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4)
코시카의 황가인 키옌 가문은 본디 아주 옛날부터 키예프 공국을 다스리던 가문이었다. 키예프 공국은 대륙의 최북단으로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척박한 곳이었다. 키예프 공이 다른 공국들은 정벌하며 땅을 넓혀나가고, 대를 이어 세력을 퍼트리다 결국 황제가 되자 공국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본래 같이 고생하던 영주가 남쪽의 편하고 따뜻한 곳으로 내려가 공국민의 고생은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요지였다.
물론 그들의 불만이 황도에 닿았을 리는 없지만 황족들은 가끔 자식을 낳았을 때 키예프 공국에 보내 한 계절에서 이 년 정도를 살게 했다. 귀하신 몸들은 자식을 직접 키우지 않고 떨어뜨려놨다가 좀 크면 데려간다고 유식한 이바니치가 큰 소리를 땅땅 쳤다. 공국민들은 고개를 주억였다.
'어린 키예프 공'은 어쩌다 한 번씩 공국의 수다거리가 되어주는 별미였다. 마지막 키예프 공이었던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황도로 돌아간 지도 오 년, 새로운 키예프 공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공국민들은 손질하던 가죽과 한창 놓던 수틀을 집어 던지고 내성으로 몰려들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차분하게 굴러들어왔다. 말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남부의-어디까지나 키예프보다 남쪽의- 말이 얼어 죽지 않고 여기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일이었다.
마차의 문이 딸깍 열리더니 한 여인이 내렸다. 이제 갓 스물 정도 된 젊은 부인은 갓난아이 두 명을 끌어안고 있었다.
둘 중 금발인 아이가 어린 키예프 공이었다.
어린 아이가 온 일은 많았지만 갓난아이는 또 처음이었다. 하나같이 실팍한 체구를 자랑하는 공국민들이 보기에 아이는 말도 안 되게 작았다. 북부의 아이들은 강인해서 갓난아기라도 키예프 공보다 덩치가 두 배는 컸다. 어린 키예프 공은 일반 갓난아기 치고도 작은 편이었다. 아기는 병치레가 잦았다. 매일 울며 보채고 잠을 제대로 자지도 않았다. 모피로 감싸고 수명을 길게 해 준다는 주술을 수놓은 이불을 덮어주어도 열이 끓어올라 끙끙 앓았다.
마차에서 내린 여인은 아이의 유모로 백작 부인의 작위를 가진 미망인이었다. 카나예바 부인은 체사레브나의 시녀였던 자신이 이런 후미진 곳으로 좌천된 것을 전부 아기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친딸은 극진하게 돌보는 반면 키예프 공은 대충 할 도리만 한 채로 팽개쳐 두었다.
제 목숨은 갖고 태어난다는 말이 맞는지,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이는 쑥쑥 자랐다. 보다 못한 여인네들이 돌아가면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암죽을 쑤어 입에 넣어준 덕분이었다. 허약해서 일 년을 못 넘길 거라는 걱정과 달리 갓 태어난 아기 특유의 새끼 고양이 같은 파란 눈동자는 이내 아주 엷은 녹색으로 변했고 정수리만 간신히 덮고 있던 머리카락도 어깨를 넘겼다.
길어야 이 년 정도 키예프 공국에 머물렀던 다른 황족들과 달리 소녀는 만 세 살이 되도록 북부를 떠나질 않았다. 소녀는 사람들을 꺼려했다. 항상 볕이 잘 드는 마을 구석에 앉아 멍하니 햇볕을 쬐고 있거나 서재에 틀어박혀서 오물거리며 글자를 더듬는 게 소녀의 일상이었다. 말수도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신경을 쓰던 공국민들도 나중에는 소녀를 식물처럼 대했다.
봄맞이 축제 무렵 장난기 많은 남자아이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휙 잡아당겼을 때 사고가 일어났다. 소녀는 처음에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빤히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시끄러울 나이인데도 소녀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아이들은 지진아라서 그렇다며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급기야 아이들은 소녀에게 모래를 뿌렸다.
흙이 들어가서 빨개진 눈을 비비던 소녀는 갑자기 확 눈을 치켜뜨고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아이들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저 높은 지붕과 나무 위로 하나씩 걸쳐졌다. 다들 어? 어? 하면서 기겁했다.
아이들이 입을 모아 엉엉 울어대자 마을을 지키고 있던 어른들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소녀에게 물었다.
쟤가 마녀예요!
아이들이 소리 질렀다. 저 애가 자기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악을 쓰며 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높은 전나무는 아이들이 절대로 타고 올라갈 수 없는 나무였다. 떨어지면 어쩌나 어머니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한 어머니는 소녀를 거의 잡아먹으려 했다. 소녀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마을에서 가장 늙은 원로가 지팡이를 짚으며 나타났다.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뒤덮인 정교회의 신부였다. 그는 낡은 수단을 입고 나타나 가만히 소녀의 앞에서 성호를 긋고는 한 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어린 키예프 공."
"키예바 여공이야."
소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발음은 어린 아이답게 어눌했지만 내용은 분명했다. 노인은 입을 힘겹게 열어 웃었다. 두어 개밖에 남지 않은 이가 보였다.
"예. 그럼 키예바 여공. 저 아이들을 나무 위에 올린 것이 전하십니까?"
"……."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말씀해보세요."
"저 녀석들이 먼저 내 머리를 잡아당겼어."
어미인 여인이 빽 소리를 지르려는데 신부가 손을 들어 막았다.
"어떻게 올리셨습니까?"
"몰라."
