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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3. 금발과 흰 손 (4)


 아롈은 목걸이를 바닷물이 담긴 컵에 던져두고 쭉 뻗어버렸다. 문은 단단히 잠그고 다섯 번쯤 확인한 뒤였다. 온갖 정치적인 계산들이 머릿속에서 춤추다가 픽 쓰러졌다. 소녀는 푸른 용을 노려보았다.

[왜?]

저 축생은 생각이라는 것이 없나보다.

"너 때문에 지금 내가 얼마나 골치 아픈 상황에 처했는지 알고 있나?"

[뭐가 그렇게 문제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아롈은 분에 못 이겨 숙녀답지 못하게도 베개를 푹 내리쳤다. 그나마도 거위털이 제대로 차지 않아 속이 빈 감촉이 나자 더 짜증이 났다. 벨타는 노란 눈을 멀뚱하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노처럼 생긴 지느러미가 사부작사부작 움직이는 것이 한가롭기만 했다.

아롈은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몸을 씻고 침의로 갈아입으며 풀어 내린 머리칼은 아직도 물기를 머금고 있어 뺨이며 뜨끈하게 달아오른 귓불에 들러붙었다.

"나는 지금 어마어마한 약점을 잡힌 거다. 다름 아닌 너 때문에!"

아롈은 벌떡 고개를 들고 윽박질렀다.

"뭐가 문제냐고? 들킨 게 문제지! 내가 분명히 들키지 말라고 당부했건만 다른 이에게 목격당하고도 내게 일언반구조차 않다니!"

바로 어제 앤을 시녀로 들였건만 그 사이에 걸려?

마리야 여대공이 얘기를 풀어놓는데 기절할 뻔했다. 벨타를 데려가는 것은 그나마 가장 친밀한 미셸이나 사촌인 필리프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지쳐있는 아롈에게 접근해 점수를 따보려 했던 앤은 뜻밖의 큰 소득을 올렸던 것이다.

사람도 아닌 것에게 탓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으면서도 절로 원망의 말이 튀어나왔다.

"대체 처신을 어찌 했기에. 설마 잡아먹으려고 네가 부른 건가?"

[내가 미쳤니? 지금도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인데. 열 명이면 따로 힘 쓸 일이 없는 이상 일 년은 괜찮아.]

"그럼!"

[좀 부주의할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변명 같지만 난 들킨 걸 몰랐어.]

꼭 이런 종자들이 있었다. 제 잘못을 인정할 줄도 모르고 반성의 기미조차 없이 뻔뻔한 주제에 그걸 당당함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이들. 사람만 그런 줄 알았더니 용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용과 계약한 여자면 보통 환영받지 않나? 요즘은 아닌가?]

"그래. 환영받겠지.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좋아해 앞으로 밤에 문단속을 염려해야 할 판이다. 어떤 밤손님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벨타는 사납게 이를 드러내고 하품을 했다. 그 동안에도 예쁜 목소리는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인간이 아냐. 인간하고 부대껴 살아본 지도 한참 오래 전의 일이고. 요즘 너희들이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내가 어떻게 알지? 네 뱃속을 꿰뚫어보고 행동하리라 생각지 마.]

아롈은 고개를 다시 파묻고 숨을 골랐다. 맞는 말이지만 화가 났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솟아오른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화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이 내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다간 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다."

[왜?]

북부를 지배하는 코시카의 황가 키옌은 대마법사라고 일컬어지는 표트르로부터 이어져 내려온다. 마지막 마법사 이후 모든 왕가에 각성한 마법사가 사라진 지 삼백 년이 지난 지금도 황실 전범에는 아직 '키옌의 피를 물려받은 마법사의 황위계승권은 마법사가 아닌 모든 황족에 우선한다.'는 조항이 적혀 있다.

하물며 아롈은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각성한 마법사였다. 물론 아롈은 모종의 이유로 다시는 마법을 쓰지 않으리라 맹세했고, 앞으로도 쓸 생각이 전혀 없으며 릴레벨트를 데리고 있는 것을 공표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조용히 쫓겨나 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걸 알아줄 리 만무했다. 안 그래도 어머니는 그리 정통성 있는 황제가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아롈을 죽이려 들리라. 설마 다른 나라 태자비를 해할까 싶어도 방심할 수 없었다. 옐레나 1세는 한 나라의 황제를 죽인 여자였다.

