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랑꽃의 즙과 춤추는 요정 (5)
미뉴에트로 시작한 춤은 알르망드를 지나 곧바로 쿠랑트, 숨 쉴 틈도 없이 가보트와 브랑르로 내달렸다. 아롈은 연달아 다섯 곡을 추고 구석으로 빠져나왔다. 간만에 격렬하게 움직였더니 숨이 가빴다. 특히나 이 지방은 박자가 아롈의 계산보다 빨라서 더욱 그랬다. 목이 말랐다.
국왕은 아롈을 데려다주자마자 조피의 손을 잡고 다시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버렸다. 아롈은 홀을 둘러보며 앤을 찾아보았지만 검은 머리의 여자가 너무 많아 여의치 않았다. 앤은 아롈에게 벨타의 소금물을 갈아주고 따라오겠다고 했다. 아마 그 짐승이 까탈스럽게 구는 모양이지. 빨리 소식을 전해줄까 했는데 아니 보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앤의 백작녀 작위를 인정하는 공식 외교 문서를 써줄 것을 약속했다. 그 말은, 작은 성이나마 앤의 소유에 들어간다는 뜻이었고, 이는 작센의 상속법을 위반하는 일이었다.
-사촌. 너무 과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오?
-과한 요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오. 써주지요. 이모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그는 앤의 할머니-마리야 여공에 대한 언급을 하고 빙그레 웃어보였다. 이로써 누구도 앤의 지위에 토를 달 수는 없게 되었다.
최소한 앤이 울면서 할머니에게 뛰어가지 않을 정도의 대우는 해주어야 했다. 그러려면 최소한의 작위를 갖추는 것은 필수였다. 앤의 아버지가 백작의 위를 받았다지만 그는 아들 없이 죽었기 때문에 레르헨펠트 백작위는 작센 국왕에게 한 대만에 회수되었다. 앤이 례비제프 후작의 손녀임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그녀는 백작녀가 아니라 무작의 여인이 될 수도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루드비히 왕자가 저지른 멍청한 짓 덕분에 약점을 잡히지 않고 앤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윽."
아롈은 색 예쁜 음료수를 아무 생각 없이 꿀꺽꿀꺽 들이키다가 그대로 옆에 비치된 냅킨에 뱉어냈다.
주스인 줄 알았더니 술이었다. 그것도 입에 머금고 있는 것만으로도 도수를 가늠할 수 있는 독주.
여기는 무슨 순진한 숙녀들을 쓰러뜨려서 침대에 끌고 가려는 늑대들만 모인 곳인가? 겨우 세 모금 정도 넘겼을 뿐인데 순식간에 배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아롈은 얼굴을 찡그리며 냅킨으로 입가를 거칠게 닦아냈다. 흰 천에 분홍색의 연지가 지저분하게 묻어났다.
아롈은 붉은 물이 든 냅킨과 잔을 버려두고 당장에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바람을 좀 쐬어야 취기가 가실 듯했다. 어린 여자가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것만큼 추한 일도 드물다. 아롈은 평소에 절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취기에는 약했다.
아롈은 정처없이 걸으며 손가락을 쭉 펴고 손등을 바라보았다. 섬세한 레이스 장갑 위로 파란 진주가 동그랗게 떠 있었다. 미셸은 이 반지를 보더니, 원래 로렌에서는 전통적으로 약혼 반지에 진주를 쓴다고 알려주었다. 진주는 순결을 상징하는 보석이었다.
