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 눈송이


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1)


 수평선은 어슴푸레하게 하늘과 맞닿아있었다. 다 마르기 전의 유화를 붓으로 짓뭉갠 것처럼 경계를 알 수 없는 파란색이었다. 맑고 깨끗한 하늘, 끌어안고 싶을 만큼 폭신한 구름, 짠 냄새와 잔물결. 좋은 날씨였다. 귀한 여대공이 뱃전에 서는 걸 아무도 막지 않을 만큼.

"하암."

미셸이 하품을 했다. 소리 한 번 컸다. 아롈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그들은 지금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릴레벨트 해(海)는 허리띠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도와 대륙에 안긴 모양을 하고 있는 길쭉한 내해였다. 반도와 북부가 이 바다를 놓고 아웅다웅한 지 수백 년, 아롈의 증조모인 안나 여제가 등극하면서 그 다툼이 종결되었다. 웨데나를 쳐부수면서 릴레벨트 해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게 오십 년이 지나자 코시카의 여대공이 신랑의 나라로 떠나기 위해 바다를 이용할 정도로 코시카의 지배권은 공고해졌다.

미셸이 다시 한 번 하품을 했다. 아롈은 뒤를 돌아보았다.

"곤하면 들어가 주무세요."

"질리지도 않으십니까, 아롈은? 벌써 두 시간 째입니다."

아롈은 교회에서 인정하는 대리 결혼식을 치러 로렌의 황태자비 자격으로 여행하고 있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마담 라 세르, 혹은 비전하라고 불리는 것이 맞지만 아직 남편의 얼굴도 보지 못한 마당이었다. 그리 불리는 것은 육지에 상륙해서도 족했다.

"생각할 것이 많다보니. 정말 미셸이 옆에 계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른 이와 교대하세요."

하라는 교대는 않고 미셸은 딴 소리만 늘어놓았다.

"이리 햇빛 아래 서 계시면 고운 얼굴이 다 타십니다."

"안 그래도 창백하다는 소리만 듣는데 조금 검어지면 좋지요. 보십시오."

아롈은 제 손을 미셸의 손 옆에 댔다. 파르스름하게 핏줄이 비치는 손등은 대리석처럼 희었다. 미셸도 사내치고 검은 편은 절대 아닌데 아롈과 비교하면 갈가마귀나 다름없었다. 어릴 적부터 아무리 해를 쬐어도 피부가 붉어지기만 할 뿐 잘 타지 않았다.

"속도 편하십니다. 리즈는 해만 나면 절대 양산 없이 밖으로 안 나가던데요."

아롈은 이 주 간 미셸과 항해하면서 온갖 이야기를 다 주워들었다. 남편 될, 아니 이제 남편인 세르의 이야기며 황제나 황후의 성격, 귀족들의 성향, 대공들과 대공비들의 가계도 같은 것들이 주가 되었는데 그 중 가장 귀가 따갑게 들은 것이라면 단연 시누이 마담 엘리자베트 샤를로트에 대한 자랑이었다.

리젤로트라고 불린다는 그녀는 미셸의 약혼녀였다. 그리고 대단히 놀랍게도, 미셸은 그녀에게 일편단심이었다. 처음 얘기를 듣고 아롈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자 미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푸념했다.

자기는 정말 리젤로트 하나뿐인데 리즈는 자신을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역혼을 꺼려하는 황실의 불문율 때문에 혼인을 못 하고 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성년이 되자마자 채어 와 가둬놨다. 우리 리즈가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아롈은 그 오해의 이유를 여실히 알 것 같았으나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 일을 갖고 고민하는 모습이 너무 속 편하고 행복해 보여서 심통이 났다. 그녀는 무어라 대꾸할까 고민하다 그냥 말을 돌렸다.

"오실 때에도 바다로 오셨으면서 무얼 그리 싫어하십니까?"

미셸은 갑자기 흥분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올 때 바다로 왔으니 이러는 거지요. 심지어 그 때는 역풍이라 배가 잘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솔직히 이제 바다라면 지긋지긋합니다."