아롈은 이 긴 이야기를 간결하게 줄여 말했다.

"네가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참 복잡하게들 사는군?]

어머니가 가만 둔다고 해도 온 세계에 로렌의 태자비는 해룡을 부리는 마녀라고 소문날 판이었다. 심지어 로렌은 신교도 아닌 구교를 믿어 한 때 마녀사냥이 극성이던 나라였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이런 비밀을 품고 있었으면서 허락 없이 근처에 오지 말라는 경고도 내리지 않고 희희낙락했다니. 멍청하긴. 아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리야 여공은 굳이 이 모든 것을 조목조목 짚지 않았다. 그 대신 다시 한 번 앤을 데려갈 것을 요구했다. 아롈은 끝까지 아니라고 우겨댔지만 '그럼 황도에 편지를 보내는 게 좋겠냐?'는 여공의 공격에는 맥없이 무너졌다. 여공은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가버렸다.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지 앤을 돌려보내달라는 말이 화룡점정이었다.

[그 애 이름이 앤이라고 했지? 내가 먹어줄까?]

"닥쳐."

[소화불량이긴 하지만 야들야들한 계집애 하나쯤이야 꼭꼭 씹어먹으면 괜찮을 거야. 어때? 덤으로 그 늙은이까지 같이 처리해주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 둘은 마법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며칠 새 여기저기서 마법사가 튀어나오다보니 혹시나 의심을 품었다. 아롈은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하지 마."

고모의 손녀이니 앤은 아롈에게 오촌 조카가 되었다. 아롈이 늦둥이인데다 파블 1세와 마리야 여공의 터울 차이가 꽤 크다보니 나이 많은 조카를 시녀로 다 두게 생겼다.

"공작부인에게 미리 공증을 남겼을 줄 어찌 알고."

아무리 아롈이 드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작센 국왕의 사촌 형수를 죽여 놓고 조용히 묻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작센의 국왕인 빌헬름은 옐리자베타 이바노브나 여대공의 아들로 아롈의 고종사촌 되는 몸이었다.

복잡한 상황에 이가 갈렸다. 아롈이 배운 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정치지 이런 쓸데없는 전설 속의 생물 따위가 끼어 있는 난장판이 아니었다.

곱씹을수록 화병이 도질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먹는 것도 안 되면.]

"데려가야지 어쩌겠나."

이왕 이렇게 된 것 어떻게든 잘 살아보리라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건만 도착하기 전부터 큰 빚을 하나 지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생각하자니 힘이 빠졌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있을 것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났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침묵의 맹세를 받아뒀어야 했다. 머리가 잠시 돌았나보다. 무슨 자신감으로 군주에게 보고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 운운하며 잘난척을 했을까. 아롈은 머리를 싸쥐었다.

멘 공작 루이 앙투안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 미셸은 어떻게든 될 것 같고, 아.

잊고 있었지만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동이 텄다. 아롈은 남을 방문하는 것이 무례가 되지 않는 한 가장 이른 시간에 방을 나섰다. 샤를루아 공작 필리프에게 산책을 가자며 에스코트를 청하자 함께 있던 미셸은 다소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사촌이라고는 하나 세대도 국적도 성별도 달라 공유하는 것이 거의 없는지라 그와는 데면데면하게 굴었던 것이다. 미셸과도 열 살 넘게 나이차가 났지만 필리프는 아롈의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였다.

그는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시답잖은 잡담이나 늘어놓으며 별 볼 일 없는 정원을 세 바퀴쯤 돌고 나니 그도 지긋지긋했는지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냐는 눈치를 강렬하게 보내왔다.

"전하, 이 늙은이가 나이를 먹고 나니 무릎이 시원치 않습니다."

"사촌이 많은 일에 바삐 뛰어다니시니 그러하겠지요."

"제가 하는 일이 무엇 있겠습니까. 그저 전하를 수행함에 있어서 부족함을 자책할 따름입니다."

"바다에서 있었던 일은 그저 묻어두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인력으로 좌지우지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만 한 일입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아롈은 막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사촌의 어머니는 어느 가문의 사람이지요?"

