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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4. 사랑꽃의 즙과 춤추는 요정 (1)


 작센-아인스바흐의 조피 프레데리케는 본디 아주 작은 공국의 공작녀였다. 안나 여제는 둘째 아들이었던 이반 대공의 짝으로 위협적인 가문의 여자를 원치 않았으므로 하잘것 없는 가문의 조피를 선택했다. 그녀는 코시카의 소피야 대공비가 되었다가 미하일 대공이 죽은 다음 체사레브나가 되었고 대국 코시카의 황후로서 삶을 마감했다.

아롈은 그녀의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조잡한 인간의 솜씨로 물감을 발라 사람의 인상을 완전히 다르게 바꿔버렸다. 소피야 황후는 아롈이 태어나기도 전에 붕어해서 한 번도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으나 '회랑'에서 본 적은 많았다. 그녀의 마지막 얼굴을 기억한다. 그녀는 전통대로 베일을 쓰고 평온히 눈을 감은 채 영면에 들었다. 가장자리에 규칙적으로 자잘한 진주가 달린 그 베일은 한 때 며느리인 어머니에게 물려졌다가 아롈에게로 넘어왔다.

아롈은 가만히 귀 옆으로 늘어진 베일을 당겨 정리했다. 아롈의 이름이 옐레나가 된 건 순전히 소피야 황후의 유언 때문이었다. 자신이 죽은 다음에 또 손주가 태어나면 남자아이는 파블, 여자아이는 옐레나로 지으라는 것. 소피야 황후는 생전에 단 한 번이라도 아들 부부가 사이좋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고 들었다.

어린 아이의 손이 베일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당고모님, 저 심심해요."

아롈은 조심스레 아이의 손을 베일에서 풀어내곤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비구름 같은 회색 눈에는 몽글몽글하게 지루함이 차 있었다.

"그래?"

"네. 저 많이 심심해요."

"그럼 먼저 들어가려무나. 나는 좀 더 볼 것이 있으니."

아이의 볼에 공기가 들어갔다가 푹 빠졌다. 그러나 먼저 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의 이름도, 이 아이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소피야 황후에게서 따온 것이다. 작센의 조피 도로테아 공주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의 장녀로, 작센의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아롈의 고종사촌이었기 때문에 조피 공주는 아롈의 오촌 조카였다.

이 열 살 먹은 꼬마 공주는 아롈을 보자마자 동그란 눈을 크게 뜨더니 아롈을 시녀로 달라고 졸랐다. 왕비에게 크게 혼난 뒤에도 포기가 안 되는지 지금까지 아롈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당고모님. 그림 보시는 거 재밌어요?"

조피는 시트에 흙을 묻힌 고양이처럼 눈치를 봤다. 아이들이 요물이라는 말이 맞는지 단호하게 자르려다가도 소맷자락을 붙잡고 지그시 올려다보면 그냥 져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리 애원해도 머리칼을 잘라줄 수는 없었지만. 조피 공주는 아롈의 희미한 금발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는지 회색 머리를 다 밀어버릴거라고 눈물까지 흘렸다.

"그럼 들어갈까? 응접실로 가자꾸나."

"또 차 마시고 책만 읽어요?"

"그럼?"

아롈은 황도로 돌아온 다음부터 체사레브나 작위를 박탈당할 때까지 단 하루도 공부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유년기에는 키예프에서 배우지 못한 예법과 지식을 따라잡느라 바빴고, 알렉산드르가 도망친 다음은 계승자로 인정받기 위해 항상 잉크병을 끼고 살았다. 반 년의 감금 기간이 있었다고는 해도 몸에 밴 습관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필리프는 아롈의 편을 들어주기로 한 다음부터 굉장한 양의 과제를 내놓았다.

"책은 싫단 말이에요. 만날 다들 공부만 하라고 하는데 놀 때까지 책을 읽으라니."

아이는 재잘재잘 가정교사가 얼마나 재수 없는지, 공부가 얼마나 지루한지에 대하여 떠들어댔다.

"가정교사가 그러는데요, 여기저기 말을 다 배워놔야 나중에 시집가서 편하대요. 조피는 공주님이니까 나중에 다른 나라로 시집가야 된댔거든요.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시집가서 다른 나라 왕비나 공작부인이 된 다음에 반편이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따돌림 당한다고 했어요. 진짜예요?"

지금 들으라고 하는 소리일까. 남쪽 말을 등한시하다가 갑자기 남쪽에 시집가게 되는 바람에 부랴부랴 공부를 시작한 아롈은 난감하게 웃었다. 듣기와 읽기는 많이 늘었지만 말하기와 쓰기는 아직도 너무 어려웠다.

