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발과 흰 손 (5)
아롈은 하루 종일 끙끙 앓았다. 한 방 먹어서 고소하다며 낄낄대는 벨타를 상자에 던져 넣고, 옆에 아무도 두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벨타는 한 번만 더 지껄였다간 물에 피를 타겠다고 강력하게 말하자 재미가 없어졌는지 목걸이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깟 싫은 소리 좀 들었다고 온 몸에 열이 끓어올랐다. 제발 좀 잤으면 좋겠는데 필리프의 말이 떠오르면 내장이 다 펄떡거리는 기분이라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누워서 질근질근 손톱을 씹었다. 배에서 뜯은 살이 간신히 아물자마자 다시 피가 맺혔다. 당분간은 장갑을 못 벗겠구나. 열 개의 손톱이 다 망가질 때쯤 되자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사모바르에서 펄펄 끓는 진한 차 한 잔이 간절했다. 그 위에 올라앉은 주전자에서 몇 시간이나 졸여진 아주 차 원액을 조금 따르고 사모바르 안에 든 뜨거운 물을 탄 다음 잼과 설탕을 가득 넣어 먹는 것이 아롈의 취향이었다. 남쪽의 취향대로 따로 티 포트에 찻잎을 넣고 우려먹는 것도 나름의 풍미는 있었지만 다소 맛이 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회랑을 뒤져서 혼수로 사모바르도 하나쯤 챙겨올 걸 그랬나 싶었다. 뜨거운 차. 아주 달고 뜨거운 차. 매일 밤 서류를 들고 씨름할 무렵 손수 타서 마시던 달콤한 차 말이다.
이반 3세는 승하하기 1년 전부터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원체 사내다운 것에 집착하던 이라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사냥을 즐겼는데 여우를 쫓다가 말에서 낙마해 갈비뼈가 부러졌다.
다행히도 폐를 찌르지는 않았지만 노인에게는 큰 충격이었으리라. 침상에 누워 정부의 간호를 받으며 국정을 멀리하고 시름시름 앓았다. 당시의 체사레비치-코시카의 제1계승권자-였던 파블 1세는 궁정에 거의 들어오지도 않아 대부분의 국정을 아롈이 처리해야 했다.
조부는 '계집'에 불과한 손녀가 언젠가 황위를 이을 거라는 사실을 항상 불만스러워했다. 며느리인 옐레나 대공비가 이미 쉰 살에 가까워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은 납득했고, 파블 대공이 외아들이라는 사실까지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들 부처에게 유일하게 남은 자식이 아롈 혼자라는 사실 만큼은 끝끝내 부정하려 애썼다. 그렇다고 조카인 콘스탄틴 대공에게 황위가 넘어가는 꼴도 볼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언젠가 알렉산드르가 돌아오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한 구석에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처음 가져갔을 때는 이것도 정리랍시고 해서 가져온 거냐고 서류를 던졌다. 힘없는 손이 던진 것이라 몸에는 와 닿지도 않고 발치에 떨어졌지만 그 때의 모욕감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이를 아득바득 갈며 서류에 매달렸다. 사교 모임도 작파한 채 책상에 붙어 앉아 깃펜을 놀렸다. 아롈이 봐도 보기 괜찮아졌을 때 쯤, 조부는 드디어 자기 손으로 서류를 읽었고 이것저것 구체적으로 불평을 해대며 가르치다가, 이내 아롈에게 간단한 것은 직접 처리해도 된다고 허락했다.
승하하기 한 달 전에는 말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옐레나 1세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마른 나뭇가지 같은 퍼석한 손이 아롈의 손을 모아 쥐었을 때는 정말 왈칵 눈물을 쏟을 뻔 했다. 코시카 황제는 무오(無誤)하기 때문에 사과하지 않는다. 가장 완곡한 표현이라고 해봐야 '그 때와 지금의 상황은 달라졌으니' 혹은 '짐이 다시 생각해 보았는데', '유감이지만' 정도이다. 조부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를 보여준 것이다. 그 옆에 있던, 조부의 어린 정부만 아니었어도 울어버렸으리라. 그 때 아롈은 열네 살이었다.