"나바르의 마리 필리피느입니다."

남부의 압존법은 알고 있는 것임에도 들을 때마다 놀라웠다.

"나바르라. 가언이 '나의 검에 걸린 신의를 ​그​대​에​게​'​였​던​가​요​?​"​

"그렇습니다."

아롈은 잠시 공부가 헛되지 않았다는 뿌듯함을 품었다.

"마리 필리피느라. 내게는 외숙모가 되는군요. 사촌의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을 딴 것인가요?"

"예. 그렇지요."

"나바르의 이름에 걸맞은 이였나요?"

필리프는 노련한 정치꾼답게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여인으로서 검을 쥘 수는 없으되 마음에 강인한 검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강단 있는 귀부인이었지요.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갑자기 뵙고 싶군요."

검을 쥘 수 없다니. 꽤 오랜 시간 체력단련 겸 검술, 총술, 승마술을 한꺼번에 배웠던 아롈로서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남쪽의 풍습이란 얼마나 고루한지.

"사촌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나요?"

"제 머리칼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성정은 많이 닮지 않은 것 같은데요."

"제가 부족한 탓이지요. 어찌 자식이 어머니를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아롈은 상냥하게 웃었다.

"그래서 나보다는 여제 폐하를 따르나요?"

스파이 짓을 하는 것을 처음 지적한 것도 아니건만 필리프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늙은 공작은 잠시 어린 사촌의 의중을 더듬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아롈이 숙녀이고 신분이 높다는 것 때문에 주도권은 여전히 아롈에게 머물러 있었다.

"놀랄 것 없어요. 나는 사촌이고, 폐하는 사촌에게 고모가 되니 그쪽이 더 가까운 친척이지요."

"전하. 청포도의 보르디는 칠인의 맹세가 성립된 뒤부터 로렌의 황제 폐하께 충성하는, 충실한 발루아 가문의 신하입니다."

"나는 보르디 가문이 아니라 사촌이 누구의 편이냐고 물었습니다만?"

"그런 것을 어찌 딱 잘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가 슬퍼할 때는 남편으로서 아내의 편이요, 딸이 고초를 당했을 때는 아비로서 딸의 편이요, 친우가 힘들어 할 때는 친우로서 친우의 편이요, 폐하께서 고뇌하실 때에는 신하로서 폐하의 편이겠지요."

누가 오래 살았다고 안 할까봐? 그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운 언변으로 빠져나가려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곤경에 처한다면 내 편을 들어줄 수도 있겠군요?"

"마담 라 세르께서 곤경에 처하신다면 마땅히 신하된 자로서 보필해야겠지요."

단순한 사람이었더라면 여기에서 우리는 혈연이니 심려치 마시라고 덧붙였겠으나 과연 만만찮게도 그는 말을 아꼈다.

아롈은 기싸움에 신경을 쏟는 것은 이만하면 족하다고 여기기로 했다. 능력이 달리는데 어떡하나. 정치가는 보통 마흔 중후반에서 쉰 정도에 절정기를 구가하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혈통과 교육이 받쳐준다고 해도 이제 겨우 열여섯인 아롈은 햇병아리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편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갖고 있는 것은 쓸데없는 솔직함, 혹은 솔직함으로 보이게 하는 위장 재주뿐이었다. 투박한 방식이지만.

"나는 사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 어머니에게 줄을 대고 있다는 것은 알지요."

코시카 황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지 안다. 아롈은 새삼 서글퍼졌다. 아롈이 아직 체사레브나였더라면 이런 방식으로 도움을 구걸할 일도 없었으리라. 이반 3세가 붕어하기 직전까지 아롈은 반쯤 대리청정에 가까운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하긴, 그랬다면 남쪽으로 시집갈 일도 없었곘지.

"알다시피 지금 내 힘은 미미합니다. 코시카의 추정황위계승자였던 나라면 사촌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겠지만 나는 밀려났고, 앞으로 사촌의 조력이 꽤나 절실하게 필요해질 예정입니다."

이것도 정치적 수사라고 쏟아내는 자신이 한심했다. 조력을 구걸하는 것이 벌거벗은 듯이 수치스러워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롈은 최대한 당당해보이려 애썼다. 어차피 간파당하겠지만.