"그럼 조피는 무엇을 좋아하지?"

공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춤!"

"춤?"

"조피는 춤이 좋아요. 이렇게이렇게 잘 추는 걸요. 아바마마한테 오늘밤에 당장 무도회 열자고 졸라봐야지!"

아롈의 환영 무도회는 다음날로 잡혀 있었다. 아롈은 식겁했다. 조피는 뛰쳐나가려다가 앤에게 가로막혔다. 앤은 생글생글 웃으며 조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주 전하. 오늘은 푹 쉬시옵고, 내일 밤에 어여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게 어떠시옵니까?"

앤은 조피 공주의 육촌으로서 작센 공작부인의 성에 도착하기 전 이 곳에 잠시 머물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조피도 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앤이 도와줄 거야?"

"소녀는 비전하의 시녀가 되었사옵니다. 공주 전하의 시녀들이 치장을 도와주실 것이옵니다."

"앤이 내 머리에 리본 묶어주는 게 좋은데. 안 돼?"

"비 전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얼마든지요."

"고모님! 당고모님! 앤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앤이 머리를 예쁘게 묶거든요."

아롈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피는 신나게 치맛자락을 잡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하나, 둘. 하나, 둘. 하나, 둘셋.

중부 지방의 대표적인 2박자 춤인 알르망드였다. 아롈은 엉덩이를 덩실덩실 흔들 수 밖에 없는 그 춤을 썩 즐기지 않았다. 아이가 으쓱으쓱 움직일 때마다 파니에를 가지고 붕 띄운 스커트가 잘게 출렁였다. 왼쪽, 오른쪽, 옆으로 돌고, 없는 상대방의 손을 잡고 그 아래로 통과해서 천천히 한 바퀴. 앞으로, 뒤로, 상대방이 한 바퀴를 도는 동안 계속 스텝을 밟으며 박자를 타고.

공주는 입으로 딴딴딴딴 소리까지 내면서 양손을 잡고 몸을 비틀어 빙 도는 동작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좋아하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공주로서 그리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리카! 거기서 뭘 하는 거니!"

"어마마마!"

조피는 그대로 빌헬미네 왕비의 품에 달려가서 폭 안겼다. 왕비는 얘가, 얘가 소리를 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앤을 비롯한 다른 시녀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아롈은 이곳에 도착해서도 빌헬미네 왕비의 시녀를 빌려 쓰고 있었고, 앤은 작센 국왕에게 작위를 받은 이의 여식으로서의 예를 표했다.

아롈은 턱을 살짝 당겨 목례했다. 그녀는 아롈이 무릎 꿇어 경의를 보여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왕비 폐하."

"안녕하세요, 황태자비 전하."

작센의 왕비는 딸을 끌어안은 채로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딸이 폐를 끼쳐서 어쩌나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놀랐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는 해도 저렇게 자유분방한 언행을 하도록 놔두어도 되는 건가?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마음대로 내킬 때 춤을 추고, 책이 싫다고 이야기하고.

아, 그리고 어린 아이가 궁에서 부모의 처소에 무시로 드나들며 얼굴을 보는 것도. 어릴 적에는 공식 석상에서나 부모를 볼까 말까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수도원에 보내서 일정 나이까지 키우게 하거나, 아니면 처소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상례일 텐데.

왕도, 왕비도, 그 시녀들도 전부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조피의 구김살 없이 환한 미소를 보고 있으니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중부는 여자에게 상속권이 전혀 주지 않으니 저 아이가 여왕이 될 것도 아니었다.

아롈은 의도적으로 미소지었다.

"공주가 밝은 성격인지라 보기 좋습니다. 딱히 개의치 않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그래도 귀찮으실 텐데요."

빌헬미네 왕비는 처음 보는 시사촌누이에게 큰딸이 너무 들러붙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약간 귀찮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상할 정도는 아니어서 아롈은 고개를 저었다.

"친척 간이 아닙니까."

왕비는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작은 공국 출신 특유의 수더분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머리에 쓴 작은 관과 뒤에 시립한 시녀들만 아니면 시골 촌부라고 해도 믿을 소박한 차림이었다.

"저기, 바쁘신가요?"

"아닙니다."

"그럼 같이 산책을 하지 않으시겠어요?"