조부는 얼마 안 있어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는 깨지 못 했고, 그대로 숨이 끊겼다. 아직 정신이 온전할 때 작성했다는 유언장에는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을 체사레브나로 삼을 것을 권하는 문장이 당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황태자비, 혹은 여성인 추정황위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체사레브나.
그때까지는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칭호였다. 파블 대공이 파블 1세로 즉위하고, 아롈은 코시카의 여대공 옐레나 파블로브나라고 하던 서명을 추정황위계승자, 체사레브나, 코시카의 여대공 옐레나 파블로브나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정식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11개월뿐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후계자의 책무는 아롈이 수행하고 있었다. 황도 근교에서 가족 놀이를 하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훨씬 성실하게 임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런데 좀 오만하게 구는 것이 뭐가 나빠!
손톱자국이 난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아니, 사실 오만도 아니었다. 오만하다, 혹은 거만하다는 잘난 체 하며 남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잘난 '체'다.
내가 못난 부분이 뭐가 있는데?
아롈은 필사적으로 필리프의 말을 되새기며 반박할 부분을 찾았다. 그 기조는 다음과 같았다.
난 잘난 체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잘났단 말이야.
겸양이라는 미덕 때문에 드러내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숨 쉬듯 당연하게 여겨왔다. 자신은 잘났다. 혈통, 능력, 자질, 외모 뭐 하나 크게 빠지는 부분이 없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바보 같이 도망친 사샤는 물론이요 지나치게 유능해서 조부에게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이반 파블로비치가 살아 돌아와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파블 1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단지 어머니에게 졌을 뿐이다. 삼십오 년도 넘는 세월의 격차가 아롈을 깔아뭉갰을 뿐이다. 아롈도 그 나이를 먹으면 그만큼의 관록 어린 성숙함을 당연하게 가질 수 있으리라. 그런데 내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구박을 받아야 하지?
열이 올라서 이마에 콧물이 찬 것처럼 지끈거렸다. 분해 죽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스무 살에 자기 약혼자를 빼앗아간 여자의 뺨을 갈겼다는데 아롈은 공식 석상에서 누굴 폭행한 적도 없었다. 그 요망한 안나 콘스탄티노브나가 혼인식에 나타났는데도 격정을 억누르고 곱게 살려 보내줬는데? 그럼 내가 어머니보다 훨씬 나은 게 맞는데.
급작스레 서러워졌다.
-전하께서는 지금 몇 명의 아군을 갖고 계십니까?
꼭 친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정을 줘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누가 있다고.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친 오라비인 사샤조차 떠나버렸다. 가슴이 쿡쿡 쑤셨다.
결국 어리고 귀찮은 여동생보다는 연인이 좋았던 거겠지. 그러니까 인사 한 마디 없이 몰래 도망가 버렸겠지. 혹시라도 융통성 없는 내가 일러바칠까봐.
아롈은 눈을 감았다가 질겁하며 다시 떴다. 눈꺼풀 뒤에 파블 1세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 시커먼 해골의 뻥 뚫린 눈이 두려워 눈을 거의 깜빡이지 않았더니 건조해진 안구가 싸하게 아파오며 눈물이 맺혔다.
난 잘못 살지 않았어.
아롈은 반성과 자아성찰을 앞두고 들어줄 사람 없는 투정을 부리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 날 오후 혼수품 행렬이 도착했다. 호위대장은 늦어서 송구하다며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 늦기는커녕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벨타가 저지른 일이 비정상적이었을 뿐.
중년의 군인이 공손하게 두 손으로 올린 혼수품 목록은 앤을 통해 아롈의 손에 넘어왔다.
