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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진 감정들 속에서 단 하나 날카롭게 살아있는 유일한 감정이 손을 떨게 만들었다. 두려움, 공포. 공포를 이겨내야 한다는 소리는 개소리였다. 공포가 인간을 살아남게 만들었다. 꽉 잡은 라이플을 앞으로 겨누며 비트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약탈자들의 트럭이었다. 또 다시 트럭이군, 약탈자들과 함께. 하지만 트럭은 세 대였다. 엄청난 몸집의 약탈자 무리였다. 이때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나는 거대한 손이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손이 떨렸다. 다가오면 쏴야해. 나는 계속해서 자기 최면을 걸었다. 다가오면 쏴야한다고. 떨지마. 떨면 빗나가. 그럼 네가 데리고 갈 길동무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아져. 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내밀면서 적들을 봤다. 서치라이트까지 비춰놨군. 운이 나쁘다면 나빴다. 하지만 서치라이트가 움직이지 않는걸 봐서는 그저 고정식인듯 했다. 아니면 돌림판이 고장났거나. 나는 후자든 전자든 전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세 번째 트럭에서 인질들, 그니까 붙잡힌 생존자들이 끌려나왔다. 그들은 인질이 아니라 먹잇감이라고 불러야겠지만. 나는 총을 꽉 잡았다. 어서 떠나. 빌어먹을, 어서 떠나라고. 방수포를 뚫고 들어오는 땅의 한기가 손을 더욱 떨게 만들었다. 비트 밖으로 라이플을 겨누고 가만히 숨죽여 있었다. 죽음이 가까히 다가온 기분이었다. 여느때보다도 더 크게. 그들은 거기서 10분 가까이 서 있었다. 비명 소리도, 총성도 하나 나지 않는 기분나쁜 침묵과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누군가 도주했다. 어렴풋이 보였지만 보초들이 전부 뒤를 돌아선 사이에 누군가 품에 아이를 안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빌었다. 빌어먹을, 이쪽으로 오지마. 이쪽으로 오지 말라니까. 쏴야만 한다고. 두려움과 추위에 팔 근육은 경련했다. 차쪽에서 고함을 지르는게 보였다. 도망자는 아이를 안고 직선으로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오 빌어먹을, 안 돼. 그때 총성이 울렸고, 도망자는 비트 앞에서 풀썩 쓰러졌다. 나는 그저 눈을 비트 밖으로 내놓고 있었지만 죽어가는 도망자의 눈에는 내가 보였는듯 했다. 그녀는 입을 달싹거렸다. '아이를, 아이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됀다고. 하지만 죽어가는 그녀는 내가 거부하기도 전에 품에 안은 아이에게 속삭이더니 내게 아이를 맡겼다. 아이는 내 비트 안으로 기어들어왔고, 나는 본능적으로 기어들어온 아이를 품에 안았다. 이제 열 살 정도 남짓한 여자 아이였다. 나는 아이를 볼 세도 없이 비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 사이에 여자는 죽어있었다. 죽은자 특유의 멍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비트의 담요를 덮고 라이플을 품속으로 숨기고 아이를 붙잡듯 안았다. 아이는 조용했다. 울지도 않았고 엄마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저 이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낙엽을 즈려밟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품속에 있는 리볼버를 꺼내고 아이를 안았다. 그리고 아들에게 속삭이듯 나는 아이에게 속삭였다. 모든게 잘 될거다. 마치 그 단어는 마법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말하고도, 모든게 잘 될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위험했다. 비트의 바로 옆에서 약탈자 두 셋이 시체 주위를 둘러쌌다. 이런 빌어먹을년 같으니라고. 박음직한 년이였는데 존나 아깝네. 뭐 뒈졌어도 여기서 해결할래? 식기전에? 아니, 됐어. 그냥 먹자고, 박지는 말고. 뒈진년 박아봤자 어따 쓴다고. 뭐, 알았어. 말소리가 끊어지고 무언가 끄는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 도망자의 시체를 끄는 것이겠지. 나는 소리가 가버린 것을 확인하고 아이를 놓고는 비트 위로 잠시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전과 똑같았다. 낙엽 위에 시체가 쓸린 흔적을 빼고는. 나는 다시 비트 안으로 고개를 숙였고, 아이를 안았다. 아이는 내 품속에서 조용하게 잠들었다. 아이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은지 몇 년이나 지난걸까? 나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오래 됐지. 감염이 시작되고 나서 아들을 잃고난 이후부터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리볼버를 손에 쥔 채로 선잠을 들었다. 그리고 트럭의 엔진 소리에 선잠을 깨고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잠들었다.