사실 들어가 벨타에게 소금물을 타 줘야 했다. 벨타는 한참 머릿속이 꽝꽝 울리게 목이 마르다며 비명을 질러대더니 지금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필리프가 내준 과제의 양은 밤을 꼬박 새야 할 만큼 많았다. 하지만 아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작센의 정원은 솔직히 아롈이 보기에는 영 볼품이 없었다. 그래도 볼거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조피 공주는 대뜸 커다란 나무에 매달린 그네에 올라타더니 이가 다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었다. 플라운스가 가득 달린 치맛자락 밑으로 뾰족한 구두코가 나왔다.

"밀어줘, 밀어줘!"

시녀 하나가 등을 밀어주자 아이는 빛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롈과 왕비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아롈이 보기에도 사랑스러웠다.

"저래서 어디 시집이나 갈는지 모르겠답니다. 아이가 영 극성맞은 왈가닥인지라. 험한 일을 겪으셨으니 편히 쉬셔야 할 텐데 짐을 떠맡긴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군요."

자식의 험담을 하면서도 왕비의 입가에는 진한 애정이 묻어나왔다. 조금 쓰라렸다.

"공주는 아직 어린 나이입니다. 어리광도 때도 있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왕비의 눈은 살짝 처져 있어 대단히 순해 보였다. 귀밑에 머리카락이 한 올 흘러내려 있었다.

"간밤에 잠자리는 편하셨나요? 아무래도 황태자비께서 자라신 코시카에 비하면 촌구석이라 대접이 여의치 않아 걱정이랍니다."

용이 시끄럽게 꽥꽥대는 것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빈말은 아니었다. 아롈은 함부르크에 비하면 천국 같은 이틀을 보냈다. 일단 입던 옷을 계속 돌려 입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부터 만족스러웠다. 욕조도 다 썩어가는 나무쪼가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대리석이었다. 그리고 왕비가 빌려준 시녀들은 작센 공작부인 엘레노아의 시녀들보다는 훨씬 교육이 잘 되어 있어 아직까지는 따로 크게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무엇보다 앤은 함부르크를 떠난 이후부터 정말로 조용하고 충성스럽게 굴었다. 기대보다 눈치가 빨랐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을 한 것을요. 황태자비께서 오신 덕에 적막하던 궁에 그나마 활기가 돈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잡아놓고 싶을 정도예요."

왕비의 뒤에서 불쑥 손이 나타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혼인만 안 했더라면 빌헬름과 결혼시켰겠소?"

"당신, 거기서 엿들으셨군요! 이거 놔요!"

왕은 껄껄 웃으며 아내의 관자놀이에 키스를 하고 놓아주었다. 아롈은 왕비에게 했던 것보다 조금 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작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작센의 카를 1세 아우구스트와 코시카의 옐리자베타 여대공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서글서글한 호남이었다.

그의 어머니인 옐리자베타 여대공의 초상화를 회랑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열두 살이 마지막, 그 다음이 죽기 직전의 스무 살 얼굴. 아무래도 외탁을 한 아롈과 그녀는 별로 닮은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옐리자베타 여대공은 아들과도 별로 닮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그의 어머니보다는 소피야 황후의 초상화 근처에 걸려있던 카를 1세 아우구스트를 훨씬 더 많이 닮아 있었다.

"안녕하시오, 사촌."

그는 가볍게 아롈의 인사를 받은 다음 부인에게 농을 걸었다.

"그래도 빌은 너무하잖소. 아직 두 살밖에 안 된 아이를."

"사내들만 어린 여자와 혼인하라는 법이 있나요? 여인들도 잘생기고 어린 사내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답니다."

"이런, 이런. 안 되겠구려. 내일 무도회는 취소요!"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연회 준비에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아니 그럼 내 아내가 다른 사내에게 눈 돌릴지도 모르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오? 자꾸 그러면 나도 다 생각이 있소."

"생각이라고요? 다른 여자라도 건드리겠다는 거예요, 뭐예요!"

"당신은 해도 되고 나는 안 되오?"

"내가 언제 건드리겠다고 했어요? 눈요기만 하겠다고 했지. 참나."

"그럼 나도 눈요기만 하면 공평하겠구려."

왕비는 씩씩거리며 국왕의 가슴을 주먹으로 토닥거렸다. 국왕은 엄살을 부리며 왕비의 손목을 잡아 입술을 댔다. 그네에서 뛰어내린 조피 공주가 달려와 왜 어마마마께만 뽀뽀를 해주냐고 앙탈을 부리자 국왕이 딸을 안아 올려 뺨에 얼굴을 비볐다. 조피는 숨 넘어가게 웃으며 수염이 따갑다고 소리쳤다.

아.

싫다.