손수 일일이 대조할 것은 아니지만 예의상 목록을 펼쳐본 아롈은 맨 위에 쓰여있는 지참금의 액수를 보자마자 기가 질렸다. 계승권을 포기하는 황족은 으레 꽤 거한 재산을 떼어 받기 마련이지만 이건 꽤가 아니라 지나치게 거해 헛웃음이 나왔다. 부왕이 지참금을 완전히 지불하지 않아 결혼한 자식이 계승권을 주장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여제는 양심 때문에라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을 만한 액수를 내놓았다. 액수는 문자로 쓰여 있어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 없었다. 아롈은 나라 살림을 해보았고 이 액수가 얼마나 큰 액수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나라의 기둥뿌리를 뽑아서 여기에 가져다 둔 게 아닐까 의심이 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밑으로 이어진 혼수품의 목록은 아찔할 정도로 빽빽하고 길었다.
정말이지 상자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정말 나라를 팔아서 혼수를 했나 진지하게 고민할 때쯤 행렬이 멈춰서 안심했더니 패물 상자와 서류를 담은 나무함이 또 수십 개 들어왔다.
비로소 필리프가 말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아롈은 마냥 사랑받다가 이것저것 받아서 시집가는 막내딸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혼수를 과하게 했을까. 유일한 여대공이라는 지위를 생각해도 지나쳤다. 이제 알겠다. 자존심 싸움이었다.
-여제 폐하께서는 처녀적 무도회장에서 마담 라 세르가 되신 황후 폐하의 뺨을 때리셨습니다.
필리프를 언뜻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억측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이제 알았냐고 웃는 것처럼 보였다. 아롈은 기분이 저조해진 채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여제가 코시카에 시집올 때 지참금으로 가지고 왔던 보르디 대공가의 성(城) 두 개가 아롈의 소유로 넘어왔다. 처녀 때 툴루즈와 그 근방의 조세권을 가지고 있던 여제가 죽으면 보르디에 다시 돌려주는 조건으로 챙겨간 것인데, 보르디 대공가의 승인을 받아 아롈 역시 같은 조건으로 그 성을 받았다. 서류에는 필리프가 사인을 휘갈겨 놓았다.
체사레브나로서 받은 땅들은 아롈이 계승권을 잃으면서 대부분 반환했지만 여대공으로서 받은 땅-고원의 쓸모없는 땅 조금-은 여전히 아롈의 소유로 넘어왔다. 여제가 찍었을 옥새의 고양이 문장이 선명했다.
지참금은 일렬로 쭉 늘어선 금화 상자를 한 번 훑어보고 끝냈다. 금은 대단히 무거운 금속이라 아주 작은 상자에 나누어서 여러 개를 들고 왔는데도 상자를 보여주고 옮기는 기사들이 이를 꽉 무는 것이 보였다.
보석은 상자마다 제각각 담겨있었다. 사실 살면서 보석은 볼 만큼 보아와 별로 감흥이 없었다. 항상 달고 다니던 성 소피야 훈장의 별에도 다이아몬드는 박힐 만큼 박혀 있었다. 루비나 사파이어, 에메랄드 같은 유색 보석들로 된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이 몇 개 지나갔지만 아롈은 별로 눈길도 주지 않고 손짓해서 다음 상자를 열라고 시켰다.
옆에 시립한 앤이며 다른 시녀들이 연신 탄성을 지르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했다. 너무 감성이 무뎌졌나 싶어 다음 보석은 좀 유심히 바라보았다. 파란 토파즈는 꽤 희귀했다. 토파즈를 파란 녹주석, 금강석과 함께 엮어놓아 심심하지 않고 돋보였다. 파란색은 아롈이 즐겨 쓰는 색이기도 해서 상당히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화려한 목걸이, 귀걸이, 티아라 등도 지나갔다. 마노에 여제의 옆얼굴을 새긴 카메오가 달린 펜던트가 짜증을 잠시 돋웠지만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아롈이 개인적으로 쓰던 패물들 중 황실의 소유가 아닌 것들은 다 따로 챙겨왔기 때문에 혼수품 목록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보석의 확인이 끝나자 그 다음은 옷과 그릇의 향연이었다. 사실 깨지는 그릇 같은 것을 굳이 만들어서 다시 여기까지 들고 온 이유는 단순히 '혼수'이기 때문이었다. 혼수는 신부와 같이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번거로운 일이 생겼다.