하지만 대체 궁정에서 순결을 지키고 결혼하는 이가 몇이나 있다고. 다들 궁정 연애라는 허울 좋은 불륜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여인은 치마를 걷어 올리고 사내는 다리 사이를 파고들기 일쑤 아닌가. 아롈은 소위 말하는 순결한 몸이었지만 그건 알렉산드르의 전례를 곱씹으며 혼인 전에는 절대 사내와 한 침상을 쓰지 않기로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아롈은 남편인 세시안과도 정식으로 약혼한 적이 없었을 뿐더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약혼을 한 적이 없었다. 황제의 손녀임에도 약혼자가 없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먼저, 아롈이 막 황도에 돌아왔을 때에는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았다. 탯줄을 떼자마자 북쪽에 보내진데다, 파블 1세를 닮은 곳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 소문의 근거였다. 아롈은 회랑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이 키옌 가문의 적손임을 증명했으나 헛소문이 의외로 효과가 좋았는지, 어릴 적에는 아무도 선뜻 약혼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소문이 사그라든 다음에는 아롈의 지위가 애매해졌다. 알렉산드르가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죽은 미하일 대공의 아들인 콘스탄틴 대공이 적법한 후계자라는 여론도 슬금슬금 기어 나올 때였다. 알렉산드르가 도망치기 직전 이반 3세는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에게 황위를 물리고 싶어 했기 때문에 황제의 최측근들마저도 갈팡질팡했다.
아롈이 이를 악물고 사내나 배울만한 총술과 검술을 배우는 등의 후계자를 노리는 모습을 보이자 혼담이 몇 들어오긴 했다. 하지만 이반 3세가 전부 거절했다. 코시카 여대공에게는 격이 떨어지는 집안이라는 핑계였다. 사실 그 때까지도 어찌 할 지 결정을 못 한 걸 뻔히 아는데.
그런 맥락에서 보면 조부는 무덤에서 이제 더 이상 핑계를 찾을 수 없으리라. 남쪽의 로렌을 다스리는 발루아는 기원으로 따지면 키옌만큼이나 오래된 가문이었다. 더군다나 아롈의 남편인 세르 루이 세바스티앙은 아롈과 동등하게 His Imperial Highness라고 불릴 수 있었다. 격을 따지려면 이보다 좋은 집안이 어디 있을까.
잠시 자학과 빈정거림의 시간을 가진 아롈은 다시 처음 생각으로 돌아와 반지를 쓰다듬었다.
굉장히 절망스럽고 아프지만, 그래도 이렇게 된 이상 잘 살아보고 싶었다. 전 세계와 자신의 명예를 담보로 걸고 릴레벨트와 파프너라도 동원하지 않는 이상은 아무리 울고 애원해봐야 다시는 코시카의 여제가 될 수 없었으니까. 조금 굴욕적일만큼 빠르게 진행된 혼사에 직접적인 불평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말해봐야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미셸이나 필리프에게 남편이 어떤 사람이냐고 굳이 캐묻지도 않았다. 결혼 서약서에는 서명한 이상 아롈은 이미 그 사람의 아내였으니. 아롈이 안절부절 못 하며 물어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신의와 명예를 아는 사람이기를, 출산하는 아내를 놔두고 정부의 옆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랐다.
평생을 바쳐 원했던 것은 빼앗겼지만 황위만이 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세상에는 누군가의 아내로 사는 이가 훨씬 많지 않나. 알렉산드르만 아니었어도 아롈은 원래 이 길을 걷고 있을 터였다. 다른 사내와 약혼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그러다 죽겠지.
물론 혀를 깨물어 자르고 싶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최악의 미래를 상상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잘 살아보고 싶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릴레벨트며 앤의 일로 안 그래도 지친 심신이 걸레처럼 너덜거릴 무렵, 이곳의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엄격하게 자란 아롈이 깜짝 놀랄 만큼 격의 없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가족.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어리광쟁이 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부모가 있고.
부러웠다.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자체가 싫었다. 어렸을 때 보고 그렇게 아팠던 광경이 실제로 있었다. 지금껏 그런 애정은 평범한 결혼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연애놀음은 천박한 정부하고나 하는 거라는 구시대적인 변명만을 뇌까리고 있었다.
