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6)
아롈은 저도 모르게 목을 감싸 쥐었다.
쓸데없이 옛날의 기억을 되살아났다. 또 한동안 잠들기는 글렀다. 아니, 잠들 수는 있을까? 용은 남의 속도 모르고 즐거운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마법사라면 응당 다른 마법사를 찾을 수 있을 터. 아디브를 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노망이 났으면 바다에나 가라앉아 뒈질 것이지. 지금 천삼백 년 전 사람을 무슨 수로 찾아내라는 건가. 백골이 진토 되어 원혼도 소멸했을 시간이었다.
"해룡이여.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필리프는 거의 쉰 소리로 호소했다.
"마법사라뇨. 마법사는 오백 년 전에 이미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고요!"
[내 앞에 네가 있는데 무슨 소리냐. 너는 내가 마법사도 구분 못하는 반편이 용인 줄 아느냐? 내 앞에서 감히 거짓말을 하다니, 폐에다가 바닷물을 가득 채워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다행인지 불행인지 용의 호통은 아까처럼 배를 출렁이게 만들지는 않았다. 아롈은 바지를 적시고 있는 선원들을 애써 모른 척 하며 '빨간 놈'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주님이라도 영접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 저자도 자기가 뭔지 모르는군. 그런데 그냥 귀족 출신이거니 했건만 마법사라니. 귀천상혼한 가문의 후손이나 대공가의 사생아쯤 되는 건가. 아롈은 홀로 납득한 다음 용을 쳐다보았다.
용은 이제 미셸을 '좀 거무튀튀한 노란 놈'이라고 부르며 너도 꽤 괜찮은 혈통을 가지고 있으니 의지의 힘으로 각성을 해내라 닦달하고 있었다.
"해룡이여."
아롈은 도르륵 굴러오는 저 눈알을 파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으면 쇠꼬챙이로 박박 긁어서 버리고 싶은 끔찍한 기억들의 타래가 지금 줄줄이 묶여 올라오는 중이었다. 이놈의 머리통은 쓸데없는 것들을 지우지도 않고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다.
[말해라.]
그 눈이 어찌나 번뜩하게 빛나는지 아롈은 아디브가 천 년도 전의 사람이고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리라는 첫 번째 전략을 주저 없이 내던졌다. 알려줬다간 거짓말이라고 아롈을 물고문하든가 거짓말이라고 울부짖으며 배를 깨부술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쓰려고 마음먹었던 하오체도 같이 버렸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무얼 하려고.]
"아시다시피 아디브의 정체는 웨데나의 공주 알비다가 아닙니까. 저는 노브고르드 공국의 공녀로 알비다 공주와는 친분이 있는 사이입니다."
지위만은 거짓이 아니었다. 황도는 노브고르드 공국의 땅에 지어졌고, 코시카의 황제는 노브고르드 공을 겸임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롈의 작위에도 노브고르드 공녀가 있었다. 너무 사소한 작위라서 공식 문서에나 들어갈 뿐.
물론 천이백 년 전에도 노브고르드 땅이 그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삼백 년도 안 된 코시카의 이름을 대는 것보다야 나았다.
아롈은 용 따위에게 경어를 쓰는 혓바닥을 도려내고 싶은 심정을 꾹 내리누르며 말을 이었다.
"만일 용께서 알비다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드신다면 저는 전심전력을 다해 당신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그녀는 그만큼이나 소중한 친구니까요."
하늘에 맹세코 아롈이 아는 사람 중에는 알비다는커녕 그 비슷한 이름을 가진 여인도 없었다. 대체 어느 머리 구석에서 이런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아디브에게 해코지를 해? 그걸 말이라고 하는 소리냐!]
"그러니까 이름을 알려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바사 왕조에 원한을 품은 용이 워낙에 많다 보니 저로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십시오."
[나는 아디브를 다치게 하지 않아!]
"저도 정말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만."
[아하, 알았다. 내 이름을 알아내서 나를 묶으려는 거지! 내가 그런 케케묵은 수작에 넘어갈 것 같으냐!]
목소리가 너무 컸다. 아롈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정신줄을 붙잡았다. 조금만 더 하면 뒤로 넘어갈 것 같은 것이 영 상태가 안 좋았다. 아롈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구역질이 났다.
"해룡님."
다소 투박한 변성기의 사내 목소리였다. 붉은 머리의 기사는 그다지 예의 바르다는 소리는 들을 수 없을 만한 어조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말했다.
"이름은 알려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만, 알비다 님을 무슨 일로 찾으시는 지만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만일 알비다 님께서 손끝 하나라도 다치셨다가는 저희 공녀님의 심려가 매우 크실 겁니다. 물론 저희는 해룡님을 믿습니다만 확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시면 알비다 공주님은 물론이요 국왕 폐하까지도 대단히 화를 내실 겁니다."
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누군데?]
"저는 공녀님을 수행하는 수행 마법사입니다."