"올리셨으면 내리실 수도 있으십니까?"
"싫어. 쟤들이 괴롭혔어."
노인은 앙상한 손을 소녀의 머리칼 위에 올렸다. 소녀는 움찔했다.
"제가 전하께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잘 타이르지요. 저 아이들도 잘 깨달았을 겁니다. 부디 내려주십시오."
"내렸어."
소녀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아이들은 어느 새 땅에 서 있었다. 아이들은 주저앉아 울다가 눈물을 뚝 그쳤다. 소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가 볼래."
소녀는 대답을 듣지 않고 아장아장 걸어갔다. 아무도 소녀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대대로 오래된 왕가에는 마법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법사가 없어진 지금도 왕실에서 귀천상혼에 기겁하는 것은 마법의 피가 유출되는 것을 염려하는 풍습에서 왔다고들 했다. 마지막 마법사였다는 동부의 대마법사가 실종된 지도 이미 삼백 년이었다. 말이 삼백 년이지 까마득한 세월이 아닌가.
짧은 왕조가 세 번은 바뀔 시간이 지나 마법사의 핏줄을 타고난 소녀는 북부의 작은 성에 앉아서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신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녀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옛날 옛적에는 소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키예프 공국을 세웠던 표트르는 대단히 강력한 마법사로 폭풍을 그치게 할 만한 힘이 있다고 했다. 황궁에 가면 아직 옛 마법이 남아있다고도 했다.
소녀는 마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몰랐다. 마법이 곧 황실의 계승권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소녀가 힘을 쓰는 것은 아주 사소한 때뿐이었다. 소녀는 어두운 것을 진절머리 나게 싫어했다. 그리고 유모는 소녀가 촛불을 켜는 걸 싫어했다. 소녀는 불꽃을 만들어내어 불을 밝히고 나서야 잠들었다. 아니면 눈이 보고 싶을 때 눈을 내린다든가.
아니면, 구름을 가지고 놀든가.
아주 깨끗한 하늘에 거대한 뭉게구름이 지나갔다. 소녀의 속눈썹이 하늘하늘 팔랑였다. 몽실몽실한 구름에 순식간에 머리와 다리와 뿔과 꼬리가 돋아났다. 완연한 산양의 모습이었다. 소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양의 목을 길쭉하게 늘려 말로 만들기도 하고, 다리를 줄이고 꼬리를 풍성하게 만들어 늑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질리자 구름을 확 흩어버렸다. 소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재미없어."
혼자는 재미없었다. 같이 놀 수 있는 신분의 또래는 유모의 딸 정도였는데 예브게니아는 유모의 위세를 입고 소녀를 괴롭혔다. 누가 보면 그녀가 공주님이고 소녀가 제냐의 시녀인 줄 알 것이 분명했다. 신부에게 가서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징징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는 늙은이인데다가 아주 바빴다. 친구가 필요했다.
소녀는 마음 속 간절히 빌었다.
저에게 친구를 주세요.
소녀는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망토를 뒤집어쓰고 걸었다. 봄이라고는 해도 키예프의 봄은 다른 곳의 봄과는 수준이 다른 추위를 자랑했다. 그런데도 소녀는 자기가 추운 줄도 모르고 걸었다. 길이 줄어든 듯 걸음이 날듯이 빨라졌다.
소녀는 길을 걷다가 벽을 타고 올라가 지붕 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성벽이 가로막자 소녀는 성벽을 훌쩍 타넘었다. 그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계곡과 험난한 바위와 울창한 나무도 소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소녀는 강아지만한 짐승 앞에 서있었다. 비늘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덮인 짐승은 아주 희고 귀여웠다. 강아지라고는 했지만 육 개월 된 썰매개보다도 작았다.
입이 헤 벌어졌다. 아까 갖고 놀던 뭉게구름 같다.
소녀는 물었다.
"누구야?"
짐승은 대답은 하지 않고 웃었다.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의 얼굴인데도 그 짐승이 웃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법사의 피가 아직 끊기지 않았나보구나.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을 보니.]
"마법사의 피?"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뒤로 한 발짝을 내딛다가 그만 넘어졌다.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나무뿌리에 바지가 걸렸다. 살갗이 찢어져서 빨간 피가 났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용케 울지는 않았다.
"으."
[아프겠구나.]
그 짐승은 소녀에게 다가와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반짝이는 예쁜 가루가 소녀의 몸에 들러붙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아픈 곳이 싹 사라졌다. 전날 유모가 마녀라며 때리고 꼬집은 팔뚝도 하나도 안 아팠다.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어린 마법사. 네가 나를 불렀다. 친애의 의미로서 이름을 알려주면 고맙겠구나.]
"네가 먼저. 나는 숙녀니까."
짐승이 웃었다. 그렇게 몸이 작은데도 온 계곡이 다 울릴 만큼 목소리가 컸다. 신비로운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당장이라도 계곡이 무너져 쌓여있던 눈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소녀는 경탄 어린 눈으로 짐승을 바라보았다. 비늘에도 눈이 덮여있었는지, 한참 몸을 틀며 웃고 난 짐승의 몸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흰 색이었다. 영롱하게 오색 빛이 도는 아름다운, 신기한. 유모의 보석함에 든 보석만큼이나 예뻤다.
[나는 파프너다.]
"파프너?"
[하긴, 역사를 배우기엔 네가 너무 어리구나.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자, 이제 듣고 싶구나. 네 이름은?]
"옐레나 파블로브나 키예나."
마법사인 소녀가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전설 속의 악룡이 소원을 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