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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 황금의 비 (4)


 예기치 못한 밤산책은 의외로 즐거웠다.

폐부에 스며드는 바깥 공기는 실로 오랜만에 마셔보는 것이라 울렁이는 속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효능이 있었다. 게다가 진딧물 꽁무니에 매달린 개미처럼 따라다니던 레르몬토프 부인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마음의 평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동행이었다. 아롈이 편견을 한 꺼풀 벗자 미셸은 대단히 유용한 대화 상대로 거듭났다.

그는 아롈의 느릿한 걸음에 맞춰 걸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미셸은 유쾌하게 분위기를 전환할 줄 알았고 아롈이 무슨 소재를 던지듯 능숙하게 맞받아쳤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귀족들의 공용어라 할 수 있는 페란토 어가 있었다. 이미 사어인 페란토 어로 능숙하게 회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이는 귀족 중에서도 많지 않았으나 다행히 미셸과 아롈은 그 소수에 속했다. 특유의 운율을 이용한 재치 있는 농담에 웃음을 터트리길 수차례, 그들은 그 거대한 후원을 절반이나 돌았다.

"그래서 순진하게도 포도를 그냥 짓이겨서 물을 타놓으면 술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멀쩡한 포도를 가져다 도서관에 넣어뒀지요. 것도 어른들에게 들킬까봐 비밀장소에 잘 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리셨나요?"

"예. 평소에는 도서관에 직접 가지 않았으니까요. 정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하필 그 포도주, 포도즙, 음, 포도주라고 하지요. 그걸 숨겨둔 곳에 리젤로트도 과자를 숨겨두었던 겁니다. 세시안하고 앉아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리즈가 코를 싸쥐고 달려와서는 빽빽 울어대지 뭡니까? 과자에 다 곰팡이가 피었다면서, 책임지라고요."

"그걸 아무도 모르셨습니까?"

"워낙 구석진 곳인데다 고서를 보관하는 곳이라 정기적으로 사람이 들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숨겼지요. 사실 과자가 문제가 아니라 귀중한 책이 망가진 게 오히려 문제였지요. 벌이랍시고 삼백 권도 넘는 책을 세시안과 둘이 앉아 필사하느라 낑낑댔습니다. 정말 팔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울상을 지으며 팔목을 흔들어 보였다. 아롈은 킥킥 웃었다.

밤바람이 불었다. 동앗줄처럼 한 갈래로 땋아내린 머리칼은 휘날리지 않았지만 대신 그 위에 덮어놓은 베일이 붕 떠올랐다. 아롈의 조모인 소피야 황후의 유품이었다. 베일의 가장자리에 잘게 달아놓은 진주가 짤랑거렸다. 가만히 손을 들어 올리자 산들바람의 결이 손가락을 스쳐지나갔다.

"그래도 삼백 권을 전부 베끼진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귀족 연감만 다 외우면 벌을 탕감해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 많은 걸 말씀입니까?"

역사가 짧은 코시카의 연감만 해도 두께가 어마어마한데? 상상만 해도 질릴 것 같았다. 심지어 매년 갱신되지 않던가.

"외우는 데 삼 년 넘게 걸렸습니다. 어찌나 지독하게 공부했는지 아직도 외워 보일 수 있지요."

"그렇다면 보여주십시오."

"못할 것도 없지요."

그는 암컷 공작새에게 꼬리를 펼쳐 보이는 수컷 공작새 같은 표정이었다.

정원사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가꾼 정원은 휘황한 등불로 가득했다. 바람은 불을 감싸고 피어올랐다. 붉은 불꽃이 꽃가루처럼 날려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가 사그라졌다. 불빛이 매끈한 콧날에 어른거렸다.

"로렌의 귀족 연감."

진지하고 나지막한 목소리. 이국적인 억양. 아롈은 편견 없이 다시 한 번 확신을 가졌다. 틀림없는 바람둥이였다.

"루이."

아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귀족 연감의 속지에는 '거룩하신 주님의 광휘 아래'라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교회를 믿는 코시카의 경우에는 '거룩하신 주님의 광휘와 그분의 대리자인 차르의 이름 아래'라고 되어있었다. 로렌은 다른가?

