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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외전. 종려가지 기사단


먹먹해진 마음 틈새로 잊고 있던 기억이 스며들었다.

-사생아?

배 위에서의 일이었다. 누가 봐도 미남인 미셸을 수행하며 코시카로 올라갔다가 돌아올 때에는 놀랄 만큼 예쁜 얼굴을 가진 소녀가 호위대상에 추가되었다.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더없이 선명한 경멸을 표했다.

-과연, 알 만 하군요. 혼외정사로 태어난 사생아가 알량한 공작 지위 하나 쥐고 황자랍시고 뽐내다니.

어떻게 하면 그를 상처입힐 수 있을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팠다. 앙투안은 얻어맞은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첫만남을 잊고 있었을까. 더 나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만남이었다. 짓이긴 진흙 같던 말들 위로 애정이 덮였다.

가냘픈 뒷모습, 지켜줘야 한다고 이끄는 두근거림.

그런 유리한 심상만 남았다.

앙투안은 저도 모르게 아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또렷해서 낯설었다. 흠칫하여 눈을 내리깔자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흘끔흘끔 훔쳐보느라 초점이 흐릿한.

알고 있었다. 소녀의 지위는 지극히 높고 출생 또한 고결했다. 친조부가 코시카 황제요, 외조부는 보르디 대공. 황제의 손녀로 태어난 소녀는 냉랭한데다가 오만했고, 무엇보다 사생아를 경멸했다.

그저 잊고 있었을 뿐이다. 마치 그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마주할 일 없었던 것처럼.

"대체 무시당할 자리에서 도망가기는 커녕 일부러 찾아 기어들어가 걷어채이는 이유가, 발루아 경."

차라리 뒤돌아주었으면. 그럼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둥그런 어깨며 가느다란 허리, 언뜻 언뜻 역광에 희게 빛나는 턱선이며 복잡하게 꼬여있는 금빛 머리채.

당연하게도 아롈은 뒤돌지 않았다. 오히려 형형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어디에 정신을 빼놓고 있는 거지? 잠은 좀 잔 건가?"

"여섯 시간 조금 넘게 잤습니다."

자작나무 가지처럼 섬세한 손가락이 은빛 회중시계를 거칠게 열었다. 캬트 어로 '여덟 시 사십 분'하고 중얼거렸다.

"지금이 아홉 시도 안 됐는데?"

지난 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들어갔다. 붙어다니다가 우연히 아롈과 짧게 춤을 한 번 얻어추었다. 물론 앙투안이 특별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롈은 샤를루아 공작의 아들인 아를랭 공작이나 쥬스티느의 오빠 되는 나바르 대공자와 어린 부르고뉴 대공자와도 춤을 추었다. 별 것도 아닌 짧은 춤. 잘 아는데도 물색도 없이 들떴다. 이만 들어가라는 말도 무시하고 졸졸 따라다녔다.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 앙투안은 고개를 숙였다. 의자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면 으레 나오는 버릇이었다.

​"​피​곤​해​보​이​는​데​.​"​

"괜찮, 습니다."

"잠을 못 잤는데 괜찮다고?"

"예."

사실 괜찮지 않았지만 지금 자리를 피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무언가가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그만큼 앙투안은 정신없이 서러웠다.

"내 검술 스승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는데, 식사를 한 끼 못 먹으면 자갈밭에서 맨발로 싸우는 거나 진배 없고, 잠을 하루 못 자면 검을 놓고 맨손으로 싸우는 거라 다름 없어진다더군."

생명을 깎듯 잠을 줄여 사는 아롈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반박할 정신은 없었다.

"검술도 배우셨습니까?"

생-제맹 경이 불쑥 끼어들었다. 맥락을 툭 끊어놓은 데다가, 그리 적절하거나 재치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페린 경이 입을 뻐끔거리며 말리려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아롈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열두 살 때 그만 뒀지."

생-제맹 경이 뭐라고 또 말을 하려는 순간 페린 경이 발등을 밟아 입을 막았다. 때문에 선명한 녹색 시선이 온전히 앙투안에게로 꽂혔다.

"얼굴이 죽상이로군."

"그렇습니까?"

"잠도 잠이지만, 별로 좋은 소리 듣진 않았을 것 아닌가. 가서 마저 자고 예정대로 오후에 나오게."