"항해는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사실 아롈도 항해는 처음이었다.

"저는 오를레앙 대공자지 칼레 대공자가 아닙니다. 오를레앙은 이런 지긋지긋한 물 따위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즐기세요. 아름답지 않나요?"

"불안합니다. 이렇게 큰 배가 물에 뜬다는 것도 사실 이상하잖습니까.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겠습니다. 해적이라도 나타나면 어쩝니까."

아롈은 픽 웃었다.

"군선을 네 척이나 달고 가는 함대에 달라붙을 해적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미셸은 시무룩하게 푸념했다.

"리즈가 보고 싶습니다."

"초상화를 보시지요."

미셸이 항상 걸고 다니는 사자 로켓에는 사랑하는 이의 초상화가 들어있다고 했다. 아롈이 한 번 보자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자기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물을 보고 싶은 겁니다."

"육로로 갔다간 전쟁터를 빙 돌아가야 할 텐데 그 어여쁘다는 약혼녀를 보는 날이 더 늦어질 겁니다. 참으세요. 이제 절반 넘게 왔습니다."

황도에서 육로로 로렌까지 바로 가려면 피아스트를 거쳐야 하는데 피아스트는 겨우 이반 3세 때 복속된 나라인데다, 코시카와 달리 정교회를 믿지 않아 지배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다. 피아스트의 국왕인 볼레스와프 3세는 옐레나 1세가 즉위하자 자신은 이반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지 속치마를 입는 계집에게 무릎을 꿇은 건 아니라며 나라에 들어와 있는 정교회 신자를 잡아다 학살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터 꼴이 어떨지 빤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겠지. 그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전쟁터를 가로지를 수는 없으니 돌아가야 하는데 하필 피아스트는 옆으로 길쭉하게 생긴 나라였다. 돌아가려면 또 한참이었다. 차라리 해로가 백 배 나았다. 게다가 내려가는 길은 순풍이잖은가.

리젤로트를 들이대자 미셸의 불만이 딱 멈췄다. 갈색 눈에 애달픔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서 찰랑거렸다. 익숙해지긴 했으나 애수에 잠긴 얼굴은 충분한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큼 미끈했다. 아롈은 다시 리젤로트의 초상화를 보고 싶어졌다. 대체 어떤 미인이기에 이런 남자를 꽉 잡고 있을까?

미인이라. 그리고 피아스트.

아롈은 충동적으로 말을 흘렸다.

"여해적 알비다 전설을 아시나요?"

"알비다? 아뇨, 모릅니다."

"천 년도 더 된 일입니다. 하늘에 용이 날아다니고 바다에 인어가 살던 시절이라고들 하지요."

"숲에는 요정이 살고 마법사가 실존했다던 그 시기 말씀이십니까?"

미셸의 눈이 대번에 반짝반짝해졌다. 배를 타고 안 사실이지만, 그는 동화나 전설, 마법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썼다.

"예. 옛날 반도 삼국, 그러니까 웨데나, 스칸디아, 란디아가 전부 웨데나 바사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웨데나의 국왕은 호시탐탐 피아스트를 노리고 있었지요. 반도 바깥에 있는 큰 나라였으니까요. 피아스트를 가지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금세 자기 것이라고 확신했나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알비다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습니다."

미셸은 다 알겠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피아스트에는 잘생긴 왕자가 있었겠군요?"

"왕자의 외모가 어떠했는가는 전해지지 않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웨데나의 국왕은 알비다 공주에게 혼인을 통보했습니다. 알비다 공주는 반항하다가 자신을 따르는 시녀들을 데리고 배를 훔쳐서 릴레벨트 해로 떠났습니다. 공주와 시녀들은 모두 남장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들은 망망대해를 항해했습니다. 제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 이는 틀림없이 공주가 마법사였을 거라 하더군요. 배 한 번 몰아보지 않은 여자들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찌 죽지 않고 떠돌아다닐 수 있었겠냐면서요."