혼인을 축하하는 신화와 전설의 그림이 그려진 접시들 수십 장, 섬세한 찻잔, 크리스탈로 만든 잔, 대리석으로 된 수반 등.
뭐 어떤가. 어차피 스스로 간수할 것도 아닌데. 여러 명이 달려들어 그릇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싸서 치우자 옷들이 든 궤짝이 열렸다.
이제야 좀 흥미가 생겼다. 북쪽에서 입었던 옷은 보통 어깨가 확 파여 있었다. 어차피 길고 치렁치렁한 비단옷을 입는 신분인 여자들은 추운 바깥에 나갈 일이 거의 없었고, 만약 나갈 때는 따뜻한 모피 망토를 걸치기 마련이었다. 얇은 옷이야말로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지배 계층의 과시였다. 어깨를 다 파버린 옷을 입고 목걸이를 좀 화려하게 걸고 머리에 베일을 쓰고 관을 얹는 것이 일반적인 복장이었다.
그에 반해 남부의 드레스는 목이 네모지게 깊숙이 파여 있어 가슴 윗부분이 보일락 말락 하는데 반해 어깨는 꽁꽁 싸매고 있었다. 북부의 옷은 드레스 위에 스토마커-가슴받이-를 달지만, 남부의 옷은 스테이, 혹은 코르셋 위에 스토마커를 달고 오버드레스를 걸쳤다.
펼치는 것을 보니 호화롭긴 했다. 감은 윤이 반드르르 흐르는 고급 비단이었고 무늬가 화려하게 들어간 것과 수수한 것이 적당히 섞여 있었다. 공단 리본이며 레이스, 플라운스며 코사쥬 같은 것들로 장식해놓아 화사한 느낌이 주를 이뤘다.
언뜻 보니 뭐가 반짝이는 것 같아 가장 앞에 있는 것을 한 벌 가져와보라 하자 선명하게 보였다. 거미줄처럼 섬세한 실로 짠 태팅 레이스가 달려있는 분홍빛 드레스였는데 레이스의 피콧(picot)마다 깨알 같은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쭉 훑어보니 마감이나 기장 등은 흠잡을 데가 없어 몇 벌 빼두라고 지시했다. 작센 왕성에 가서 입을 옷이 필요했다. 겨우 열다섯 벌을 두 달 째 돌려 입고 있었다.
중요한 옷 세 벌은 각자 따로 상자에 들어 있었고, 화려한 보석이나 리본으로 자수가 놓인 스토마커들도 여러 장 있었다. 속옷들은 따로 상자를 열지 않았다.
자질구레한 물건, 은촛대나 은식기 등까지 다 보자 그냥 바로바로 넘겼는데도 네 시간이 지났다. 아롈은 완전히 지쳐버려 가구는 마차에 실려 있다며 가서 보시겠냐고 하는 정중한 제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좀 들어가서 쉴까 하는데 아직 남은 것이 있다고 했다. 좀 작작할 것이지. 뭘 이렇게 끼워 보내나. 지금 팔려가는 것도 아니고. 아, 팔려가는 게 맞았지?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겠네."
꼭 보시라는 상자를 앤에게 넘기고 식사를 하러 일어섰다. 물론 자리를 뜨기 전에 수고 많았다는 치하와, 모든 이들에게 술을 내주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따라오는 인기척이 없어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앤이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히고 서 있었다. 상자 세 개를 쌓아 들고 있는데 식당에 따라가야 하는지 아니면 방에 가져다두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건 다른 이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그녀는 얼굴을 빨갛게 붉힌 채 허겁지겁 상자를 내려놓고 종종걸음을 쳤다.
며칠 머물렀던 동안 나온 것처럼 별 것 없는 식사를 하고, 디저트는 딱 한 입 들고 일어섰다. 옆에서 식사 시중을 충실히 들던 앤은 소리도 없이 따라왔다. 방에 돌아온 아롈은 옷을 벗거나 앤을 내보내는 대신 자리에 앉히고 차시중을 들게 시켰다.