사근사근하거나 다정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말투였다. 그럼에도 그 내용만은 가슴 뻐근하게 사무쳤다.

미뇽인 앤에게나 주어질 법한 관용과 호의였다. 아롈은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소녀였다. 페린 경이나 생-제맹 경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사정을 봐주지 않았을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 둘, 대공가 기수가문의 적법한 아들인 둘이라면 오늘 이리 서러운 일이 없었겠지.

그래, 속상했다. 말도 못 하게. 당신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런데 앙투안은 그게 좋은 선택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상처가 새빨갛게 벌어졌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지금 실랑이할 시간이 없어. 정말 안 들어갈 텐가?"

"예."

두 번 묻지 않고 돌아섰다. 앙투안은 몸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럼 마음대로 해."



"부단장님, 젊은 게 좋긴 합니다."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긴 생-제맹 경이 목소리를 낮추어 낄낄거렸다. 역시 갓 스물은 다르다며 소곤거리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앙투안은 복잡한 마음을 주워모았다. 갓 스물은 무슨. 스물도 되지 않은 그들의 주인은 지금 방 안에서 쪽잠에 들어있었다.

대회의가 끝나고 이블린으로 돌아온 아롈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치장을 고치려던 시녀들과 종려가지 기사들은 발소리를 죽여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응접실 문 앞에 서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몹시도 풍부한 목소리가 들렸다.

"앙투안."

"세르."

"형."

앙투안이 대답하지 않자 세시안이 멋쩍게 웃었다. 사생아 동생에게 무안을 당했는데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얇은 피로가 한 겹 드리운 단정한 얼굴.

"앙투안, 오늘 고생 많았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원래 뜻 다른 사람들 말을 들어주기란 그렇게 힘든 법이지. 어려운 자리를 선뜻 맡겠다고 해줘서 고맙구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자 어디를 건드린 듯 눈물이 솟으려 했다. 그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다행히 화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아렐르는?"

"주무십니다."

"지금?"

"예. 곤하셨던 모양입니다."

"하긴, 어제도 늦게 잠들었지."

세시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문을 열었다. 인기척에 민감한 로렌 황족답게 문은 그야말로 소리없이 열렸다. 아롈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잠들어 있었다. 팔걸이를 쥔 손의 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동요한 앙투안과 달리 세시안은 사뿐사뿐 다가가 아내의 뺨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아렐르. 일어나요."

소리가 날까 염려한 탓인지 문을 닫지 않았으므로, 앙투안은 부부의 사적인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었다. 잠들어있던 아롈이 눈을 번쩍 떴다. 혼란스럽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공포에 젖었던 눈이 상대를 확인하더니 이내 몽롱하게 가늘어졌다.

"세시안, 저 아직 화 안 풀렸습니다."

눈을 돌려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으나 어디까지나 생각에 그쳤다. 올라와있던 어깨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흰 손을 들어 가슴을 밀어냈지만 힘은 들어가있지 않았다. 지극히 무방비해보여서 심장이 뛰었다. 아마도, 앙투안에게는 평생 보여줄 일 없는 모습.

"미안해요."

"사과는 이미 들었고 납득했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화가 안 풀리는 겁니다."

"예, 알아요. 그래도 미안하군요."

짧은 한숨이 흘렀다. 아롈은 남편이 건넨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는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괜찮지 않을 건 또 뭡니까? 그보다 클라리 경."

"예."

앙투안은 죄를 지은 듯 크게 움찔했다.

"뭘 보고만 있지? 문 닫아."

"죄송합니다."

황급히 문을 닫자 방금 전의 광경은 완전히 가려져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투정 어린 목소리, 졸음 어린 얼굴도 모두 사라졌다.

"참, 고우십니다. 어리셔서 그런가?"

감상에 잠길 새도 없이, 앙투안은 경박한 말에 펄쩍 뛰어야 했다.

"생-제맹 경!"

얼굴이 붉어져 경고를 하려는 참에 시녀로 보이는 여인들이 까르륵 웃으며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차마 큰 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색색의 공단으로 감싼 등이 충분히 멀어지자마자 앙투안은 생-제맹 경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아니 부단장님.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미모 칭찬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요."

앙투안은 그제야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몹시 질 낮게 낄낄거리는 웃음만 제외한다면 결국 생-제맹 경의 말은 오를레앙 기사단 동기들과 떨던 수다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안 그렇습니까?"

앙투안은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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