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발과 흰 손 (6)
릴레벨트는 앤을 따라서 건넛방으로 가버렸다. 아롈은 정말로 간만에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봐야 저 수다쟁이 용과 함께 밤을 보낸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모든 피로가 확 밀려왔다. 무얼 하고 쉴까.
아롈은 언뜻 아직도 탁자에 놓여있는 방법서설을 눈짓했다. 책을 읽는 것도 괜찮겠지만 아무래도 남쪽 말은 보고 싶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서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견고한 상자 세 개가 눈에 띄었다.
아까 그 물건들이었다. 이것만큼은 손수 열어보시라 하도 간청을 했지. 대체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별 것 아니라면 다 불러다 경을 치리라. 아롈은 내키지 않는 손을 내밀어 첫 번째 상자를 열었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한 투명한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한 백 년 전부터 유행하고 있는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이 아닌 오발 컷으로 세공되어 있었지만 워낙 크고 불순물이 별로 없어 다이아몬드 특유의 영롱한 빛이 팔방으로 퍼져나갔다. 보석은 촛불의 빛을 한층 더 아름답게 바꾸는 마법이라도 쓴 것 같았다.
아롈은 이 보석을 알고 있었다.
"비엔나라."
어머니가 구매해 갖고 있던 보석이었다. 여제의 씀씀이는 사치스럽기로 유명했지만 빚을 지는 일은 따로 없었다. 이반 3세와 소피야 황후는 귀천상혼이라는 진창으로 빠질 뻔 한 아들을 구제해 준 며느리를 그야말로 딸보다도 아꼈고, 충분한 돈을 집어주었다.
여제는 물건에 금세 질려 한두 번 걸어본 보석은 대부분 갈아치웠는데 그런 여제가 나름대로 오래 갖고 있던 보석이 이 비엔나 다이아몬드였다. 중부의 비엔나 대공이 소유하고 있던 다이아몬드를 구매한 여제는-당시에는 체사레브나였던- 그 보석을 꽤 애지중지했다.
이걸 내놓다니 꽤 체면치레에 신경을 쓰셨나보다. 아니면 이제 질렸거나.
뚜껑을 닫아 내려놓고 두 번째 상자를 열었다. 이번에는 좀 수수한 벨벳 상자였다. 그리고 아롈은 눈썹을 찌푸렸다. 붉은 새시가 바닥에 감겨있고 그 위에 사뿐히 두 개의 보석이 놓여있었다. 하나는 배지, 하나는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팔각별. 성 소피야 훈장의 그랜드 크로스.
황족 이외에 성 소피야 훈장을 달 수 있는 것은 모두 106명뿐으로 12개의 그랜드 크로스는 외국의 통치 왕가의 여성에게, 나머지 94개는 고위 귀족 여성에게 수여할 수 있었다. 물론 수여하는 것은 단장인 황후였다. 옐레나 여제는 소피야 황후가 죽은 뒤 체사레브나일 때부터 여제가 된 지금까지 성 소피야 훈장의 단장을 맡고 있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어머니라 해도 아롈이 갑작스레 혼인식에서 아나스타샤에게 별을 떼어줄 줄은 몰랐으리라. 그럼 미리 준비시킨 건가. 거기에 담겨있는 정치적인 메시지가 절로 해석되어 기분 나빴다.
보통의 모녀 관계라면 시집간다고 해도 너는 코시카의 여대공인 것을 잊지 말라는 다정한 말로 받아들였겠지만 굳이 새로 훈장을 해준 것은 이제 시집가는 '외국' 여성으로 생각할 거라는 의미가 강하게 느껴졌다. 아롈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상자를 닫아서 저 멀리 밀쳐놓았다.
심란한 손길로 마지막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정말이지 아롈이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반지였다.
꼭 쌍둥이처럼 똑같은 서른여섯 개의 반지가 상자 안에 나란히 12열 3행으로 늘어서 있었다. 아니, 열두 개씩 쌍둥이인 세 가지라고 해야 하나. 어쩐지 상자가 좀 크더라니.
진주의 색이 세 종류, 차례대로 뽀얀 분홍빛이 도는 백진주, 흔히 갈치색이라고 불리는 푸른 광택의 진주, 검은 밤바다 같은 흑진주였다. 진주는 순결, 부, 건강, 장수, 고귀함을 상징한다고들 해서 흔히 약혼반지로 많이 쓰였다.
그런데 뭐 이렇게 많아. 아롈은 반지 두 개를 들어 비교해보았다. 링의 크기가 약간 달랐다. 하나씩 빼보니 같은 색깔의 열두 개가 모두 크기가 달랐다. 하긴, 합리적인 방식이기는 했다.
