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회색 세계


투고 | :v

2


.

 나는 묵직해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날이 가면 갈수록 몸은 그 무게를 더해가는 기분이었다. 어느날 일어나지도 못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마음속으로는 그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고 담요를 거둬 가방에 넣고는 매고 일어섰다. 이제 하루치 식량밖에 없었다. 하루 정도는 버틸수 있을지 몰라도 그 다음날, 그 다음 다음날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나는 권총이 품에 있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하고 여관을 빠져나왔다. 이틀 내내 내리던 비는 그쳐있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건물들을 한번 더 확인했다. 식량도, 총탄도 없었다. 나는 욕을 내뱉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이 길을 따라 내려간다면 마이애미에 도달하리라.
 마을을 빠져나와 다시 숲속 길로 들어섰다. 모든 나무들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쓰러지는 나무들은 위험을 뜻했다. 지금 같은 세상에서 나무에 깔린다면 권총으로 자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숲속 길을 두서너개 정도 지나치고 마을 한 두개 정도를 지나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건물과 시체들만이 남아있었다. 세상은 멸망했다.
 다시 숲속길로 들어섰다. 만들어졌던 숲의 길은 죽은 나무의 죽은 낙엽들이 덮어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지도에 의지해 길을 가는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아니 운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는 모르지만 2층짜리 저택을 발견했다. 꽤 컸고, 마치 남작의 저택같은 분위기를 띄었다. 잘 정돈되어 있다면 그러겠지만 하얀색 페인트가 죽죽 벗겨진 지금은 그저 어느 싸구려 B급 공포 영화의 소재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품속에 있던 리볼버를 꺼내고 저택으로 다가가 열린 창문으로 들어섰다. 아주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안은 아직 어느 정도 끝나기 전 세상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천체 망원경과 가구들. 나는 그것들 사이를 지나쳐 식량을 찾았다. 서랍장 안에는 녹슨 나이프들이 들어있었다. 이가 전부 빠져 쓰지도 못할듯 했다. 이곳도 아무것도 없는가 했지만, 벽장을 열어보자 콘 통조림과 여러 통조림들이 놓여져 있었다. 합쳐서 일곱개.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횡재했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통조림들을 싹 쓸어담고는 집 안을 좀 더 살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지하실로 가는 길이 바깎쪽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나는 매우, 매우 좋지 않은 감이 들었다. 권총을 들고, 빠루를 찾아내서 자물쇠를 통째로 뜯어 열었다. 열지 않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다른쪽으로는 이 문을 열어야만 하는 감이 들었다. 안은 시커맸다. 나는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권총을 품속으로 집어넣고 라이터를 꺼내서 불을 일으킨 다음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어제의 비 때문인지 안은 매우 음습했다. 하지만 묘하게 따뜻했다. 나는 불안감이 닳은 신발의 발끝부터 척추까지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라이터를 한 손에 들고 무슨일이 있으면 당장 쏴버릴 기세로 품속에 있는 리볼버를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나는 그 불안감이 무엇이였는지 알았다.
 지하실의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사람들이 옷을 발가벗고 있었다. 무척이나 더러웠지만, 성교나 그런 일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니, 그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뭔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가축들. 약탈자들의 가축들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두어걸음 뒷걸음 쳤다. 누군가 안에서 아,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더더욱 뒷걸음 쳤다. 두려움에 몸서림쳤다. 맙소사, 맙소사. 오 주여 빌어먹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뒷걸음 쳤다. 하지만 품속에 있는 리볼버는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지옥에서 끌어올린 듯한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나는 그저 뒷걸음 치다가 계단에 도달했다. 유일한 조명 앞에서 그들은 피폐한 몰골을 그대로 들어냈다. 