미셸의 애정을 보았지만 리젤로트를 실제로 보지 못 한데다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몸이니만큼 신뢰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촌 부부는 아롈의 변명을 깨부쉈다. 가문과 가문의 이익을 위해 혼인한 지극히 평범한 부부인데도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도 서로 아끼고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그래서 잠깐 희망을 가졌다. 반지에서 느껴지는 성의가 희망을 부추겼다.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동봉된 편지에서는 나름대로의 다정함이 묻어났다. 직접 쓴 게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간과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직접 썼을 수도 있으니.
그런데 결국 이 부부도 깔끔하게 맺어진 연은 아니었던가. 자기 약혼녀를 버리고 결혼한 것이었나. 빌헬미네 왕비의 신분이 조금만 낮았다면 그녀는 왕비가 아니라 정부가 되었겠지.
방법서설을 쓴 학자가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이성적이지 못 한 생각이지만 쫓겨났다는 약혼녀에게 자꾸만 감정이 이입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눈이 돌아간 약혼자를 보고 속이 썩었을 그녀에게.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리고 나도 언젠가 그렇게 비참하게 될까?
결국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생물일까. 신의를 지키지 못 하고 다른 이성에게 눈이 돌아가는 것이 정상일까.
-당신의 세시안
'남편'은 편지에 그렇게 썼다. 하지만 모르겠다. 아롈이 정절을 지킨다고 해서 남편이 정절을 지켜준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그는 안 그래도 그렇게 문란하다는 로렌의 후계자인데. 미셸이 말하길, 황제도 굉장한 소동을 일으키며 연애 결혼을 했지만 지금 공식 정부를 두고 있다고 했다.
처음부터 믿지 않으면 상처를 받지 않게 되지 않을까. 마치 어머니처럼. 어머니는 파블 1세에게 전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지위에 만족했고 그 지위를 위협받자 단숨에 목을 잘라버렸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게 가장 좋은 길일까. 그런데 그것이 '잘 사는' 걸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서성이는 사이 뺨이 뜨뜻할 정도로 달아올랐다. 아롈은 없는 베일을 만지려 올린 손을 뺨에 얹어보곤 쓴웃음을 머금었다. 귓불을 만지자 따뜻한 귓바퀴에 찬 손이 닿아 시원해졌다. 어느 새 버섯이 소담스레 피어난 나무 밑이었다. 빌헬미네 왕비가 말한 요정이 춤춘 흔적.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술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웠다. 치마를 살짝 들어보니 비단 구두에 풀물이 들어 있었다. 아깝게도 구두를 다 버리고 말았다.
아롈은 입술로만 웃었다. 아직 만나지도 못한 상태에서 고민해봐야 무슨 답이 나온다고. 의미 없는 짓이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돌아가야겠다.
아롈은 뒤돌아섰다. 그리고 빨간 머리의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국 태자비에게 무릎을 꿇으려 했다. 아롈은 살짝 딱딱해진 혀로 만류했다.
"그러지 않아도 되오. 멘 공작."
하필 고르고 골라 이 때 마주친 남자가 불륜의 증거인 사생아라니.
그는 멋쩍게 웃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루이 앙투안 드 발루아. 남편의 이복동생. 사생아에게 공작 작위를 주는 것이야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긴 했다. 파블 1세의 사생아들도 유리예프스키 공자/공녀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편법에 의한 것이었다. 코시카 산하의 수많은 공국 중 공의 이름이 파블인 공국을 찾아 무자식인 일흔 살의 노인과 헬레네를 결혼시키고 그 자식들을 아래에 입적시킨 것이다.
그것만도 어이가 없었는데 로렌은 사생아를 적자로 인정하고 계승권을 준다니. 아롈의 입장에서는 하늘과 땅이 뒤집힐 소리였다. 어떻게 사생아가 적자가 된단 말인가. 인지된 사생아라니, 그런 말장난이 어디 있을까.
아롈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가 북쪽 말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뭘 그리 빤히 보고만 있었을까. 아, 로렌은 낮은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도 되는 문화가 아니었지. 코시카에서는 인사는 아랫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 예절이어서, 아롈은 아직도 종종 헛갈리곤 했다. 장검 호에서 그걸 가지고 몸소 타박을 줬으면서 기억을 못 했다니 정말 취했나보다.