하나를 손으로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 은보다 차고, 흰 금속을 섞은 금보다 깨끗한 빛.
플라티나(platina)였다.
신대륙을 가장 먼저 점령한 동쪽의 카스티야는 신대륙에서 새로운 금속을 발견했다. '감히 녹일 수도 해할 수도 없는 미지의 금속'. 플라티나는 동쪽 말로 작은 은, 혹은 두 번째 은이라는 뜻이었다.
이제는 세공할 수 있지만 섬세한 세공은 무리라고들 했다. 그래도 꽤 이지러짐 없이 동그란 링의 모양새를 보니 공을 꽤 들였으리라는 짐작이 갔다. 아직 그 정도 수준은 무리인지 안에 글자는 없었지만.
아롈은 다시 반지를 상자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뭔가 흰 것이 보인 것 같았다. 자세히 볼 것도 뚜껑 안쪽에 봉투가 하나 붙어 있었다. 아롈은 그 편지를 떼어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귀찮았다. 무엇보다 아롈은 기밀문서를 몇 가지 다루면서 봉인을 직접 뜯는 습관이 들어있었다.
밀랍의 문장은 장미가 휘감긴 검, 아마 약식 문장이겠지. 봉투를 뒤집자 검푸른 잉크로 쓴 글자가 보였다.
Pour ma mariée
나의 신부에게, 라는 갈리아 어였다. 아무리 남쪽 말이 서툴러도 이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반지 상자 위에 붙어있었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이런 걸 보낼 사람은 뻔했다. 아는 모든 단어를 총동원 해 리젤로트를 묘사하는 미셸 때문에 남쪽 나라 남자들은 여인을 대할 때 온갖 수식어를 다 갖다 붙이리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단순한 시작이었다.
나중에 읽을까 지금 읽을까 갈팡질팡하던 아롈은 결국 페이퍼나이프를 직접 몸을 일으켜 찾아들고 왔다. 궁금했다. 대체 뭣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반지에 편지까지 딸려 보냈는지.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꺼냈다. 편지는 딱 한 장이었다. 내용도 봉투와 똑같은 갈리아 어로 쓰여 있었다. 눈이 종이 위를 재빠르게 훑다가 짜증스레 다시 위로 올라갔다. 아롈은 아직 갈리아 어를 속독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니었다.
단정한 글씨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끝에 이해한 글은 다음과 같았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나의 신부에게.
귀한 몸에 먼 길을 내려오니 필시 여행길이 고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요? 부디 무사히 당도하기를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너무 급하게 진행된 혼사인지라 제대로 된 약혼 기간을 갖지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약소하나마 반지를 준비했는데 부디 다쳤을 마음을 조금이라도 메워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귀한 몸을 생각하면 천천히 와도 된다고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궁금한 마음은 참기 어렵군요. 만날 날이 하루 빨리 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여행이 되기를.
당신의 세시안」
드디어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옐레나 키릴로브나 황후는 임신의 여파로 손가락 중간에 간신히 걸려있는 반지를 잠시 매만졌다. 고대인들은 심장과 왼손 넷째 손가락을 이어주는 혈관이 있다고 믿었다지 않나. 과연 이 반지가 마음을 전할 수 있을는지 두고 볼 일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활짝 웃었다.
"어서 와요."
황제는 막 출산한 아내와 눈도 마주치지 못 하며 안절부절 못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옐레나는 상냥하게 웃었다.
"무얼 그리 불편해하나요?"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
희한하게도 긴장감이라곤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옐레나 황후는 능숙한 연극배우가 무대 위에 올라선 것처럼 지저귀었다.
"뭘 이러지 말라는 거죠?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고 사방팔방 떠들어대던 아들이에요. 더군다나 적통이지요. 봐요, 꼭 당신을 닮았지요? 검은 머리에 파란 눈이에요."
황제는 쉰이 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애원했다.
"제발, 내가 아들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닌 건 당신도 알잖아. 이혼해달라고.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주겠어."
"제가 원하는 것? 그게 뭔데요? 저도 모르는 걸 당신이 알고 있나요?"
"당신하고 아이들에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그러니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서 뭐 어쩌라는 건가요. 있잖아요, '대공 전하'. 저는 약속을 지켰어요. 당신의 아이를 낳았고 그 여자와 자식들도 죽이지 않았고 당신이 팽개치는 바람에 빈자리를 메꾸었지요.
그리고 당신도 내가 요구했던 차리나 자리를 줬잖아요?
