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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5)


 파프너를 만나고 난 다음 열리는 두 번째 봄맞이 축제가 찾아왔다. 소녀는 이제 아장거리는 대신 조금은 균형 있게 걸었고,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흘러내렸다. 소녀는 파프너의 등을 베고 중얼거렸다.

"있잖아. 내 부모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거야 모르지.]

파프너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소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 나한테는 엄마 아빠가 없을까?"

[네 부모는 성에 살겠지.]

"성? 우리 성에는 우리 엄마 아빠 없어."

[네가 키예나라 하지 않았나. 키예나는 키예프 공의 성(成)인데 성(城)에 네 부모가 없다고?]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부모에 대한 말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신부가 그러는데, 우리 엄마 아빠는 저 멀리 황도라는 곳에 있대."

[……. 알고 있었으면서 뭘 묻는 건가.]

"만나본 적이 없단 말이야."

[그럼 알 길이 없지 않나. 그런 고민은 저 한 구석에 치워놓는 것이 좋다.]

"하지만 궁금하니까 그렇지. 저기 다른 애들 엄마 아빠는 매일매일 밥도 같이 먹고 밤낮으로 뺨에 뽀뽀도 해준단 말이야. 제냐랑 유모도 그래. 그런데 나한테는 아무도 뽀뽀를 안 해주잖아."

소녀는 처음에 대단히 말이 어눌했지만 파프너를 붙잡고 이 말 저 말 하다보니 이 년 사이에 금방 말이 늘었다. 어휘력이 일취월장 하는 것이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떨 때는 너무 시끄러워서 제발 잠이라도 잤으면 했다.

파프너는 말없이 굵고 긴 꼬리로 소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만족하나?]

"이건 뽀뽀가 아니야!"

[내가 네게 뽀뽀를 해줬다간 큰일 난다, 어린 마법사.]

"왜?"

[네가 나중에 커서 내 이름을 역사서에서 찾아보도록. 그럼 알게 될 것이다.]

"역사서? 파프너 유명해?"

[지금도 내 이름이 전해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는 확실히 있었다.]

"그게 언젠데?"

[봄이 천 번쯤 오기 전.]

천이라는 건 소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숫자였다. 소녀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수를 세다가 이내 시무룩해져서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갔다.

"우리 엄마가 금발일까, 우리 아빠가 금발일까?"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왜? 그럼 난 주워온 자식인거야? 제냐와 유모는 똑같이 머리가 밤색인걸."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형질을 물려주는 것은 맞지만 그 형질이 꼭 자식에게 발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숨겨진 형질이 자식에게 물려지는 경우는 대단히 흔한 경우다. 더욱이 인간의 금발은 열성 형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 머리색이 금발이라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네 모계와 부계 선조 두 계통 모두에게 금발인 조상이 있었다는 것뿐이다. 네가 만일 흑발이었다면 부모 둘 중 한 명은 흑발이었겠지. 게다가 어렸을 때는 금발이고 커서 머리색이 변하는 경우가 하도 많아서……, 듣고 있나?]

눈밭에 낙서를 하던 소녀는 뺨을 크게 부풀렸다.

"너무 어려워."

파프너는 잠시 난감해졌다. 그는 알고 있는 것을 만 네 살, 아니 이제 생일이 지나 만 다섯 살이 된 꼬마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하는 재주가 부족했다. 아, 번개가 치듯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금발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아하. 소녀는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파프너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엄마 쪽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아빠 쪽 할아버지랑, 할머니 중에서 누가 금발일까?"

흐뭇함은 그야말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파프너는 턱을 소녀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소녀는 뜨끈뜨끈하게 열이 나도록 고민하고 있었다.

[초상화를 본 일도 없나?]

"없어. 초상화가 뭐야?"

[초상화란 사람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귀한 신분이면 반드시 초상화를 그릴 텐데 이상하군.]

"정말? 확실한 거야?"

[……. 확신할 수는 없군.]

이 용이 세상을 누빈 것은 천 년 쯤 전이었다.

"파프너는 거짓말쟁이."

[방금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지만 원래 용이라는 건 다 거짓말쟁이다.]