필리프가 언뜻 눈웃음을 쳤다.

"리무쟁 공작으로는 부족하십니까?"

아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남편의 혈육이지만 사촌은 내 혈육이잖습니까."

손바닥을 꾹 말아 쥐자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내가 왜 다 늙은 남자에게 이런 아양까지 떨어야 하나. 이게 다 릴레벨트 때문이다. 조금 불리해도 차근차근 기반을 다지면 어려울 것이 없다 여겼건만. 도착도 전에 큰 빚을 져서 그걸 어떻게든 상환해보려고 아등바등 이게 무슨 꼴인가. 노는 물에 피를 내서 뿌려버릴까.

필리프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 이마의 주름이 더 깊어보였다. 아롈은 말없이 기다렸다. 그리고 나온 말은 문맥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 잡담이었다.

"혹시 황후 폐하께서 마담들의 이름을 붙이실 때 소피와 아델라이드를 하나도 넣지 않으신 것 아십니까?"

전혀 몰랐다.

"심지어 전대 황후 폐하의 존함이 아델라이드셨는데도 말입니다."

"여제 폐하 때문인가요?"

"예."

어머니의 처녀적 이름은 보르디의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였다. 아롈은 어머니가 결혼 전 어떤 사람이었는지 몰랐다. 황태자의 약혼녀였지만 다른 이에게 밀려나서 파블 1세와 결혼했다는 것밖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황후 폐하께서는 끝까지 전하와 세르의 혼사를 반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하께서 도착하시기만을 벼르고 계십니다."

"어째서."

"전하가 여제 폐하의 따님이기 때문에, 그리고 마담 라 세르의 지위는 황후의 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치졸할 수가 있나?

필리프는 황후가 그간 며느리들에게 얼마나 패악을 부렸는지 차분히 설명하고 거기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외람되오나 전하께서는 아직 황위계승자라는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 하신 것 같습니다."

통렬한 지적이었다. 아롈은 얻어맞은 사람처럼 주먹의 힘을 풀었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른 사람과 기싸움을 하시는 것은 전하께서 상대에게 아쉬운 것이 없을 때나 즐기셔야 할 유희입니다. 원하는 것을 가진 이에게 지위와 신분을 내세워 빈정거리는 말장난을 하신다면 응당 반발이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혀끝을 꾹 깨물었다.

"쫓겨나듯이 시집가는 주제에 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훈계하는 건가요?"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주제를 알고 납작 엎드리라는 건가? 나는 아직도 HIH 여대공 작위를 가진 코시카 황제의 딸이다. 계승권이 없어도 내 몸에 흐르는 피는 한없이 새파랗다. 겨우 HGDH 대공자 주제에.

손톱이 손바닥을 할퀴며 미끄러져 안쪽에 박혔다.

"전하께서 저를 혈육이라 언급하셨기에 말씀 올린 것입니다. 불쾌하십니까?"

불쾌하다마다. 필리프의 혓바닥에 뭉개진 자존심이 부르르 떨렸다. 아롈은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 해 크게 심호흡했다.

"마음 상하셨다면 송구스럽습니다."

"……."

"지금 저는 전하의 흉내를 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한 적 없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롈은 혀끝이 잘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게 꽉 물었다. 하지만 한 번 거하게 얻어맞은 이성은 비틀거릴 뿐 좀처럼 제대로 서질 못 했다.

"적을 만들어도 상관없다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성향에 따라서는 그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두루뭉술하게 지낼 때보다 훨씬 아군이 분명해야 합니다. 여쭙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몇 명의 아군을 가지고 계십니까?"

말 하나하나가 총알이나 화살 같았다. 아니, 단단한 목검 같았다. 무방비로 서있는 자신을 차근차근 때려서 으스러뜨리려는 사람처럼 필리프의 입술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마음에 적당히 드는 리무쟁 공작에게는 호의를 보이시고, 멘 공작과 저는 대놓고 멀리 하시고, 그렇다고 여인들에게 잘하는 것도 아니어 보이셨습니다. 배 안에서 시중을 들어준 시녀도 형식적인 인사 한 마디 없이 돌려보내셨지요. 사실 지금에야 저를 찾아올 생각을 하셨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적어도 배에 타자마자 오실 줄 알았지요."