그러나 잠시 후 이어진 말에 아롈은 자제력을 잃고 뒤집어졌다.

"루이, 루이, 큰 루이, 작은 루이, 못생긴 루이, 잘생긴 루이, 멍청한 루이, 똑똑한 루이, 루이, 루이, 루이……."

"하하하하하, 윽, 하."

 

미셸은 대단히 뿌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괜찮은 농담이었다. 본국에서는 하도 많이 써먹어 웃어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소녀는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댔다. 그녀가 진정되길 기다리는 동안 미셸은 웃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블린 궁과는 또 다른 정취가 있었다. 꽃과 키 작은 정원수가 대부분인 로렌의 궁정과는 달리 이곳은 훌쩍 큰 침엽수의 세상이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진 소나무와 전나무들, 바닥에 깔린 푸른 잔디와 군데군데 피어있는 버섯들, 아가씨들의 치맛자락에 풀물이 들지 않도록 깔아놓은 포석, 그 모든 것에 빛을 뿌려주는 유리 등불. 꽃 한 송이 없는 정원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여기까지 오는 여정은 ​지​긋​지​긋​했​지​만​-​사​실​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면 골머리가 다 아팠다- 중간 반환점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로렌의 역사 속에서 이런 먼 곳에서 마담 라 세르를 데려온 것은 처음이었고 대공가의 후계자가 이렇게 멀리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렌이 세워질 당시에 황가의 시조인 미남왕 앙리는 맹세를 했다. 황실의 남성 직계 자손은 여섯 대공가 출신하고만 혼인하리라고, 그로써 황가의 후손에는 항상 여섯 가문의 피가 섞이리라고. 첫 맹세는 '대공의 딸'이었으나 이백년 전에 한 번 직계 여자의 씨가 마른 뒤로 샤를 10세는 대공의 딸, 손녀, 외손녀로 맹세의 범위를 확장했다.

다른 나라와 통혼한 역사가 얼마 없으니 다른 나라에 혼인 사절을 꾸려 보내는 절차 하나 가지고도 갑론을박이 계속 되었다. 굳이 대공가 출신을 보낼 필요까지야 있겠느냐는 의견이 대세였으나 결혼식을 두 번 하는 걸로 결정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본디 신랑이 참석할 수 없을 때 결혼식에서의 대리 신랑은 신부의 남자 형제가 맡지만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에게는 갓 태어난 남동생뿐이었다. 친사촌도 없었으므로 별 수 없이 나이가 아주 많은 외가 쪽 사촌인 보르디 대공자를 보내 달라고 코시카에서 요청을 했고 로렌에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셸은 신랑의 사촌으로서 열렬히 자원해서 이 여행에 따라붙었다.

신부가 올 때까지 이모의 히스테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유람하는 셈 치고 여행길에서 좀 고생하고 말지.

그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의 딸과 자신의 하나 남은 아들이 혼인하리라는 말이 나오자 황후는 당장에 세시안과 자신을 불러다 수프의 육수라도 낼 기세로 들볶아댔다. 세시안에게는 부황에게 가 거절하라고, 자신에게는 아버지-오를레앙 대공-를 설득하라고!

황후의 아들인 세시안의 고생이 더 심하긴 했지만 조카인 미셸이 겪은 고초도 만만찮았다. 황제조차도 포기한 마당에 그들이 뭘 어떻게 하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세시안이 아직 살아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그가 사절단과 같이 간다고 말했을 때 세시안은 농반진반으로 물었다.

-다리가 부러지면 못 가지 않을까?

생각하다보니 본국에 돌아가기 싫어졌다. 미셸은 본국에 대체 어떤 결혼식이 기다리고 있을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황실의 혼사는 전통적으로 황후가 주관하는데, 황후가 주관한 혼례식과 약혼식치고 멀쩡한 식이 없었다. 세시안은 두 번 약혼하고 두 번 결혼하고 한 번은 약혼인지 결혼인지 애매한 식을 치렀는데 두 번의 약혼식도 그랬지만 결혼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이었다.