마치 감염자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이었고, 약탈자들의 가축이었다. 나는 그들이 마치 영화에서 본 감염자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대로 계단 위로 뛰어올라갔다. 사람 한 명이 내 다리를 붙잡았지만 뿌리치고 올라갔다. 그들은 소리질렀다. 계속해서.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곧장 일어섰다 일어선 다음 눈에 띄지 않는 무거운 물건을 찾았다. 나는 바로 옆에 있던 가구를 밀어서 지하실을 완전히 밀폐시켜놨다. 그때였다. 정문 너머로 약탈자들이 돌아오는게 눈에 보였다. 나는 완전히 공포에 질린 상태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창문으로 도망치면 놈들에게 보일 것이 뻔했다. 이런 빌어먹을, 지하실에 들어가는게 아니였는데! 하지만 후회해봤자 늦었다. 나는 곧장 이가 빠진 녹슨 나이프를 챙겨든 다음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2층에는 방 하나와 화장실 밖에 없었다. 나는 방 보다는 화장실에 숨었다. 화장실 안은 피범벅이였다. 아마 가축을 도축할때 화장실을 쓰는듯 했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토할것 같은 기분을 밀어넣고 화장실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무릎이 떨렸다. 오 빌어먹을 젠장할 주여. 나는 죽어버린 신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죽어버린 신은 대답해오지도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는 쥔 나이프를 만지작 거렸다. 녹이 슬었고, 이가 빠져 날붙이 보다는 둔기의 느낌을 주고 있었다.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약탈자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오늘도 힘들었군. 남자 하나는 뼈밖에 없던데. 그래, 그래도 뭐 먹을만 했지. 그렇지 않아? 그럼. 서로 다른 목소리가 교차했다. 셋 정도. 리볼버의 총탄은 다섯. 죽이고도 자살하기 위한 탄이 두 개나 남았다. 그때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뒷정리좀 하고 올께. 뭣하러? 또 도축하면 화장실 더러워지잖아. 여자가 올라오는 계단의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런 빌어쳐먹을 일이 다있나. 나는 문 앞에서 기다렸다. 문 뒤에 숨을 공간이 간신히 있었다. 나는 그곳에 숨었고, 숨자 마자 문이 열리며 여자가 들어왔다. 심장이 뛰었다. 멈출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자가 들어오고 나서 문을 닫았다. 내 쪽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이게 최초이자 최후의 기회임을 알았다. 나는 곧바로 뒤에서 여자를 덮쳤다. 먼저 입을 막고, 이가 빠진 녹슨 나이프를 경동맥에 때려박았다. 여자의 경동맥에서 피가 촥하고 튀며 피투성이인 화장실 안과 내 손, 그리고 입을 막았던 왼쪽 소매를 흠뻑 적셨다. 나는 갓 시체가 된 여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마치 마구 폭주하는 기관차의 엔진같았다. 방금 본 가축이 된 인간들의 모습과 찔러 죽인 여자. 나는 심호흡을 하며 품에서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아래서 소리가 들렸다. 누가 여기 지하실을 막아놓은거야? 몰라. 아 젠장할. 그러면서 가구를 미는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지하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익숙해진, 지옥의 목소리도 들렸다. 우릴 살려줘, 살려주란 말이야! 이런 빌어먹을 개새끼들, 누가 연거야 이거! 뒈져, 뒈지라고 씨팔새끼들아! 살려줘! 우린 인간이야, 가축이 아니라고! 닥쳐 씨발년들아! 약탈자들의 욕설과 가축이 된 생존자들의 처절한 비명이 교차했다. 그리고 연발된 라이플의 발포가 들렸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나는 리볼버를 꺼내들고 화장실의 문을 열고 벽에 바짝 붙었다. 약탈자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런 개같은 일이 다있나. 어떤 개새끼가 이 문을 열어놓은 거야? 몰라. 사라는? 왜 아직 안내려오지? 나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이제 보니 지하실은 부엌 근방에 있었다. 나는 리볼버를 겨누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둘 남았다. 라이플을 든 약탈자와 나이프를 든 약탈자가 지하실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라이플을 든 녀석의 머리통에 리볼버의 가늠쇠를 조준하고 방아쇠울을 당겼다. 세상을 바꾸는 듯한 불꽃과 총성. .44 매그넘탄이 반동이 손바닥을 때리며 올라갔다. 실린더가 돌아가며 리볼버의 약실을 바꿨다. 네 발. 나는 옆에 있는 녀석을 조준했다. 녀석은 방금전 내가 짓던 표정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최근 처음으로 말한 사람과의 대화였다. 다른 사람이 더 있나? 녀석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강한 총성이 들리며 녀석도 쓰러졌다. 나는 뜨거워진 총신을 잡았다. 뜨겁군. 나는 화약 내음을 맡으며 품속으로 리볼버를 쑤서넣었다. 그다음 머리가 터진 약탈자 둘의 시체로 다가가 라이플을 쥐어들었다.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