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여름 눈송이


4. 사랑꽃의 즙과 춤추는 요정 (3)


 샹들리에는 적당하고, 회장도 좀 좁긴 하지만 그거야 소국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악사들의 솜씨는 적어도 함부르크보다는 나았다. 빌헬미네 왕비가 정말 열심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아롈을 환송하는 연회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롈은 회장 이층에 위치한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아롈은 조피의 등쌀에 못 이겨 일찌감치 나와 있었다.

"춤. 춤. 춤은 언제 시작해요?"

"글쎄? 일단 국왕 폐하께서 오셔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춤출 만한 상대도 있어야지."

"빨리 추고 싶은데. 예쁘게 꾸몄단 말이에요."

"그래. 예쁘구나."

조피는 기어이 자주색 옷을 입고 왔다. 조피의 시녀는 옷 색을 물은 뒤에도 서너 번은 더 와서 머리 모양과 차고 나갈 장신구의 종류 등을 물었다. 그녀의 고생이 헛되지 않아 조피와 아롈은 꼭 닮지 않은 자매 같았다. 가운데가 갈라져 화려한 흰 속치마가 보이는 중부식 드레스를 차려 입고, 파란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하고, 작은 관을 썼다.

조피는 아롈을 끌고 거울 앞에 가서 서보더니 굉장히 만족한 기색으로 희희낙락했다.

"당고모님도 예쁘세요."

"고맙다."

아롈은 습관적으로 베일을 정리하려 손을 올리다가 멈칫했다. 아롈은 결혼한 몸이라 공식 석상에서 머리를 풀어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머리를 중부식으로 돌돌 말아 틀어올리고 관을 쓴 다음 꽃을 꽂아 장식했다. 손끝에는 큼지막한 귀걸이만 스쳤다. 무안하게 손을 내렸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스레 고개를 돌리다가 이제 막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미셸? 일찍 나왔군요."

"안녕하세요, 아롈.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아름다우십니다."

"과찬이군요."

오를레앙의 장 미셸 루이 프랑수아는 변함없이 잘생긴 외모를 한껏 빛내며 아롈에게 다가왔다. 레이스로 덧댄 앞섶과 검붉은 재킷, 미색 바지가 아주 잘 어울렸다.

"머리에 꽂으신 꽃에게는 잔인한 밤이 되겠군요. 이토록 고우신 분의 머리칼을 장식하는 건 영광이나, 내내 모자란 미모를 부끄러워해야 할 테니까요."

아롈은 피식 웃으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러 문학 작품만 읽어도 남쪽 사람들이 북쪽보다 훨씬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는 건 사실이지만 미셸은 그 중에서도 특히 낯부끄러운 칭찬을 자주 했다. 처음에는 대단히 곤혹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으나 같이 여행한 지 한 달이 넘은 지금은 웃고 넘어갈 정도로 익숙해졌다.

막 책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차린 그는 아롈의 손등에 먼저 입맞추고 조피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공주 전하?"

분명히 그저께 봤을 텐데 조피는 그를 처음 본 것처럼 놀랐다. 맑은 회색 홍채 안에 샹들리에의 빛이 명멸했다. 조피는 금세 허리를 쭉 펴고 턱을 당긴 다음 나른한 고양이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아롈은 실소했다.

"그대의 이름은?"

소개를 한 기억이 분명 있는데. 하긴 그 때 조피는 아롈의 머리카락을 보고 탐을 내느라 모든 것을 건성건성 들었던 것 같다. 미셸은 귀찮다는 기색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고 대답했다.

"리무쟁 공작, 오를레앙의 장 미셸 루이 프랑수아입니다. 어여쁘신 공주 전하."

"오를레앙? 로렌의 오를레앙?"

"과연 영민하십니다. 오늘 이토록 아리따운 모습을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자기는 오직 리젤로트에 대한 일편단심인데 사람들이 다 오해한다고 했던가. 저렇게 쓸데없이 상냥하게 구니까 다들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거지. 어린 아이를 대하는데도 진지함이 뚝뚝 묻어났다. 조피는 말까지 더듬었다.

"나는, 나는 작센의 조피 도로테아 루도비카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

벌써 귀가 발그레한 걸 보니 당장 왕에게 가서 약혼한다고 팔짝팔짝 날뛸 기세였다. 아롈은 속으로만 속삭였다. 안타깝지만 저 사람에게는 죽고 못 사는 약혼녀가 있단다. 미셸은 아롈이 차 한 잔만 내주어도 리젤로트는 설탕을 두 스푼 넣어 마신다고 이야기하는, 공처가 기질이 아주 다분한 남자였다.