"공주가 인어의 친우였을 수도 있지요."

"인어가 친우라면 대구와 청어는 물리게 먹을 수 있었겠군요. 뒷얘기를 들으면 인어보다는 마법사 쪽에 무게가 실립니다. 공주는 바다에서 해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공주가 타고 있는 아름다운 놀잇배를 탐낸 해적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었지요. 그리고 공주는 해적선을 접수했습니다."

미셸은 아, 하고 탄성을 냈다.

"그리고 공주는 ​알​비​다​(​A​l​w​i​d​a​)​라​는​ 이름을 ​아​디​브​(​A​d​i​w​)​라​고​ 개명한 채 해적질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남장한 채였지요. 얼마나 자비 없었던지 본국의 상선도 가리지 않고 털었다는 모양입니다. 본국 생각은 요만큼도 안 했으니 공주로서의 의무는 아랑곳 않고 도망쳤겠지요. 천 년 전 인물을 무책임하다 비난하는 것도 우습습니다만."

"피아스트의 잘생긴 왕자는 언제 등장합니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미셸, 성정이 급하십니다."

"송구합니다. 부디 다음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피아스트의 상선이 계속 털리자 국왕은 분노했습니다. 릴레벨트 해를 통하지 않으면 반도와 교류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피아스트 국왕은 웨데나의 국왕과 제휴를 맺었습니다. 모름지기 국왕이란 먼저 숙이려 들지 않는 법입니다. 아들의 혼사가 그렇게 파투났는데도 자존심을 접을 만큼 상황이 심각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웨데나-피아스트 연합군은 아디브의 해적선을 발견하고 포위했습니다. 아디브는 자신의 긴 머리칼을 두건 속에 감춘 채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그 때 은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사내가 자신의 부하를 거꾸러뜨리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던 겁니다."

"아까는 왕자의 외모가 전해지지 않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롈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아디브는 그 사내의 외모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아디브의 심장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한 기사가 은빛 머리의 사내를 불렀습니다. 왕자님이라고요. 다른 부하들이 죽든 말든 아랑곳 않고 멋대로 사랑에 빠져버린 아디브는……. 경들은 무얼 하고 있지?"

아롈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열댓 명의 기사들이 편하기 이를 데 없는 차림으로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그 중 몇 명은 쪼그려 앉아있었다. 쭉 기사들을 훑어보자 앉아있던 자들은 헐레벌떡 일어났고 서 있는 자들은 차렷 자세를 취했다. 한 사람은 일어나려다 발이 미끄러져 다시 넘어지기까지 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작은 건가?"

"아닙니다, 전하!"

"목소리 한 번 우렁차군. 미시에시 경, 대답하라. 그대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비전하의, 호위를, 위하여."

얼굴 검은 건장한 사내들이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아대는 모습이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보다도 수줍었다. 아롈은 아까 넘어졌던 붉은 머리의 기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말인가?"

감히 모셔야 할 주인을 음유시인 쯤으로 써먹었다니.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보니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헛웃음만 새어나왔다. 아롈은 뱃전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미셸을 쳐다보았다.

"과연 로렌의 기사들은 대단한가보군요. 앉아서도 호위를 할 수 있다니? 내가 북쪽의 기사들만 보고 자란 몸이라 눈을 너무 낮게 잡은 건가요?"

그는 어설프게 웃었다.

"아롈, 너무 노하지 마십시오. 제가 나중에 엄히 다스리겠습니다."

"노하다니요. 태자비 된 몸으로 아직까지 남쪽의 예에 익숙지 않은가 싶어 반성하고 있던 참입니다. 물론 북쪽과 남쪽의 예는 많이 다르겠지요. 제 미욱함 탓입니다."

미셸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오늘 당번은 보르디 가가 아닌 오를레앙 가문 출신들이었다.

아롈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역시 양산 없이 오래 서 있었더니 햇볕이 따갑군요. 이만 들어가 쉬어야겠습니다. 물론 선실까지 ​바​래​다​주​시​겠​지​요​?​"​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