아롈은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소스라쳤다. 그냥 보기 좋은 광경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왜 저 광경을 치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사실 궁정 연애라는 핑계를 방패삼아 불륜을 저지르는 이들에 비하면 이 부부는 얼마나 보기 좋은 한 쌍인가.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충실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이 아무 것도 모르는 아롈이 보기에도 철철 넘쳐나는데.

자연스러운 눈 흘김과 간간이 섞여 나오는 미소. 만지면 손가락에 안온함에 묻어나올 것 같은 광경이 눈물 나게 예뻐서 부러웠다. 그들에게 아롈은 철저한 타인이었다. 파블 1세와 그 정부 사이의 사랑 놀음에 아롈이 끼어들 수 없었듯이.

피가 식어 차가운 손을 어떻게든 데워보려고 꼼지락거리는데 작고 따뜻한 손이 아롈을 잡아왔다. 조피였다.

"당고모님, 아파요?"

"아니, 괜찮다."

"그럼 리카가 당고모님을 화나게 했어요?"

"내가 화난 것처럼 보이느냐?"

"아니 아파 보이는데. 어마마마는 리카한테 화나면 여기가 꾹 아프대요, 여기가."

아이는 아무 것도 모르는 눈으로 가슴을 눌렀다. 어쩌면 아픈지도 모르겠다. 화가 나서 아픈 걸까. 아롈과 마리야 유리예프스카야는 동갑이었다. 그 말은 파블 1세가 정부와 몸을 섞으며 노는 와중에도 어머니를 안았다는 뜻이었다. 이도 저도 아니었던 그 사람에게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화가 났다.

파블 1세는 아롈의 이름도 잘못 부른 적이 있었는데, 마리야에게만큼은 상냥했다. 언젠가 그가 정원에서 마리야를 안아올려 빙글빙글 도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그 쓰라림.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롈은 제 상처를 전혀 관계없는 아이에게 드러내는 칠칠치 못한 실수는 하지 않았다. 아롈은 무릎을 낮춰 아이와 눈을 맞추고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네가 잘못 보았다. 나는 아프지도 않고, 화나지도 않았으니."

"정말요?"

"그럼. 내가 네게 화를 낼 이유가 없지 않으냐."

공주는 금방 신이 나서 아롈에게 정말 빌헬름과 결혼해서 여기서 오래오래 같이 살면 안 되냐고 눈을 빛냈다. 농으로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간 떠날 때 얘기가 다르다며 울고불고 늘어질 것 같아 뭐라고 말해주어야 하나 망설여졌다.

"우와. 이거 뭐예요?"

조피는 아롈의 왼손에 눈을 돌렸다. 오른손에는 반지를 세 개 끼고 있었지만 왼손 약지에는 진주 반지 하나뿐이었다.

"약혼반지란다."

"예쁘다. 껴보면 안 돼요?"

아롈은 물건에 그리 애착을 두지 않는 편이었다. 어머니만큼 쉽게 질리지는 않아도 한 번 쓴 물건을 남에게 주는 것에는 별로 거리낌이 없었다. 오른쪽 소지나 검지에 낀 반지에 눈을 빛냈다면 흔쾌히 가지라고 빼주었을 것이다.

"응? 응? 잠깐만 껴보면 안 돼요? 예뻐서 그래요."

"안 되겠는데?"

"응? 왜요. 왜요. 한 번만. 한 번만. 진짜 잠깐만요. 당고모님. 네?"

아롈은 그 날 청색이 도는 진주를 골라 손가락에 낀 다음부터 다시 빼지 않았다.

"약혼반지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란다. 대신 이 반지로는 안 되겠니?"

아롈은 새끼손가락에 낀 감람석 반지를 빼서 조피의 손에 쥐어주었지만 조피는 도리질을 쳤다.

"리카는 진주랑 다이아몬드가 좋은데. 파란 진주가 감람석 같은 거보다 리카 눈이랑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데. 당고모님은 다른 보석도 많잖아요."

아롈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뒤에서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피 도로테아 루도비카!"

"왜 소리 지르고 그래요!"

아까까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국왕은 호랑이처럼 무서운 얼굴로 딸을 꾸중했다.

"대체 무슨 짓이냐! 어떻게 이 아비 얼굴에 똥칠을 해! 네 어머니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느냐?"

"리카는 달라고 한 적 없단 말이야! 한 번 껴보기만 한다고 했지! 그냥 예뻐서 그런 건데 아바마마는 왜 나한테만 그래요! 리카는 파란 진주 반지 없단 말이야!"

국왕은 성큼성큼 다가와 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롈의 가슴이 다 내려앉았다.