그녀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나름대로 침착하게 굴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손이 떨려 찻물이 떨어지는 모양이 고르지 않았다. 흰 컵받침(saucer)에 주황색의 자국이 남았다. 아롈은 그녀가 곱게 밀어놓은 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물었다.
"여공은?"
"전하께 소녀를 부탁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먼저 떠났나? 그런 말은 좀 직접 할 것이지."
"조모님께서는 자신이 오래 머물수록 소녀에게 해가 될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셨습니다."
그렇게 손녀가 걱정되면 손녀의 직속 상전이 될 사람의 속을 박박 긁어놓지는 않았어야지. 여기까지 생각한 아롈은 부탁할 것이 있는 주제에 나바르의 마리 필리피느 일까지 들먹여가며 빈정거렸던 죄가 생각나 불평을 그만 두었다.
어차피 여공이나 자신이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롈이 어렸던 시절, 아직 키예바 여공이었을 때 그 곳의 아이들은 정교회를 믿는데도 아롈을 두고 마녀라고 손가락질 했다. 그들은 마법사를 인정하는 정교회를 믿었고, 신부로부터 마법사의 이적에 대한 것을 충분히 배우고 있었는데도 위협이 닥쳐온 순간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필리프의 반응을 보면 아마 헛소문이 돌아도 충분히 차단해 줄 것이다. 하지만 아롈은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미셸과, 멘 공작과, 필리프에게 말 한 뒤였다. 세상에 혼자만 아는 비밀은 있어도 둘만 아는 비밀은 없다 했다. 하물며 아는 사람이 자신까지 해서 넷, 이제 여섯이었다.
앤은 조심스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까. 아롈은 떠오르는 것 중 가장 무난해 보이는 걸 물었다.
"레르헨펠트 가문은 영지가 따로 있느냐?"
"없사옵니다. 부끄럽게도 작센 국왕 폐하의 은혜에 힘입어 살았나이다."
"네 교육은 마리야 여공이 맡았느냐?"
"소녀가 어릴 적에는 어머니께 훈육을 받았사온데, 조모님께서 저를 데려와 이것저것을 가르치셨사옵니다."
"네 부모는 무얼 하고?"
앤은 잠시 머뭇거렸다.
"돌아가셨사옵니다."
"둘 다 말이냐? 무슨 일로?"
"남쪽 근처에 살고 있었사온데, 천연두 발병 시기와 겹쳐서 그만. 송구하옵니다."
앤의 눈에는 금방 눈물이 맺혔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아롈은 아버지가 목 잘려 죽었어도 별로 슬프지 않았는데. 가끔 악몽에서 보지만 깨고 나서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지 않는데. 로렌 천연두 발병 시기라면 십 년 정도 전이었다. 그렇게 부모가 죽은 지 오래 됐는데 아직도 생각하면 눈물이 날까. 앤은 양해를 구하고 손수건으로 금세 눈물을 훔쳐냈다.
아롈은 가만히 앤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붉어진 코가 조부인 이반 3세와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너는 외동딸이냐?"
"그러하옵니다."
"사촌도 없고?"
"소녀의 아버지께서도 외동이셨사옵니다."
"그럼 마리야 여공은 어찌 너를 내게 맡겼다더냐? 내가 하나뿐인 손녀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 줄 알고?"
아렐은 어깨로 넘어온 베일을 쓸어 넘기고 등을 기댔다.
"게다가 황실 생활이 싫다고 도망친 사람이 왜 너를 궁정으로 밀어 넣으려 하느냐. 앞뒤가 안 맞지 않느냐."
그녀가 도망칠 때까지 황실 사람들은 그녀가 례비제프 후작과 연인 관계인 줄도 몰랐다고 한다. '정치적 동지'라는 허울 좋은 말에 속아서 그러려니 했다고 했다.
앤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조모님은 말리셨사옵니다. 소녀가 원한 것이옵니다."