첫 번째 결혼식에서는 나비를 잡아서 신부 뒤에서 날리겠답시고 엄청난 돈을 풀어 나비를 잡아오게 시켰다. 다른 부인들이 나비는 오래 살 수 없는 곤충이라는 걸 간언했으나 혼자 신이 난 황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결국 결혼식에는 나비 시체가 우수수 떨어졌고 신부가 기절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애매했던 식은 국혼이니 그렇다 치고, 확실한 두 번째 결혼식은 어떤 의미로는 더 심각했다. 미셸의 어머니, 루이즈 안 로를레앙이 준비한 혼인식은 첫 번째보다는 훨씬 매끄럽고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복병이 터졌다. 황후는 로렌의 전통 방식이라며 신랑이 신부의 치마를 들치고 들어가 입으로 스타킹을 벗기길 원했다. 미리 말해줬으면 반대라도 했겠지만 첫 번째 결혼식에서 단단히 꽁해 있었던 황후는-10년 가까이 된 일이었음에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식장에서 '명령했고' 신랑이 정중하게 거부하자 크게 화를 내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잔치의 분위기는 말도 못했다.

가장 걱정 되는 것은 그 결혼식들이 다 좋은 마음으로 준비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진정 아들의 결혼식이 잘 되기를 원해서 그런 일들을 진행했다. 결과는 전부 그 모양이었지만.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황후가 달래러 온 황제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천박한 욕설과 저주를 줄줄이 뿜어댈 때 미셸도 그 자리에 있었다. 사실 궁정에 파다하게 퍼진 '그 년의 딸은 절대 내 집에 못 들여!'라는 소문은 대단히 축소된 것에 가까웠다. 그 긴 욕설을 한 줄로 축약한 시녀의 솜씨에 미셸은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미셸은 측은한 눈으로 여대공을 쳐다보았다. 미셸에게는 이모인데도 이렇게 힘든데 시어머니라니. 얼마나 고생할까.

그녀는 끅끅대며 숨을 들이켰다.

"괜찮으십니까, 여대공 전하?"

'여대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입에 걸렸다. 로렌에서는 여성에게 계승권이 주어지지 않아 '대공비'는 있을지언정 '여대공'은 있을 수 없으니.

"아, 괜찮습니다. 실례했군요. 음."

​"​말​씀​드​렸​습​니​다​만​.​"​

"아, 미셸."

웃느라 혈색이 돌아 뺨이 발그레했다.

다시 봐도 정말 예뻤다. 로렌에서는 희고 고운 피부를 최고로 쳐준다. 북부에 와서 만난 사람들이 다 희긴 했지만, 이 소녀는 그 중에서도 희었다. 사람을 물에 흔들어서 색소를 다 빼낸 것 같았다. 햇빛을 한 번도 보지 못 한 것처럼 흰 얼굴도 그랬고, 머리칼과 눈이 그랬다. 특히 녹색 눈은 남쪽에서 발에 채일 정도로 흔했지만 저렇게 옅은 색은 난생 처음 보았다. 레몬즙 같은 머리칼에 새싹 같은 눈.

물론 리즈보다는 못했다. 세상 제일의 미인은 리젤로트였다.

"예, 전하."

"아롈."

흰 소녀는 툭 하고 내뱉었다. '옐레나 파블로브나'. 그리고 아롈. 그 사이의 관계는 명확했다. 미셸은 너무 빤히 보이는 속셈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흔들리는 불안, 자신에게 느끼는 의심, 불현듯 다가온 친근감, 그리고 자기편을 하나쯤은 만들어 두어야겠다는 계산.

한창 경계하며 날을 세우더니만 조금 친근해졌다고 확 다가오려 애쓴다. 어른들이 열여섯의 자신을 봤을 때도 이랬을까. 지금 샤를루아 공작이 자신을 보면 이렇게 간단히 들여다보일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여대공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아롈입니다."

어쨌거나 그녀는 세시안의 아내가 될 여자였다. 그리고 자신은 세시안의 여동생의 남편이 될 테고. 친근하게 지내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미셸은 가만히 아롈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영광입니다, 아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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