[마법사라고? 요즘 마법사는 칼을 차고 다니나?]
"최신 유행입죠. 마법사가 허약하기만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요."
[내가 너희들이 아디브의 친구라는 것을 어떻게 믿지?]
아롈은 잠깐 숨을 고르다 깨달았다. 붉은 머리의 기사는 대공자인 미셸도 그리 능하지 못한 북쪽 말을 써서 용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미셸까지도 아롈이 펼쳐놓은 거짓말에 장단을 맞췄다.
"용이여. 그의 말 그대로입니다. 부디, 부디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저희가 당장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질 않습니까."
용은 잠시 고민하는 듯 고개를 비비 꼬았다. 아롈은 그 멍청한 얼굴에 당장이라도 번개를 내리꽂고 싶어졌다. 하지만 참았다. 행동하되 냉정하라고 하지 않던가. 아롈은 지금 냉정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부글부글 끓는 주전자처럼 인내가 졸아들고 있었다. 평생 지키리라 한 맹세를 깰 마음 상태가 아니었다.
[좋다. 이름을 말해주지. 대신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입니까?"
용은 대단히 음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디브의 친구라면 알겠지? 아디브의 머리색과 눈색을 맞춰봐라. 그러면 내 이름을 알려주는 건 물론이요, 아디브를 찾은 다음 후하게 선물을 주겠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천삼백 년 전 공주의 머리색을 알 재간이 어디에 있나. 아롈은 황위를 앞에 두고도 깨지 않은 긍지를 목숨 앞에서 깨야 되나 슬슬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다시는. 아무리 어린 나이에 한 맹세라도 과거의 자신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하는 게 아닐까?
[왜, 모르겠느냐?]
바사 왕조의 머리카락이. 아롈은 힘겹게 옛 왕조의 초상화를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무리였다. 황실의 조상들 머리색도 일일이 외우기 어려운 마당에 남의 나라 천 년 전 사람들의 머리칼 색을 떠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뱀의 문장을 쓰는 웨데나는 전통적으로 뱀과 새매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독수리인 키옌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다.
[모를 리가 없는데. 친구인데 머리색과 눈색도 모를 리가 있나.]
그냥 아무렇게나 할까. 북구에는 금발이 많으니 금발로? 그 때 붉은 머리의 청년이 다시 한 번 끼어들었다.
"왕녀님의 머리색은 검은색이시고, 왼 눈은 푸른 색, 오른 눈은 검은색이시죠. 저희 공녀님을 수행해서 뵌 적이 있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걸 그냥 찍어버리면 어떡하라고! 이름도 모르는 무례한은 세 발 앞으로 걸어 나가 아롈에게 등을 보였다.
"틀립니까?"
[맞다.]
아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걸 맞췄다고? 심지어 양쪽 눈의 색깔이 다른 걸?
[그런데 왜 친구라는 계집이 직접 대답을 안 하고 네가 하느냐?]
"저희 공녀님께서 워낙에 병약하신지라 조금 놀라신 것 같습니다."
용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긴 한데. 이상하구나. 내가 너희들을 바다에서 그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데.]
"공주님께서 해적선에 타시기 전에 친하셨던 사이입니다."
[아하, 그랬구나.]
아롈은 숨이 좀 진정되자마자 용의 말을 재빨리 끊어먹었다.
"용이여. 저희가 알비다 공주의 친우라는 사실은 이로서 증명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약속대로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고, 알비다 공주와 어떤 사이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용이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것은 대단한 호의다.
파프너는 그렇게 말했다. 아롈은 그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조차 역겨웠지만 그 내용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이라는 게 그만큼 중요하거든. 특히 마법사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고 깨진 사금파리만도 못 하게 된 용들이 많지.
-파피도?
-글쎄, 어떨 것 같으냐?
이름만 알아내면 어떻게든 목숨은 건질 수 있다.
[나는 아디브의 친구다. 아디브가 바다로 나온 다음 나와 친교를 맺었지.]
용은 주제에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참 예쁜 아이였어. 명랑하고, 용감하고. 사랑스럽고.]
아이였다고?
[그 얼굴만 반반한 왕자인가 하는 놈이 올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행복했다. 금은보화를 가득 모으고 배가 터지게 생선을 잡아먹었지. 인어들과 물놀이를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단 말이다. 그런데 왕자인지 뭔지 하는 굴러온 돌이 갑자기 나타나 내 아디브를 채어갔어!]
저 멀리서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게 눈에 보였다. 맑은 하늘에 한 점의 먼지처럼 떠있는 검은 먹구름은 참으로 기묘했다. 이렇게 수온이 낮은 내해에 폭풍이라니!
[네가 아디브의 친구라면 알겠지? 아디브는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싸우다 말고 반했다며 자신을 데려가 달라 빌다니! 내가 저 남쪽에서 열리는 해룡의 회의에 참석하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디브는 이미 결혼한 뒤였다! 뭐가 그리 급한 지 이미 선상에서 결혼식을 다 올렸더군! 내가 전속력으로 달려 아디브에게 돌아왔을 때 그녀는 내게 이미 초야를 치른 뒤니 다시는 나와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게 말이나 되느냐!]