"전하. 홀로 계시면 위험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숨이 따뜻했다.
"이 곳은 작센의 왕성이오. 위험하겠소?"
"로렌의 이블린 궁이라 하여도 홀로 계시는 건 위험합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아롈은 알량한 검술과 총술 나부랭이 좀 익혔답시고 제 한 몸 지킬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의 철부지는 아니었다. 사람은 정말 놀랍도록 쉽게 죽는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오라비인 이반 파블로비치도 궁에서 죽었고, 파블 1세도 궁에서 목이 잘렸다.
아롈은 목걸이를 매만졌다. 오늘 하고 온 목걸이는 희귀하기로 유명한 푸른 토파즈와 푸른 녹주석이 금강석과 엮여있는 것으로 값이야 어마어마했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해룡은 들어있지 않았다.
-내가 너를 지키겠다. 그러니 내게 마법을 제공해다오.
흰 허리띠를 두른 흉포한 푸른 용은 지금쯤 패물함에서 얌전히 빛나고 있으리라. 아니면 앤이 따라준 소금물에서 헤엄치고 있든가. 무슨 일이 생겨도 그 게으른 생물이 알아차리리라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아롈은 시녀 하나 없이 혼자 빠져나온 경솔함을 잠시 반성했다. 최소 한 명은 데리고 나왔어야 했다. 아니면 나온다고 말은 전했어야 했다.
"계속 산책을 하실 거라면 제가 배행하겠습니다."
한숨을 꿀꺽 삼켰다. 사람을 눈앞에 두고 한숨을 쉬는 것만큼 모욕 주는 일도 드물었다. 필리프-보르디의 외사촌이 말했지. 적을 최대한 만들지 말라고. 적을 만들 거라면 최대한 아군을 분명히 하라고.
이미 미운털이 박힌 남자였지만 더 적의를 사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루드비히 왕자는 이유는 몰라도 정말 피곤하게 굴었다. 앙투안이 그렇게 변하면 대단히 짜증날 것 같았다.
아롈은 걸음을 떼며 물었다.
"처음부터 따라왔소?"
"예."
멘 공작은 한 발짝 뒤에 따르며 답했다. 저 멀리 연회장에서 나오는 빛이 부옇게 흐려보였다. 아롈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사람이 하나 졸졸졸 따라오는데도 몰랐단 말인가. 정말 칼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원래 북쪽 말에 능하오?"
"외할머니가 북쪽 출신입니다."
아롈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분명 이 근처에 그네가 있었다. 갈림길로 들어가자 커다란 나무가 나왔다. 거대한 가지에는 가장자리가 예쁘게 조각된 나무 그네가 묶여있었다. 양손으로 줄을 잡고 그네에 주저앉자 널빤지가 천천히 흔들렸다. 아롈은 앙투안을 쳐다보았다. 물론 조피처럼 밀어달라고 응석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생아. 만일 자신이 자식을 낳지 못하면 남편도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자식을 인지(認知)할까? 그리고 파블 1세처럼 그들에게 사랑을 쏟을까. 아내가 아이를 낳는 동안에도 정부와 사랑 놀음을 할 만큼.
아롈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공작은 왜 신분을 밝히지 않소?"
그는 철저히 호위 행렬의 기사로서 행동했다. 평기사들과 함께 섞여 생활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무얼 먹는지는 모르지만 공작 신분을 밝히고 나서 대접받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격이 떨어질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애초에 나에게도 밝히지 않은 것도 그렇고. 그대와 동급인 공작부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작센 국왕에게도 숨긴 것은 무례요."
"제가 평기사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로렌 황제 폐하의 아들인 것도 사실이지. 고의로 숨기고 있잖소."
"부디 아량을 베풀어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황제의 아들이라고 눈을 치뜰 때는 언제고 사생아라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은 가지고 있었던가. 아롈은 그에 대한 평가를 약간 상향조정했다.