세상에, 저런 모욕적인 체벌 방식이 다 있다니. 어떻게 머리를 때릴 수가 있지? 아이의 훈육을 위해서 매를 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머리를!

그러나 정작 맞은 조피 공주는 별로 충격 받은 기색 없이 뺨을 부풀리고 대들었다.

"왜! 왜 때려요! 지난번에 안 때리기로 약속했으면서! 국왕이 돼서 약속도 어기고, 아바마마는 거짓말쟁이!"

"맞을만한 짓을 했으니까 때리지! 어디 탐낼 것이 없어서 남의 악혼 반지를 탐을 내! 길바닥 거지나 그런 짓을 하는 거다."

"리카는 공주지 거지가 아니야!"

"공주면 공주답게 행동을 해라!"

부녀가 옥신각신하는데 아롈은 쏟아지는 폭언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머리를 때리는 것도 모자라 딸을 두고 거지라고? 아버지에게 어린 딸이 소리 높여 바락바락 대거리를 하는 것도 놀라운데 더 경악스러운 것은 아무렇지 않은 기색의 시녀들이었다.

왕비가 사박사박 다가와 살짝 목례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딸 교육을 잘못 시켜 이런 일이 생겼네요. 엄히 가르치겠으니 마음에 두지 말아주시겠어요?"

아롈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예."

왕비는 잔잔한 눈웃음을 머금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롈과 다른 시녀들도 보조를 맞춰 부녀를 등졌다. 조금 떨어지자 왕비는 수줍게 어깨를 움츠렸다.

"놀라셨지요? 부부며 부모 자식 간에 너무 격의가 없어서."

차마 아니라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제국 여대공이신 황태자비께서 보시기에는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너무 마음에 두지는 말아주세요."

"어찌 그리 여기겠습니까?"

"빌이 고맙다 말하러 왔을 텐데 그만 잊어버렸나 봐요. 전해주신 말씀 덕분에 해군의 정비를 다시 하고 있다고 해요. 릴레벨트 해 근처의 나라들에는 당분간 상선을 띄울 때 주의하라고 경고를 하고 있어요."

"그런가요."

해군 동맹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럴 경우 코시카의 지배력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아롈은 그저 웃었다. 이제 아롈은 더이상 체사레브나가 아니었다. 로렌의 해군력을 걱정하면 또 모를까.

"어쩜 귀한 몸에 그런 고초를 겪으셨는지. 주님의 가호에 감사드립니다. 무사히 빠져나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세상에 아직 그런 흉흉한 짐승들이 돌아다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흉흉한 짐승이 바로 앞에서 보석인 척 달랑이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를 테지. 아롈은 이 주제가 더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잡담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주제를 떠올리다가 문득 바닥을 보니 나무 밑 이끼에 버섯이 피어나 있었다. 왕비도 그것을 발견했는지 먼저 화제를 돌려주었다.

"저것 보세요. 요정의 흔적이로군요."

페어리 링이라고도 불리는 버섯의 원이 하나, 둘, 세 개 있었다.

"저렇게 버섯이 원을 그리는 건 요정이 밤새 손을 잡고 춤을 춘 흔적이라고들 하지요. 황태자비께서는 요정을 보신 적이 있나요?"

요정은 본 일이 없다. 흉포한 용이면 또 모르겠지만. 습관적으로 목에 손이 올라갔다.

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왕비는 곱게 눈웃음쳤다.

"반지가 참 고와요. 꼭 요정의 원처럼요."

작은 네 개의 마름모꼴 다이아몬드와 네 개의 원형 다이아몬드가 서로 엇갈리며 진주를 감싸고 있었다. 처음에는 희한한 조합이다 싶었는데 볼 수록 마음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냥 예쁜 반지라고 생각하면 못 빼줄 것도 없었는데. 웬 어린애 같은 강짜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조피가 다시 달라고 하면 빼주고 싶지 않았다.

"약혼이라. 그립군요. 제가 처음 얼굴도 모르는 이와 약혼을 했을 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답니다."

여기서 아롈은 아주 조금 놀랐다. 당연히 연애를 해서 혼인했을 줄 알았는데.

"빌을 본 순간 요정이 제 눈에 팬지 꽃즙을 바르고 간 줄 알았답니다. 보자마자 확신이 생겼지요. 아, 이 사람은 나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으시는군요?"

"그럼요."

그 순간 왕비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너무 찬란해서 아롈의 가슴을 후벼파고 말았다.

"황태자비께서도 팬지꽃즙의 효능을 믿게 되는 날이 오실 거예요.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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