깨끗하게 쌍방이 원했던 것을 모두 얻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무르자니 그런 지저분한 일을 왜 해야 하지요?"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 같은 파란 눈이 울상이 되었다.
"무릎이라도 꿇을까?"
"아니, 그러지 말아요. 그리고 잘 살다가 갑자기 왜 그 여자에게 황후 자리를 주고 싶었는지도 설명하려 하지 말아요. 아무 짝에도 의미 없는 짓이니까. 그나저나 아이는 안 볼 건가요?"
황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요람을 들여다보았다. 갓 태어난 아이는 쪼글쪼글하고 작고 빨갰다. 그 몸을 감싸고 있는 포대기는 약 쉰 해 전 파블 1세가 태어날 때에도 사용한 유서 깊은 물건이었다.
"이름은 미하일로 짓지."
황후는 그 넓은 등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그가 움찔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젖가슴을 남편의 등에 비비며 속삭였다.
"정말 제가 원하는 걸 무엇이든 해 줄 건가요?"
그는 반색한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맹세할게. 황후 자리만 양보해 줘. 평생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안으며 살아갈 테니까."
오른손이 왼쪽 소매에 들어가며 뭔가를 단단히 잡았다. 황후는 마치 처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저한테 황제 자리를 주세요."
소매에서 꺼낸 단검이 황제의 배에 꽂혔다. 그 순간 황제는 체격에 어울리는 괴력을 발휘해서 황후를 뒤로 떨쳐냈지만 단검은 이미 배에 푹 파고든 뒤였다. 황후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입을 가리고 눈웃음 쳤다.
"정력적이기도 하셔라."
"뭐, 뭐야. 당신."
황제는 힘겹게 뒤돌아섰다. 움직이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졌는지 검은 제복이 젖어 들어가는 것이 한눈에도 보였다. 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후는 몸을 일으켜 그 앞에 가 조롱하듯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아까워라. 잘생긴 얼굴인데 저렇게 고통으로 일그러져있다니.
"황후 자리 따위 얼마든지 가져가요. 어머나, 그 값으로 황제 자리를 주겠다고요? 고마워요! 죽을 때까지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안고 살아갈게요."
"너, 너, 너."
황제는 허리를 굽히고 앉아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 했다.
"있잖아요. 내가 이왕 좋은 거래를 한 김에 한 가지 덤을 얹어 줄게요."
그는 목 위에 세상을 얹은 것처럼 무겁게 고개를 들었다. 황후는 마르그리트 안의 뺨을 갈겼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쾌감을 만끽하며 왼손을 들어올렸다. 넷째 손가락 둘째 마디에 간신히 걸려있는 수수한 반지. 보석 하나 없이 속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반지. 과연, 황제는 배에 칼이 꽂혀 죽기 일보 직전인데도 그 반지를 알아보고 빼앗아갔다.
고통으로 떨리는 손가락으로 떨어뜨릴 새라 반지를 잡고 피를 흘려 어질어질할 눈으로 반지 속의 글자를 확인했다. 아내는 느긋하게 남편을 기다려주었다. 분명 저 안의 글자가.
이윽고 그는 숨을 탁 뱉어냈다. 그의 목소리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네네."
그래. '사랑하는 네네에게, 파블리크'였지.
황후는 지옥 불에서 튀어나온 악마처럼 속삭였다.
"헬레네는 죽었어요, 파블."
"그, 럴 리가, 헉, 없어."
"아뇨. 그럴 리가 있어요. 왜냐하면요."
흰 손이 칼자루를 더듬어 쥔 다음 비틀었다. 처절한 비명은 그녀의 입술에 발린 독을 묻지 못했다.
"내가 직접 찔렀으니까요."
그는 흐릿한 눈으로 아내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들도 모두 죽였어? 그가 물었다. 당연하죠. 그녀가 대답했다.
셋 모두? 그가 다시 물었다. 대답을 해야 할까요? 그녀가 반문했다.
그의 눈이 두 번 깜빡였다. 실핏줄이 다 터진 눈에서 붉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눈꺼풀이 감겼다.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손가락을 코에 대보아도 숨결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믿을 수 없어 조금 더 기다리다가 배에 박힌 칼을 힘껏 빼냈다.
의외로 피는 솟구치지 않았다. 황후는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거짓말이에요."
죽이라고 사람을 보내긴 했지만 아직 죽였다는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곧 여제가 될 황후는 피로 젖은 단검을 시신의 목에 갖다 댔다.
"미안해요. 당신은 너무 무거워서 내가 들어 올릴 수가 없거든요."
결국 나를 선택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파블.
피로 젖은 흰 손으로 단검을 꼭 잡고 내리찍었다.
금발에 피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