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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눈송이 - 초고


11. 푸른 눈에 담긴 세상 - (5) (2)


-내 어머니, 옐레나 1세 폐하께서는 조피를 코시카로 유학보내달라 하실 겁니다.
 평생을 통틀어 단 며칠 동안 만났을 뿐인 빌헬름의 외종사촌 여동생은 분명 제법 조숙한 소녀였다. 본인이 당한 무례를 들이밀어 대가를 받아낼 줄 아는. 그렇다해도 고작 열여덟 살이었다. 근거 없는 상상력을 단순히 잘난 체 하기 위해 지껄일 수 있을 법한 나이다. 
 -사촌에게 이유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작은 빌헬름보다 조피를 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사실, 빌헬름에게 있어서는 전혀라고 할 만큼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아들과 딸이 모두 소중했으나, 국왕으로서 그 둘을 같은 무게로 둘 수는 없었다. 조피는 사랑하는 큰딸이었다. 언젠가 다른 나라에 좋은 신랑을 골라 시집보낼 때까지 유리종을 덮고 고이 보호해주고 싶은 귀여운 어린 아이. 그리고 어린 빌헬름은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의 왕관을 물려받아 뿌리를 마저 뻗을. 
 -답장은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줄에는 '코시카 여대공, 로렌의 마담 라 세르,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라는 서명이 있었다. 기묘할 정도로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였다. 
 빌헬름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굳이 이해하고 보듬으려 길게 고민하는 성품은 못 되었다. 코시카 대사가 올 때까지 사촌 여동생의 편지를 책상 서랍에 처박고는, 아량 넓은 오라비의 마음가짐으로 잊어버렸다. 그는 한숨을 삼켰다.
 "이모님."
 "네 머리의 왕관이라도 내 대신 써주랴?"
 빌헬름은 한 번 참았다. 
 여공은 왕관 대신 흰 머리를 정수리에 얹은 채로 웃었다. 노인의 입가에 주름이 나붓이 잡히고, 키예나로서 물려받은 청안이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식견을 빌려줄 수 있단 말이냐? 황궁을 떠난 지 수십 년이다. 내 알고 있던 것들은 죄다 먼지조각이 되었고, 내 아버지조차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뜨셨다. 시집 못 간 손녀 하나 마음에 걸려 연인 곁에 눕지 못하는 이 초라한 늙은이의 머리로 짜낼 수 있는 것들이, 네 왕관이 뱉을 수 있는 것보다 못하다면, 대체 그 왕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내 동생은 대체 왜 여기까지 시집와, 얼굴에 멍든 초상화를 남겨야 했단 말이냐?" 
 멍든 초상화? 빌헬름의 어머니, 코시카의 옐리자베타 여대공이자 작센의 엘리자베트 공작부인은 초상화를 몇 장 남기지 않았다. 당연히, 얼굴에 멍 든 초상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질문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막듯 이모의 힐난은 줄줄이 이어졌다. 
 "무엇을 알려주랴?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게 아니라면 직계의 공주를 내놓으라 강짜 부릴 리 없다는 걸 새삼 알려줘야 알 수 있다는 말이냐? 아니면 작센이 망할 나라라고 설명해주랴? 내주면 나라가 십 년 뒤에 망하고 내주지 않으면 당장 망하리라고?" 
 "작센이 웨데나처럼 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 웨데나조차 나라는 부지했고요."
 이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폐하, 저는 코시카의 것이고, 코시카는 위튼의 것입니다."
 조롱기 어린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푸른 시선이 심장을 관통하는 창처럼 떨어져내렸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하겠느냐?"
 도저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잠을 못 이루던 그 많은 날에, 고민에 고민을 거치는 동안, 머릿속에 코시카 옥좌가 떠오르지 않았다고는.
 이반 3세는 슬하에 세 명의 자식을 두었다.
 마리야 이바노브나, 옐리자베타 이바노브나, 파블 3세. 
 눈 앞의 마리야 이바노브나는 낙혼하여, 남긴 자손이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 뿐이었다. 파블 3세의 자손은 공식적으로는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둘 뿐이었다. 사생아인 마리야 파블로브나 유리예프스카야와 도망친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까지 다섯 명 중 미하일을 제외한 네 명 모두 코시카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거나, 황위에 오르기 부적절했다. 
 그리고 둘째인 옐리자베타 여대공의 자손이 바로 이 작센 왕실이었다. 이반 3세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작센의 형제들이 코시카를 승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은 걸음마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기였다. 미하일의 다음은,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이 계승권을 포기했으니, 코시카 승계법에 따른다면?
 적어도 아주 멀리 있지는 않을 터.
 빌헬름은 지금까지 코시카 승계법에 그리 크게 관심이 없었다. 손만 뻗으면 알아볼 수 있을 터인데도, 여태 그 옥좌는 남의 것이었다. 괜히 알아보아 욕심을 키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아랫배가 아려왔다. 
 태고로부터 이어져내려온 남의 단단한 뿌리에 연약한 위튼의 줄기를 접붙일 수 있다면.
 코시카 승계권은 그의 죽은 어머니가 물려준 빌헬름의 정당한 권리였다. 빌헬름은 순식간에 쏟아진 깨달음의 파도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그것 보렴."
 문득 시선을 올렸다.
 이모의 
 새파란 눈이
 그를 질책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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