시녀로 들어가면 고귀한 신분의 남자라도 잡아채 팔자라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나. 아롈은 빈정거림이 가득 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앞으로 계속 옆에 둘 사람에게 성질을 내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조모님께서는 항상 소녀에게 후회한 적이 없다 말씀하셨사옵니다. 하오나 그러실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모든 것을 누려본 뒤에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사옵니까."
아롈은 궁정을 떠나 사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일상적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심지어 아롈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하찮은 귀족에게조차 무릎 꿇어야 하는 삶. 생각만 해도 자존심이 상했다.
더러운 벌레와 예쁜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옷들, 천박한 고함소리와 코를 찌르는 냄새, 함부로 다른 사람을 툭툭 치는 무례함, 그리고 다른 이의 앞에 무릎 꿇는 굴욕.
고작 감정 하나가 그 모든 것을 감내할 만큼 대단한가? 후회한 적이 없을 정도로?
"소녀는 궁금했사옵니다. 조모님께서 소녀에게 가르치신 말들과 지식과 예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대체 궁정 생활이 어떤 것인지. 하여 조모님께 청을 올렸사옵니다. 고귀하신 분의 시녀로 들어가 궁정이 어떤 곳인지 경험하고 싶다고요. 그리고 조모님께서는 친분이 있으신 작센 공작부인의 시녀로 소녀를 넣어주겠다 하셨사옵니다."
사실 이곳을 궁정이라고 하기는 좀 우습지 않나. 왕비의 시녀라도 모자랄 판에. 작센은 왕국의 명패를 단 지 겨우 이 대 째였다. 소피야 황후가 작센-아인스바흐의 조피일 때까지만 해도 이 땅은 작센-아인스바흐, 작센-함부르크, 작센-함부르크-브란덴부르크 등으로 잘게 나뉘어있었던 것이다.
중부 지방은 장자 상속을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한 가문에서 수십 개의 분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살리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들이 다섯이면 땅이 다섯 갈래로 쪼개지는 마당인데 딸까지 챙겼다간 텃밭 하나하나에 다른 이름을 박아야 하리라..
겨우 HSH 공작이었던 작센 분가들의 대가 하나둘씩 끊기면서 대가 끊긴 영지는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중부의 집안은 영지가 다른 곳으로 넘어갈 것을 대비해 만약 대가 끊기면 영지를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넘겨주기로 하는 서약과 함께 상속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복잡한 계승자의 행렬을 따라가 보면 마지막 상속자는 칼 아우구스트가 될 것이 뻔했다.
이반 3세는 열두 살 난 둘째 딸을 스물다섯 먹은 가난한 공작과 결혼시켰다. 십여 년 뒤 그가 작센의 모든 분가를 이어받아 작센을 왕국으로 선포하고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옐리자베타 여대공은 이미 죽은 뒤였지만 이미 아들을 세 명이나 세상에 남겨두었다. 그 결과 장자가 현재 작센의 국왕이 되었다. 작센 왕실에 코시카 황실의 피를 섞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아롈은 킥 웃었다.
"그런데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 시녀로 들어간다고 한 건가? 내가 지위가 더 높기 때문에? 너와 인척 관계라 받아줄 것 같아서?"
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롈은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이쯤 되니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인생을 소꿉장난으로 살아가는 건가.
"공작부인도 참 안됐구나. 겨우 친인의 손녀라 받아준다 했더니 지위에 홀려 금세 변심하고."
"이왕 궁정을 경험할 것이라면 조금 더 큰 곳에서 보내고 싶었을 뿐이옵니다. 조모님께서도 궁정에서 조부님을 만났다 하셨사옵니다. 그를 보는 순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아졌다고, 커다란 제국을 버려도 그 사람 하나만 가지면 아깝지 않았기에 도망쳤다고 하셨사옵니다. 소녀는 살던 곳에서 단 한 번도 그런 마음을 느껴본 적이 없사옵니다. 혹여 다른 곳에 간다면 그런 기회가 더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옵니다. 소녀의 바람이 그렇게 잘못 된 것이온지요."
