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다의 용과 여해적과 마법사 (9)
앙투안은 어릴 적부터 직감이 강했다.
황제의 사생아로 태어나 인지를 받지 못했을 무렵, 그는 그저 천방지축인 사내아이였다. 왕의 공식 정부였던 어머니는 앙투안 자체보다는 앙투안의 아랫도리에 더 관심이 많았다. 딸이 아닌 사내아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어머니는 알몸으로 황제의 침실에 들어갈 때마다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 아이를 폐하의 아이로 인정해주세요. 부디 폐하의 성을 내려주시고 축복해주세요.
하지만 황제에게는 어머니 말고도 십수 명의 정부가 있었다. 황제는 그 지위에 있는 사내가 흔히 그렇듯 호색했고 어머니는 공식 정부라는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나마 앙투안이 사생아들 중 유일한 남자라는 것이 어머니의 희망이었다.
황후는 황제의 여성편력을 대단히 못마땅해 했지만 대놓고 정부에게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방에 들어앉아 아이를 갖고 낳는 데에만 열중했다.
여러 명의 딸을 거쳐 드디어 생산된 황후의 삼남은 루이 샤를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 샤를과 앙투안은 세 달 차이의 동갑내기라 걸음마를 시작한 다음부터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길 즐겼다.
아홉 살 많은 이복 형 세시안에게 걸렸다간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날 것이 뻔해서 아이들은 그를 슬슬 피해 다니며 정원을 파헤쳐 귀한 나무를 죽인다든가 비싼 태피스트리를 뜯어낸다든가 도자기를 깨부쉈다.
황실의 인물들은 대부분 앙투안에게 호의적이진 못해도 적대적이진 않았다. 남자 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고 대대로 발루아 가문은 딸은 많고 사내는 귀한 집안이었다. 앙투안의 이복누이들, 그러니까 다른 정부들이 낳아대는 아이들도 전부 딸이었고, 살아있는 '마담'은 여섯 명이었지만 '무슈'는 세르를 포함해도 두 명 뿐이었으니.
장난꾸러기들이 여덟 살이 되던 해, 정확히는 샤를의 생일은 지났지만 앙투안의 생일은 아직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수도 전체에 천연두가 발병했다.
아이들은 두말 할 것 없고 어른들마저 픽픽 죽어나갔다. 마담 안 마리와 마담 마르그리트 루이즈마저 천연두에 걸려 앓아누웠다. 샤를과 앙투안도 어김이 없었다. 그들은 각각 떨어진 방에 감금되어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사경을 헤맸다.
천연두가 끝난 뒤는 정말 참담했다. 마담이 두 명이나 죽었고, 한 명은 얼굴이 완전히 얽어 수도원에 들어가 버렸다. 귀한 집 자식들이 수도 없이 묘지에 묻혔지만 황실이 입은 가장 큰 손실은 무슈 루이 샤를의 사망이었다.
그 때는 죽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도 제대로 몰랐다. 전염병에 걸려 죽은 자식이라 해서 마지막 인사도 받지 못 한 채 장지로 향한 작은 아이는 영영 앙투안과 궁을 뛰어놀 수 없게 되었다.
샤를이 죽은 줄도 몰랐던 앙투안은 상태가 호전되자 얼굴에 딱지가 가득 앉은 채로 황제에게 불려갔다. 황제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그를 훑어보았고, 그 다음 날 앙투안은 '드 클라리'에서 '드 발루아'의 성을 얻게 된 데다가 이름 앞에 루이를 덧붙였다. 앙투안의 어린 누이도 마찬가지로 드 발루아의 성과 함께 낭트의 아가씨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알았더라면. 어머니는 정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앙투안은 어머니를 붙들고 샤를을 보고 싶다고 투정부렸지만 어머니는 그를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직감이 생겼던 것은 그 직후였다. 앙투안은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을 알았다. 마음속에서 누가 크게 정답을 알려주는 기분이었다. 그는 겁에 질려 도망쳤다. 아무도 모르는 숲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몰래 숨겨가지고 온 빵과 물만을 먹으며 일주일을 버텼다. 삶이 뭔지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는 막연히 직감이 알려준 죽음을 회피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궁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누이가 죽었음을 알았다. 그리 친하지 않은 작은 아이였지만 그는 누이의 시체를 보고 죽음이 뭔지 깨달았다. 아주 차갑고 딱딱하고 새빨간 것.