점점 달아올라오는 얼굴 때문에 손부채질을 했다. 부채가 짐에 있던가? 자질구레한 물건은 앤이 챙기고 있으니 물어봐야겠다. 없으면 하나 만들면 되고.
"알겠소."
글로만 읽었던 취기를 체험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취하면 관대해지는구나. 아롈은 가만히 발을 뻗어 그네를 밀었다.
로렌의 세르, 루이 오귀스트는 요새 여자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봄바람에 머리가 돈 수사슴 같던 시절에도 그토록 생생한 꿈은 꿔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여자는 정말 못생겼다. 조각 같은 나신의 미녀가 나와도 부족할 판에 그런 추녀를 꿈꾸다니.
사내들도 머리카락을 부지깽이로 말고, 레이스를 옷에 달고 다니는 세상에 그 여자는 밋밋한 옷을 입고 보석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순한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치맛단 아래로 고스란히 드러난 통통한 다리, 코에 잔뜩 얹혀 있던 주근깨, 뺨을 짓누르던 예의없는 손바닥.
-저는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안 앙리에트 대공녀, 블루아의 아가씨예요.
오를레앙 대공가에 마르그리트라는 여자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찌나 그 목소리가 크던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한동안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가 마지막에 한 행동은 수치스러워서 차마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계집에게 입술을 빼앗기다니! 아무리 꿈속이었다지만!
그는 눈앞의 교양 있고 어여쁜 약혼녀와 차를 마시면서도 꿈 속에서의 대화만을 복기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귀족 연감을 뒤져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세르.
-음, 미안하오. 불렀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억양까지 계산된 것처럼 단정했다. 엘리엔 소피 아델라이드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매끄럽게 웃었다.
-소녀가 피곤하게 해드렸나 봅니다. 세르의 안부를 미처 살피지 못 한 제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신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시오.
그녀는 정련된 것처럼 상냥하게 웃어보이더니 흠잡을 곳 없이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카펫이 깔려있다고는 해도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움직임은 확실히 귀티가 났다.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귀하게 자란 대공녀. 완벽한 여자였다.
그는 차를 마시며 부러 몇 가지 언어를 섞어 썼다. 어설프게 배운 아가씨들은 여기서 나가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그 끈덕진 오를레앙 대공녀도 간혹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불쾌하다는 얼굴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결국 계집이란 사내보다 열등한 족속들이다. 드레스를 입고 머리치장이나 하고 있으니 공부가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지.
그런데 엘리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평온하게 모든 말을 다 받아쳤다. 건방졌다. 여자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은 사내와 대등하게 콧대를 치켜세우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까 루이 오귀스트의 대답이 잠깐 엇나갔을 때, 엘리엔 대공녀의 눈이 미묘하게 휘어졌다.
깔보는 눈.
그 표정은 루이 오귀스트가 바로 대답을 정정하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으나 내내 불쾌하게도 예쁜 얼굴 위에 어른거렸다.
그는 여인에게 폭신하고 예쁜 몸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하룻밤 여자는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보다 잘났다며 꼬리를 도도히 세우는 건방진 여자를 아내로 삼고 싶지도 않았다. 납작 숙여서 사근사근하게 굴면 알아서 좋은 점수를 주었을 것을.
정말 다행히도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인 아델라이드 황후가 엘리엔이 어떠냐고 다그쳐 물었을 때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좋은 여자를 골라주셔서 감읍할 따름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마음속에서는 아키텐 계집의 유명한 예를 떠올리면서 그 건방짐을 언젠가 짓밟아줄 날을 고대했으나 귀로는 황후가 조카를 칭찬하는 것을 듣고 입으로는 그리 차갑지 않게 웃을 수 있었다.
블루아의 아가씨, 블루아의 아가씨. 블루아의 아가씨라.
그는 다시 시종이 부를 때까지 사색에 잠겨 그 이름을 되뇌었다.