목까지 피가 쏠렸다. 질책이 듣기 싫어서 귀를 막고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다 틀렸다고 악을 쓰며 부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성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하. 전하의 편이 아무도 없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구신다면 결국 전하께서는 로렌에서도 밀려나실 겁니다."

이미 한 번 경험해보지 않았냐는 필리프의 말에 아롈은 석상처럼 굳어서 손가락이라도 하나 움직여보려고 애썼다. 가볍게 협박하고, 회유하고, 그것도 안 되면 거래를 하리라고 생각하고 나왔다. 그런데 아롈은 밟히고 있었다.

부정하지 않겠다. 제국의 여대공으로서 보기 싫은 사람은 보지 않고 살아왔다. 그게 잘못된 건가? 이렇게 조목조목 비난 받을 만큼?

폐를 가득 채운 것은 뻥 터져버릴 것 같은 반감이었다. 그래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응당 반발이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와 보르디는 어차피 밀려날 아군은 필요 없습니다."

아롈은 수명을 한 십 년 쯤 줄이는 기분으로 침을 삼켰다.

"이왕 말씀드리는 김에 확실히 알려드리지요. 보르디는 여제 폐하께서 마담 라 세르의 자리에서 밀려난 이후 근 30년 간 발루아와 혼사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보르디 대공은 와병 중이지요."

현 보르디 대공이면 여제의 오라비이자 필리프의 아버지로, 아롈에게는 외숙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노환으로 앓아눕는 바람에 아직 대공자인 필리프가 보르디의 일을 맡고 있었다.

"좋든 싫든 전하께서는 전(前) 보르디 대공의 외손녀시고, 전하께서 무슨 실수를 하시건 그건 전부 보르디의 흠이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황도에서도 지금처럼 행동하신다면 보르디가 앞으로 100년 동안 발루아와 혼사를 맺지 못 한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열여섯 살짜리 소녀의 모자란 행동 때문에 가문이 침몰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초반의 빙빙 돌리는 화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필리프는 어떻게 말하면 아롈이 가장 수치스러워 할 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제가 자국의 태자비인 전하보다 여제 폐하를 더 따른다 암시하셨습니까? 저보다 따님이신 전하께서 훨씬 잘 아시겠지만 폐하께서는 자신의 편을 만들어 신뢰를 쌓는 능력이 탁월하십니다."

너와는 다르게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겨우 겨우 손을 들어 뺨을 만져보았다. 당장 페치카에 집어넣고 땔감 대신 써도 될 것처럼 뜨거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늙은 대공자는 찬찬히 사촌의 창백한 얼굴을 살펴보다가 낮게 헛기침을 했다. 아롈은 사형 집행인의 도끼를 쳐다보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리무쟁 공작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는 전하의 약점을 발설할 사람이 못 됩니다. 멘 공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상륙하자마자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께 파발을 보냈고 여제 폐하께도 연락을 취했습니다만 전하께 해가 될 내용은 없었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열병에 걸려 끙끙 앓는데 입안에 찬물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고 아롈은 반사적으로 손을 얹었다. 그 위에 입술을 댄 필리프는 입가에 주름이 세 개쯤 늘어날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산책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 들어가시지요. 오찬 때가 다 되었습니다."

아롈은 쓸데없이 솔직하게 물었다.

"나는 대체 사촌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필리프는 앞으로 걸어 나갔고 아롈은 무심결에 따라 끌려갔다.

"그것 아십니까? 여제 폐하께서는 처녀적 무도회장에서 막 마담 라 세르가 된 황후 폐하의 뺨을 때리셨습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가끔 철로 빚은 것이 아닐까 싶었던 어머니가?

"제가 잘난 척 늘어놓았던 말들은 전부 제 아버지가 여제 폐하께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도 치기 어린 어린 시절이 있었단 말인가. 당연히 처음부터 어른으로 태어났을 줄 알았는데. 아롈은 애써 말을 꺼냈다.

"시녀를 한 명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그녀는."

"전하의 뜻대로. 그러십시오."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술이 익으려면 기다려야 하지요. 저는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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