을 읊었다.
"곁을 떠나지 않으며, 명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성을 다 할 것을 서약합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었고, 동시에 빨리 끝내고 싶었다. '허락한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이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온 세상이 웅웅거렸다. 소우린이 입을 떼지 않는 '왕'에게 증오 비슷한 것이 생길 때쯤, 그 말이 떨어졌다.
"허락한다."
소우린은 잡아채듯이 그 발등에 이마를 댔다. 드디어 고통이 사라지고 눈에 사물들이 보였다. 손바닥에 모래알이 박혀 아팠다. 그가 신은 신발은 그리 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잘 손질하기는 했으나 아주 낡은 티를 감출 수 없는 천 신발이었다. 가죽신을 신을만 한 신분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소우린은 느리게 뛰는 심장이 당장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며 고개를 들었다. 입은 옷도 그리 질이 좋지 않았다.
귀하게 자란 소우린은 가늠할 수 없었으나, 그 옷은 그리 형편이 좋지 못한 이들이 아껴입는 가장 좋은 수준의 옷이었다. 비단도 아닌 무명, 수 한 점 놓여있지 않은 고와 유를 지나쳐 얼굴에 다다랐다.
미남이라 할 만한 얼굴이었다. 얼굴이 검게 탔으나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눈썹이 짙었다. 여선들이 지껄이기를 고금을 통틀어 못생긴 왕이 옥좌에 오른 예는 없다고 하였다.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소우린은 자포자기했다. 이제 정말 끝인 것이다.
스스로의 입으로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스스로의 입으로 충성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리 뱉어놓고 지키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면 정말 짐승이 되는 것이다. 기린이라는 짐승이 본디 그렇다고 하니 말을 지키는 것이 짐승의 증거인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소우린의 자긍심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기는 순간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여 소우린은 마음을 다해서 스스로를 지킬 생각이었다.
속눈썹 짙은 녹색 눈이 커지더니, 허락하다고 말한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소우린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는.
".......?"
그 순간 세상이 부서졌다. 부서져내리는 세상의 파편 한가운데에 그가 서있었다. 소우린은 그 상황을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그저 그 파편을 주워모아 날카로운 장면들을 기억 속에 억지로 쑤셔넣었다. 마음이 피투성이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