"정말?"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봄처럼 예쁜 녹색이었다. 파프너는 소녀의 눈을 볼 때마다 의아했다. 분명히 녹색 눈은 남쪽에 사는 인간들이 많았는데. 이런 북쪽 애들 눈은 파란색 아니면 갈색이 아니었던가? 파프너는 소녀보다는 세상을 많이 알았지만 그의 지식은 대단히 오래되었고 거의 갱신되지 않았다.

그는 의문을 접어두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 원래 거짓말만 하기 때문에 용인 것이다.]

"거짓말!"

[정말이다. 자, 생각해봐라. 나는 항상 거짓말만 한다. 이 말은 맞는 말일까, 틀린 말일까?]

어? 거짓말? 거짓말만 하는 게 거짓말이 아니면 파프너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 게 되니까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데 그럼 거짓말만 한다는 게 거짓말이고, 거짓말이, 거짓말이.

소녀의 머릿속이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생각의 꼬리가 잡히질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소녀는 포기하고 파프너에게 달려들었다.

"몰라!"

 

수백 년간 적막하기만 했던 계곡은 소녀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음침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조용했던 소녀는 짐승 친구 앞에서만은 한없이 발랄해졌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엎치락뒤치락 놀고 난 다음이면 소녀는 숨이 끊어진 것처럼 잠들었지만 파프너가 소녀를 날개로 덮어주어 감기에 걸린 적은 없었다.

해가 저물 즘이었다. 파프너는 일부러 몸을 약간 틀었다. 이 정도로만 해도 소녀는 금세 일어나 눈을 비비곤 했다. 역시 소녀는 금방 눈을 뜨고 칭얼거렸다.

"졸려."

[그래도 가야 한다. 어린 마법사.]

어린 마법사.

파프너는 항상 소녀를 그렇게 불렀다. 이름을 불러달라고 부탁했지만 파프너는 소녀의 이름을 거의 불러주지 않았다.

"으응, 나 파피랑 자면 안 돼?"

소녀는 파프너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비볐다. 파프너의 몸은 거칠어 보이는 외면과 달리 매끈하고 따끈해서 기분이 좋았다.

[안 된다. 그리고 파피가 아니라 파프너다.]

"파피."

소녀는 웃었다.

[아니라니까.]

"파피, 파피, 파피, 파피, 파피! 꺄악!"

파프너는 날개로 눈을 그러모아 소녀에게 던졌다. 소녀는 깔깔 웃어대며 도망 다니다가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파피가 너무해!"

파프너는 그리 길지도 않은 목을 거만하게 쭉 뺐다. 굵은 꼬리가 휙 반원을 그렸다.

[남의 멀쩡한 이름을 멋대로 줄여 부르는 네가 더 너무하다.]

"우웅. 정말 안 돼? 나 조용하게 잘게. 불도 내가 켤게. 양초 안 쓸 거야."

[안 된다고 했지 않나.]

"왜?"

[내 사생활은 어린 아이의 정서교육에 안 좋다.]

"파피는 심술쟁이! 내일 고기 안 갖다 줄 거야!"

소녀는 씩씩하게 일어서 성으로 달렸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그냥 파프너랑 살고 싶은데, 파프너는 소녀가 밤에 같이 있는 걸 싫어했다. 아무리 졸라도 그것만은 들어주지 않았다. 파피라고 부르는 것도 싫어하고, 꼬리를 붙잡는 것도 싫어하고, 이마를 만지는 것도 싫어했지만 그런 것들과는 조금 다른 '싫어함'이었다. 파프너는 자기에게도 사생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소녀는 바람 같이 달려 창문을 넘어 방에 들어왔다. 손가락을 탁 튕기자 책상 위에 놓여있는 양초에 불이 붙었다. 책상에는 처음 보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이미 찢어진 편지봉투에는 붉은 밀랍으로 인장이 찍혀 있었다. 고양이의 문장이었다. 소녀는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펼쳤다. 한 줄 한 줄 내려갈수록 소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이상 환했다간 온 성을 다 밝힐 것 같았다.

빨리 파프너에게 이 사실을 알려줘야!

그 순간 누군가 소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소녀는 악 소리도 내지 못 하고 질질 끌려갔다. 유모인 카나예바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려 했는지 얇은 침의만을 입고 긴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었다. 고운 손이 내는 힘은 말도 안 되게 무시무시했다. 소녀는 개처럼 끌려가면서도 몸에 힘을 빼려 노력했다. 경험상 반항하면 더 아팠기 때문이다. 유모는 평소처럼 꼬집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들고 있던 촛대로 소녀의 이마를 후려쳤다.