"조피. 춤을 추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조피가 놀라서 아롈을 올려다보았다. 아롈은 미셸에게 눈짓을 했다. 그는 다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조피 공주님. 저와 첫 춤을 ​추​어​주​시​겠​습​니​까​?​"​

조피는 아롈을 쳐다보며 갈팡질팡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아롈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려무나."

"그럼 당고모님은 혼자 계실 거예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공주는 미셸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저러다 넘어질지도 모르는데. 이래서는 떠나는 길이 편치 않겠다 싶었다. 고작해야 색 옅은 금발일 뿐인데 뭘 그리 부러워할까. 흔한 색은 아니어도 북쪽에서는 아예 찾아보기 어려운 머리칼도 아니었다. 아롈은 턱을 괴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춤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다.

공주가 중앙으로 나오자 춤을 추고 싶어 하는 남녀가 하나 둘 나와 줄을 섰다. 줄은 이내 원을 한 번 꼬아놓은 형태를 이뤘다. 요즘은 미뉴에트로 첫 춤을 시작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한동안 알르망드가 궁정을 휩쓸고 가더니 새로운 것들이 질렸는지 원래대로 미뉴에트 바람이 불었다.

코시카 황도에서 유행한 춤, 의상, 실내장식 등은 시간차를 두고 다른 나라에서 유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작센은 코시카의 문화 영향을 속국만큼 직접 받는 국가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왕의 어머니가 코시카 여대공이었던 만큼 영향권 안에 있기는 했다. 실제로 회장의 여자라면 하나 같이 걸치고 있는, 가는 금줄에 손톱만한 유색 보석이 딱 한 개 달랑거리는 팔찌는 옐레나 여제가 유행시킨 것이었다. 아롈은 팔찌보다는 반지를 선호해, 오늘도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만을 하고 나왔다.

조피는 약간 딱딱하지만 격식에 갖춰 미셸에게 맞절을 하고 구경하고 있는 아롈 쪽을 향해서도 치마를 펼쳐보였다.

앞으로 두 발 나가 무릎을 굽히고, 무릎을 펴고 또 두 발 앞으로. 옆으로 두 발 걸어 또 굽히고, 펴고 다시 모이는 데에 두 발. 이걸 두 번 반복하고 두 번째 뒤의 사람과 자리를 교체. 반복.

이런 기본 스텝의 미뉴에트는 날이 갈수록 느리고 화려해졌다. 회전이 쉴 새 없이 들어가고, 강약약의 세 박을 명확하게 지키는 대신 꾸밈음과 당김음, 반음 등을 절제 없이 넣어 자칫하면 발이 꼬여버리기 일쑤였다.

미셸이야 미뉴에트가 탄생한 본고장에서 왔으니 그렇다 치지만 조피는 어린 나이인데도 대단히 능숙하게 춤을 추었다. 춤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나보다.

가로 세로로 프릴이 가득 달린 페티코트가 조피의 회전에 따라 붕 떠올랐다. 좋아하는 춤을 추고 있는 아이는 참 예뻤다.

아롈은 다시 한 번 베일을 정리하려고 손을 올렸다가 머쓱하게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작은 귀걸이가 잡혔다. 아무래도 당분간 베일은 쓰지 말아야겠다. 로렌에 가면 베일을 쓰지 못 할 텐데 버릇을 못 고치고 이렇게 어색하게 굴 수는 없었다.

미뉴에트가 2부인 트리오 부분으로 넘어갈 때쯤 아롈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목이 조금 말라서 음료를 마시고 싶었다. 앤이 아직 나오지 않아, 시킬 사람이 없었다. 물로 목을 축인 아롈은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다가 춤을 추지 않고 찌를 듯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보아하니 한참을 그러고 쳐다본 눈치였다.

뭐지, 저 건방진 놈은.

대번에 눈썹이 찌푸려졌다. 짙은 회색 머리칼을 갈기처럼 뒤로 묶은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대의 이름은?"

키가 크다기보다는 체격이 좋은 남자였다. 아롈과 키가 비슷했다. 아롈은 그 얼굴을 보고 금세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닮아 있었다. 턱을 당기며 질문을 던진 것은 단지 말을 던지기 위한 수사에 불과했다.

"루드비히 테오도르 폰 위튼입니다, 전하."

위튼은 작센 왕가의 성이었다. 그는 다 알면서 왜 굳이 묻느냐는 권태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통치가문의 일원은 남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굳이 성을 붙이지 않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건만, 그는 일개 귀족인 것처럼 말했다.