그리고 날이 밝아왔다. 깨어있을 때 맞는 오래만의 일출이었다. 잿빛 세상의 일출이었고 선잠을 잔 탓에 피곤했지만 그래도 무언가 가슴속 어느 부분이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비트 너머로 고개를 다시 확인했다. 트럭은 새벽 사이에 떠난지 오래였다. 저 트럭들도 마이애미로 향하는 듯 했다. 따뜻한 적도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틀렸길 빌었다. 저렇게 큰 약탈자 무리가 마이애미로 향한다면 다른 약탈자들도 마이애미로 향하고 있다는 소리일테니까. 나는 비트 위에 덮었던 담요를 걷어서 묻은 낙엽들을 털어냈다. 아이가 일어나서 내가 하는 행동을 그저 보기만 했다. 나는 뱄던 가방에 담요를 집어넣고 방수포를 꺼내 털고 그것도 집어넣었다. 아이는 그저 나를 보기만 하고 있었다. 일을 끝마친 나는 앉아서 아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이름이 뭐니? 아이린이요.
아이린, 평화. 또는 평화의 여신. 죽어버린 잿빛 세상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였다. 나는 그렇게 여겼다. 이 세상에서는 이름도 무엇도 전부 죽어버린 것들이기 마련이였지만 아이의 이름은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를 위해서 지난 몇 년간 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했다. 아침에 불을 피우는 것이었다. 화덕을 쌓고, 낙엽과 꺾어진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붙혔다. 그리고 페니실린 한 알을 먹고 가방에서 콘 통조림을 꺼냈다. 이제 나눠야 했고, 두 끼를 먹어야 했다.나는 나뭇가지를 세 개 정도 더 구해 통조림을 불 위에 걸어놓도록 만든 뒤 통조림을 걸었다. 아이는 불의 온기에 이끌려 화덕 앞에 앉아있었다. 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잠시 봤다. 허름하고 두 겹씩 겹쳐 입은 옷. 중간에 찢어진 이유는 아마 아이의 몸에 커서 도망자, 아이의 어머니가 찢었을 것이었다. 아이의 머리색은 더러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금발인듯 했다. 나는 아이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의외로, 아이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나?
내 이름, 내 이름. 내 이름은 아내와 아들이 죽었을때 부터 사라졌던 것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으니까. 기억하는 모든 것이 과거의 저 편으로 날아가 조용히 망각 아래로 잠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내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대화 없이 있었고, 달궈진 캔 통조림을 깠다. 나는 숫가락을 쥐어주며 먼저 먹도록 했다.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먹을 것을 며칠간 먹지 못한 아이 마냥. 나는 아이가 먹는 것을 내버려두고 그저 지켜봤다. 아이는 허겁지겁 먹더니 나를 한번 보고는 내려놨다. 반 정도 먹었군. 아이는 그러면서 내게 말했다. 드세요. 아니, 괜찮다. 나는 조금만 먹어도 되니까. 아뇨, 배불러서요. 오랜만에 먹는거라. 언제 먹었니? 삼주 전부턴 비스킷이랑 빵 부스러기요. 그걸 듣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 제기랄. 삼주 전부터 비스킷과 빵 부스러기? 맙소사. 그리고 남은 콘 통조림은 내가 먹었다. 그다음 화덕을 엎고 불을 끈 후 가방을 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틀 전에 맞았던 허벅지가 아려왔지만 항생제 덕인지 그 전보다 훨씬 괜찮아져 있었다. 아이는 내 허벅지에 두른 거즈와 붕대를 보고 다쳤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아이에게 왜 다쳤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내 살인의 목록을 불러줄 용기는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아이는 어디로 떠나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적도로. 따뜻한 남쪽으로. 따뜻하다는 말에 아이는 조금 웃었다. 나는 아이가 쓴 구질구질한 비니를 쓰다듬어 준 뒤 길 위로 되돌아 왔다.
길, 회색 길. 어젯밤 흔한 죽음을 한번 더 겪은 그 길이었고 적게 산 삶을 계속 살게 만든 그 길이었다. 나는 그 길의 아스팔트 위로 아이와 함께 걸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좀 남아 있었고, 아직 아침이었다. 운이 좋다면 오늘 안에 마을 두 개 쯤은 지날 수 있을 것이었다. 아이는 처음 떠나는 길이 무섭다고 말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길을 떠나는건 처음이니? 네. 그 전엔? 엄마랑 같이 있었어요. 근데 나쁜 아저씨들에게 잡혔어요. 약탈자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