"힉."

눈앞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두개골이 깨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촛불빛이 어른거렸다. 유모는 동화 속의 마귀할멈 바바 야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모. 왜 이래."

유모는 소녀에게 손찌검을 자주 했다. 이 성에서 유모는 난폭한 폭군이었다. 술만 마시면 그랬다. 할퀴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렸지만, 정교하게 옷에 가려지는 부분만을 때렸기 때문에 얼굴에 손 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머리였다. 소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살의를 느꼈다.

"유모."

"왜 안 죽지?"

"유모. 왜 그래."

"저는 정말로 편하게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힘이 약했나 봐요. 죄송해요, 전하."

소녀는 바들바들 떨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수없이 맞으며 쌓여온 무력감이 소녀를 짓눌렀다. 유모는 강한 어른이었고 소녀는 약한 아이였다. 그것은 저 다른 대륙의 이교도들이 코끼리를 길들이는 방식과 흡사했다. 새끼 코끼리를 수없이 때리고 아프게 하면 코끼리는 나중에 커서 자기가 사슬을 끊을 수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는다고 한다. 소녀는 사슬에 묶여 큰 어린 코끼리였다.

저항할 수 있을 리 없어. 유모가 나를 죽이려고 해. 유모가, 나를 죽이려고 해!

유모는 아직 잡고 있던 머리칼을 당겨 올렸다. 두피가 통째로 벗겨질 것 같았다.

"유모……. 아파."

"오늘 황도에서 매가 왔답니다."

스산한 목소리가 귀에 박혀들었다. 유모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마구 소녀에게 쏟아내며 마음 속에 있는 독기를 풀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깍듯이 굴었지만 이렇게 둘만 있을 때에는 험악한 말을 주워섬겼다.

"이반 대공 전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아직 스물도 안 된 분이 가엾어라. 신께서 돌보소서. 옐레나 대공비께서는 그 충격으로 유산을 하셨고요. 그러니까 옐레나 여대공 전하를 빨리 황도로 돌려보내라고 그렇게 전갈이 왔답니다."

"그런데 왜. 왜 그러는 거야. 이제 유모도 돌아갈 수 있잖아! 그렇게 황도를 그리워했으면서! 아악."

유모는 소녀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돌로 된 바닥은 말도 안 되게 아팠다. 어깨가 으스러진 것 같았다. 두피는 아직도 뜯겨나간 듯 아팠고 눈앞에는 별이 보였다.

언제 흘러내렸는지도 모를 눈물이 얼굴을 흠뻑 적셨다. 유모는 소녀의 배를 깔고 앉았다. 독사 같은 머리칼이 흘러내려 뺨에 닿았다. 독사를 두른 둥그런 얼굴, 크게 뜬 눈.

무서워.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보세요. 전하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황도에 아무도 없잖아요? 여기 사는 무지렁이들이 황도에 와서 전하인지 아닌지 확인할 것도 아니고. 정말 다행히도 우리 제냐는 검은색에 가까운 머리죠. 파블 대공 전하는 검은 머리니까, 아무도 우리 제냐가 어두운 밤색 머리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알렉산드르 대공 전하도 검은 머리시니까. 그렇지요?"

손, 목덜미에 닿아있는 손이 너무 차가웠다.

"유모."

"이제 전하는 예브게니아가 되시는 거예요. 그리고 내 딸, 오 사랑스런 예브게니아는 이제 고귀한 전하가 되는 거죠. 내 딸은 가엾게도 넘어져서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죽었어요. 하지만 저는 슬픔을 삼키고 오랫동안 충심으로 모셔온 옐레나 여대공 전하를 따라 황도로 돌아가는 거죠."

"유모, 이러지 마. 무서워."

소녀는 버러지처럼 버둥거렸다.

"내가 말할까봐 그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마을 사람들에게도 맞았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 그러니까 그만 해. 오늘 일도 비밀로! 켁, 켁."

목이 졸렸다. 숨을 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소녀는 손톱을 세워 여인의 손을 할퀴었다. 그러나 너무 억셌다. 유모는 미친 사람답게 대단히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비밀은 무덤에 가서 지켜주세요."

살려줘.

살려줘, 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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