그러니까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코시카를 팽개치게 만들었을까. 한 명도 아니고 아롈이 아는 것만 네 명이었다. 제국의 대공, 여대공 작위를 버리고 야반도주하게 만드는, 그게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불꽃. 그게 대체 뭐길래. 아렐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파블 1세, 마리야 여공, 알렉산드르. 그들은 대체 자신의 연인에게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들이 발견한 것이 아롈에게도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벌써 떠나버렸다.
아롈은 답을 찾는 것을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했다. 아무래도 도망친 고모는 쓸데없는 소리를 손녀에게 많이도 떠든 것 같으니 언젠가 답을 들을 날이 있으리라.
"아니. 소망을 품는 것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천한 이들이 왕후장상이 되어보는 구름 같은 꿈을 품는다 하여 목을 매단다면 세상천지 남아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흰 손가락이 툭 멎었다. 아롈은 싸늘하게 물었다.
"네 조모가 너더러 시중을 들 때 윗전의 비밀을 함부로 떠들고 다니라 가르치더냐."
"전하, 그 것은."
"어디까지 보았느냐?"
앤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본 것을 어디까지 나불대고 다녔느냔 말이다."
"저는 조모님께밖에 말하지 않았사옵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조모님께밖에', '같은 시녀인 친구에게밖에', '전하의 정적인 누구누구에게밖에'는 말하지 않겠구나?"
초장에 잡아둬야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다른 사람에게 줄줄이 흘러나가는 걸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고 시녀를 아예 안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핏줄이니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고 위안삼기에는 아롈이 지금껏 당해온 것들이 너무 많았다. 어머니에게도 뒤통수를 맞은 판에 이제 처음 본 오촌 조카를 믿을까.
[작작하렴. 애 기절하겠네.]
아롈은 문이 닫힌 것부터 확인하고 목걸이를 풀었다. 릴레벨트는 쓸데없이 화려하게 빛을 뿜으며 등장했다. 아롈도 저렇게 나오는 건 처음 봤다. 손바닥만 하게 몸을 키운 데다 네 개의 지느러미로 바닥을 짚고 서서 쩍 하고 굳이 하품을 하는 꼴이 허세가 절절 묻어났다. 허리의 흰 줄이 마치 오팔의 광택처럼 빛났다. 아롈은 미간을 좁혔다.
"끼어들지 마라."
[어차피 데리고 가기로 한 것 아니니? 그러면 군말 말아. 잔소리 할 것 없이 사고 치면 먹어버리면 되잖아. 앙.]
"악!"
여기서 먹으면 안 된다 말하지 않았냐고 딴죽을 걸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있어서 가만히 있었더니, 벨타는 정말 앤의 손가락을 물어버렸다. 새된 비명이 울렸다. 붉은 피가 약간 흘러나왔다. 그와 대비되는 푸른 용은 새파란 혀로 손가락을 핥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봐. 내가 이런 애들이 맛있을 거 같다고 했잖아.]
네가 그런 말을 지껄일 때는 앤을 만나기도 전이었다고 지적해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졸지에 용에게 피를 빨린 앤은 사색이 되어 바들바들 떨었다. 그걸 보니 은근히 고소했다.
"저, 저, 저, 저, 전하?"
"왜. 이미 본 것 아니었나? 소개하지. 나와 계약한 용, 릴레벨트다."
[벨타라고 부르렴.]
앤은 정말 기절할 것 같았다. 벨타는 앞으로 꼭 물 한 잔에 천일염 두 스푼의 비율을 맞춰서 내놓으라며, 잘 지키는지 두고 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우쭐우쭐 꼬리가 흔들렸다.
[그리고 헛소리 나불대고 다녀봐. 네 야들야들한 살을 꼭꼭 씹어먹을 거야.]
굳이 다시 한 번 턱뼈가 없는 것처럼 입 벌려 하품을 하자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하게 박힌 게 고스란히 보였다.
용이 이제야 좀 물 값, 소금 값을 하는 것 같았다. 아롈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