앙투안은 직감이 다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황후가 범인이야.
그 뒤로 앙투안은 죽음의 위기를 수도 없이 넘겼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었을 때 그는 검을 배우겠다며 궁을 나갔다. 그 뒤로 갑자기 배를 탈 때까지 그의 직감은 카드놀이에서나 발휘되었다.
옐레나 여대공은 낮달처럼 희미하게 웃었다. 용이 한 말에 의하면 똑같은 마법사인데 아까 환상처럼 떠오른 알비다 공주의 얼굴은 그녀와 굉장히 느낌이 달랐다. 검은 머리칼 위에 머릿수건을 두르고 바지를 입은 둥근 얼굴의 아가씨는 여대공보다는 훨씬 강해보였다. 큰 마법은 더 큰 불행을 불러온다는 말이 정말일까. 사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이도, 자신에게 한없이 집착하던 어머니도 자기 때문에 죽은 건가.
앙투안은 점점 말도 안 되는 생각 속에 갇히는 기분이 들어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비전하께서는 그럼 어떻게 하셨으면 하십니까?"
"일단 나는 힘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거요."
"그렇다고 배가 가라앉게 놔둘 수는 없잖습니까? 아까 그 용을 보면 배를 통째로 삼키겠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이 배가 가라앉았다간 로렌이 뒤집어질 것이다. 이 배에는 태자비, 대공자 둘, 그리고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황제의 아들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배를 가라앉힐 수는 있겠지만 통째로 삼키겠다는 것은 허풍이오."
"어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물론 배가 크니만큼 약간의 과장이 섞여있겠지만."
"용은 마법사를 먹을 수 없기 때문이오."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법사의 피는 체내에 들어가는 순간 용에게 독이 되오. 한 사람 분을 삼켰다가는 무사하지 못 할 거요."
"확실합니까?"
그녀는 피로 위에 짜증을 덧칠하고 다시 억지로 친절을 덮은 얼굴을 팔로 괴었다.
"일단 내가 알기로는 그렇소."
"그럼 피를 뽑아내서 공격하면 되지 않습니까?"
"경, 아니 공작은 사혈법이 잡은 이가 몇이나 되는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시오?"
사혈법은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될 때 다짜고짜 피를 빼내는 방법이었다. 황제의 숙부들도 사혈법이 죄 때려잡았다. 한 백 년 전에나 유행했던 방식이긴 했다.
여대공은 피를 뽑아낸다고 한들 뉘가 그 피를 먹이겠냐며 다시금 뾰족하게 대답했다.
"용의 말에 의하면 여기 마법사가 넷입니다. 넷의 피를 모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잘못하면 정말 장례를 치르는 수가 있어."
미셸이 평소의 소탈함은 찾아볼 수 없는 정중한 어투로 만류했다. 여대공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 전에 묻겠는데, 샤를루아 공작과 멘 공작은 자기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정말 몰랐소?"
"전혀 몰랐습니다."
필리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정말로 색이 완전히 빠지게 질려 있어서 누가 봐도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앙투안도 고개를 저었다.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용의 이름을 알아내야 하오."
"이름 말씀이십니까?"
"이름에는 언령이 담겨있기 때문에 마법사가 용의 이름을 알아내면 그 용은 함부로 마법사를 해코지할 수 없소. 아, 확실하오."
마담 리젤로트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애써 누르고 있었건만. 여대공은 그 예쁘장한 얼굴로 계속 그를 쿡쿡 찔렀다. 수하에 있는 사내놈들이 저따위로 굴었으면 목검을 맞대고 두들겨 팼을 텐데 손목도 부러질까 겁나도록 가느다란 여자인데다 자기보다 신분도 비할 데 없이 높아서 그럴 수 없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었다.
"멘 공작의 직감에 기대어보는 수밖에. 용이 실수로 이름을 알려줄 일은 없을 것 같소."
미셸이 물었다.
"그럼 이름을 알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녀는 생긋 웃었다. 앙투안은 발가락에 꾹 힘을 줬다. 북쪽 여자가 예쁘다더니. 성질과는 다르게 얼굴은 빚어놓은 듯 고왔다.
어여쁜 얼굴처럼 고운 목소리는 스산한 내용을 흘렸다.
"싸우다가, 죽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