"작센의 루드비히라고 소개하는 편이 알아듣기 쉽지 않겠소? 왕자."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제 기호에 따른 것입니다. 굳이 어린 조카들처럼 이름에 작센을 붙이고 싶지는 않군요."

"하지만 다르게 불러줄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잖소."

옐리자베타 여대공의 아들이자 프리드리히 1세의 동생, 루드비히 왕자에게는 다른 공작 작위가 없었다. 작센 공작은 그의 사촌인 작센-함부르크의 요제프의 작위였다.

"그냥 루드비히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굳이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으시다면 부디 그대로 왕자라고 불러주시지요.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며칠 있으면 지난 날 그랬듯 평생 볼 일이 없게 될 테니까요."

필리프와 프리드리히 1세에 이어 지금까지 아롈이 만난 세 번째 사촌은 지금껏 아롈이 살면서 만난 친척들 중 가장 무례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지. 그런데 그대는 병중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왕제(王弟)인데도 아롈을 맞이하는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고 빌헬미네 왕비가 그 수줍은 태도로 대신 몇 번이나 사과를 했다.

"꾀병이었나?"

거동조차 하기 힘든 몸이기는커녕 그의 얼굴은 연지를 바른 아롈보다도 혈색이 좋았다.

"전하의 발을 핥으러 기어나가지 않아서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지금이라도 명령하시면 구두를 벗기고 정성스레 빨아드리지요."

명백한 성적 함의가 담긴 말이었다.

"아니. 내키지 않소. 그대의 혓바닥에 내 발이 더러워질 테니."

발가락의 때보다 더러운 그 입 닥치라는 일갈에 그는 지지 않고 반응했다.

"지금 밟고 계신 회장의 대리석이 소인의 침보다 더 청결할 것이라고 그리 믿고 계십니까? 정말로?"

"대리석은 몰라도 최소한 내 구두는 더 깨끗하겠지. 오늘 처음 신고 나온 새 것이오만."

이쯤 되면 왜 이렇게 적의를 품고 있는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롈은 이 정도로 이유 모를 공격성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하다못해 유모가 아롈을 폭행했을 때도 그녀에게는 아롈 때문에 내가 이런 오지로 좌천됐다는 비뚤어진 명분이라도 있었다.

"숙부. 여기는 왜 왔습니까?"

어느새 춤이 끝나 있었다. 조피는 미셸의 에스코트를 뿌리치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달려왔다.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왔습니까?"

조피는 아롈보다 훨씬 과감하게 행동했다. 치마를 들자 나온 구둣발이 루드비히 왕자의 다리를 거세게 걷어찼다. 그러나 왕자는 단 한 발짝 뒤로 움직임으로써 피해버렸고 조피는 중심을 잃었다.

간신히 미셸이 붙들어서 넘어지지 않은 공주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째지는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당장 꺼지십시오!"

연주되고 있던 두 번째 곡이 뚝 멈췄다. 아롈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중부 지방의 악단은 교육을 어떻게 받아먹은 걸까. 루드비히는 나지막히 비웃었다.

"여전히 천박하시군요."

"또 술이라도 처먹었습니까? 대체 여긴 왜 온 겁니까!"

"예, 처먹었습니다. 저는 술을 처먹으면 안 되는 겁니까?"

"루드비히!"

하마터면 예의 없이 귀를 막을 뻔 했다. 온 연회장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의 층이 마치 줄을 잡아당긴 커튼처럼 갈라졌다.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연회장을 가로질러왔다.

 

몰랐지만 다른 사람의 꿈 속에 직접 들어가는 것은 어마어마한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의 꿈에서 쫓겨난 이후 마르그리트는 꿈을 전혀 꿀 수 없었다. 그녀는 당황했다. 평생 꿈 없이 산 날이 없었다. 그 남자는 물론이고 루이즈조차 훔쳐볼 수 없었다. 게다가 자도 자도 피곤하기만 했다.

일주일 동안 숙면을 취하지 못 한 마르그리트는 눈 밑에 새카만 그늘이 진 채로 비틀비틀 성의 계단을 내려갔다. 보다 못 한 할멈이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다고 했다. 마르그리트가 머물고 있는 성은 오래된 곳이라 계단이 나선형이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난간을 잡고 아래로 내려가던 마르그리트는 깜빡 졸고 말았다. 발이 허공을 딛었다. 마르그리트는 속절없이 카펫 위로 굴러떨어졌다.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