그럼 평생을 해적질로 소일하며 용과 놀아줬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롈은 싸늘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럼 당신이 인간으로 변해서 신랑 각시 놀이를 해주든가. 하긴, 목소리를 보아하니 계집용인데 그게 가당키나 했을까.
"용이여. 제 친구를 아끼는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부디 이름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먹구름이 뚝 멈추더니 다시 쪼그라들었다. 용은 이를 드러냈다.
[네가 믿지 않으면 어쩔 건데?]
"용께서는 아디브를 찾지 못 하시겠지요."
[그건 차차 생각하면 되지. 내가 마법사 따위에게 이름을 가르쳐 줄 만큼 그렇게 만만해보이나?]
"용이여, 약속 하셨지 않습니까."
[약속? 그걸 왜 지켜야 하지?]
-원래 용이라는 건 다 거짓말쟁이다.
비늘 달린 족속들을 신뢰하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비늘 달리지 않은 용까지 이 모양일 줄이야.
아롈은 그에게 이름을 듣는 걸 포기하고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뒤졌다. 릴레벨트. 릴레벨트. 바다. 내해. 바다의 용. 파프너. 그 희고 아름다웠던 패배자는 아롈을 붙들고 이런저런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롈은 본디 집중력이 강했고, 어렸을 때에 한 일이라곤 파프너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는 것밖에 없었다. 생각하자. 파프너는 수다쟁이 용이었다. 파프너가 떠든 것 중에 이 자의 이름이 있을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이 용이 파프너가 은거한 다음 태어나지 않았다면야.
-나이를 들어서도 마법을 쓰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건 아니야.
-용들은 새끼가 아니라 알을 낳는다.
이것도 아니다.
-나만 역사서에 이름이 남은 건 아니다.
이건가?
[너.]
심장이, 늑골을 뚫고, 튀어나올 뻔 했다.
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 거대한 머리를 아롈의 바로 코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코끝부터 아롈의 배까지 단 두 뼘도 떨어져있지 않았다. 아롈이 웅크린 것보다 클 것 같은 샛노란 홍채와 길게 찢어진 동공은 가까이서 보니 수십만 배쯤 혐오스러웠다. 짠 냄새, 그리고 어디에서 나는지 알 수 없는 희한한 비린내. 아롈은 숨을 멈췄다.
[표정이 참 안 좋구나? 내가 뜯어고쳐주랴?]
인내라는 것이 끊길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찰나, 스쳐지나간 생각의 편린이 마지막 실낱같은 인내를 선사했다.
-제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 이는 틀림없이 공주가 마법사였을 거라 하더군요. 배 한 번 몰아보지 않은 여자들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어찌 죽지 않고 떠돌아다닐 수 있었겠냐면서요.
마법사와 용. 그들이 서로 맺을 수 있는 계약.
-마법사라면 응당 다른 마법사를 찾을 수 있을 터. 아디브를 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래, 그녀는 옛 왕조의 공주였다. 마법사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과연 마법사였던가.
-얼마나 자비 없었던지 본국의 상선도 가리지 않고 털었다는 모양입니다.
강인한 여해적. 과연 그녀가 해적질을 한 것이 맞았을까? 그녀에게 맞선 배를 누군가가 가라앉혀버린 것이 아니고? 예를 들어, 아주 거대하고 긴 목을 가진 해룡이라든가?
아까 예쁜 아이였다고 말했지. 예쁜 아이가 아니라. 자세히 보니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연신 진지한 모습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이리 저리 말을 바꾸고, 사람들이 바들바들 떠는 걸 보며 구경하고. 머리색과 눈색이라니. 그걸 가지고 문제를 내는 게 가당키나 한가? 갑자기 사람을 찾아내라고 배에 불쑥 나타났다고?
인내의 실이 끊어졌다. 아롈은 킁킁거리는 용의 콧구멍을 코앞에 두고 서느렇게 내뱉었다.
"너, 지금 장난치고 있구나."
경어를 써 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노망난 용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롈은 확신을 가졌다.
"천 년도 전에 죽은 사람을 가지고 남을 겁주니 재미있나? 행복한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디브가 죽었다는 것을. 죽은 지 오래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겠지! 그걸 알면서 아롈과 미셸과 붉은 머리의 기사가 얼떨결에 거짓말을 하고 말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는 걸 보며 즐기고, 눈과 머리칼의 빛깔을 정말로 맞춰버리자 당황한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천연덕스런 목소리가 너무 분해서 몸이 떨렸다. 누가 아롈의 잔뼈 하나하나에 칼을 집어넣는 것처럼 저렸다.
그래, 너도 결국 용이구나. 파렴치한 짐승.
아롈은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잡아먹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